능동성, 망각과 기억의 드라마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에는 소세키 특유의 유쾌함이 넘쳐난다. 주인공은 어수룩해서 머리로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인정하지만, 어떤 일에든 끈질기고 정직하고 용감하다. 또 거센바람과 연대해 빨간셔츠의 무리들과 대결하고, 이 때문에 표표히 학교를 떠나는 장면에선 서부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찡하기까지 하다. 도련님을 통해 젊은 시절 꿈꾸던 순수함을 다시 보는 느낌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가 만화 주인공처럼 보여서, 오히려 그런 장면들이 그를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더욱이 그런 주인공을 ‘자기본위’의 표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혹시 ‘자기본위’를 상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마저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도련님』을 읽을 때마다, 도련님의 기상천외함 밑에 깔려 있는 내적논리를 나름대로 규명해보고 싶었다. 이런 욕심이 든 것은 니체가 말하는 ‘능동적인 인간’을 도련님처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이 보여주는 ‘망각’과 ‘기억’, 그리고 ‘능동적인 인간’을 이해한다면 기상천외함과 유쾌함 밑에 숨겨진 도련님의 면모를 좀 더 밀도 있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는 당시 일본이 한동안 니체 열풍에 휩싸여 있었고, 소세키도 한때 이 영향을 받아 메모까지 하면서 니체를 탐독했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나는 소세키의 ‘자기본위’가 니체의 ‘능동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니체의 망각과 기억 그리고 능동성을 면밀하게 이해하는 것이 소세키의 ‘자기본위’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망각의 역량: 과거는 반드시 잊는다
도련님은 시작부터 돈키호테적이다. 같은 반 녀석이 2층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고 놀리자, 그 자리에서 그냥 뛰어내린다. 그리고 하는 말. “다음에는 허리는 삐지 않게 뛰어내릴게요!” 또 친척에게 받은 서양제 칼을 비웃자, 대뜸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쓱 베어 버린다. “뭐? 손가락? 그것쯤 문제도 아니지!” 이런 아들을 두고 부모가 경솔하다고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이쯤 되면 과대망상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현실적으로 납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뜻밖에도 니체는 이런 인간이야말로 ‘고귀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귀한 인간은] 위험이든 적이든 무모하게 돌진해가는 것 같은 어떤 어리석음이, 아니면 그 어떤 시대에도 고귀한 영혼이 스스로를 다시금 인지하게 되었던 분노, 사랑, 경외, 감사, 복수 등을 열광적으로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귀한 인간의 원한 자체는, 그것이 나타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바로 잇달아오는 반작동으로 수행되고 약해지기 때문에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비행(非行)까지도 그렇게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것은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실한 인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겁쟁이라고 놀리면 2층에서 뛰어내리거나, 비웃으면 칼로 손가락을 긋는 정도의 기상천외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고 소세키가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하는 점은 원한이 반작동을 통해서 약해지고 소멸한다는 원한의 운동 원리이다. 니체는 고귀한 인간에게도 원한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설사 나타나더라도 고귀한 인간의 원한은 즉각적인 반작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약해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즉각적인 반작동 없이 행동과 행동 사이에 지연이 발생함으로써, 원한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내면화되면서 오히려 커진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2층에서 뛰어내리거나, 칼로 손가락을 베어 버리는 행동은 상대의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반작동 행위인 셈이다. 또 형이 어머니 돌아가신 것을 두고 자신을 책망하자, 가책 대신 형의 귀싸대기를 후려친다거나, 형과 장기를 두는데 빈정대는 형에게 말을 던져 피를 내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도련님에겐 형조차 반작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들이 여러 가능한 반작동의 유형들 중 하나이지, 반작동의 고정된 유형을 하나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반작동의 유형적 특성은 무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으로든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다시 말하면 고귀한 인간은 반작동의 대상과 결과에 대해서 어리석을 정도로 계산하지 않는다. 즉각적인 반작동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계산하지 말고 물리적 행동을 열광적이고 순간적으로 분출하라는 ‘간극 없음’이지,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라는 지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즉각적이지 못하는가? 니체에 따르면 그것은 도래하는 체험들을 상처에 따라 기억하기 때문이다. 원한의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모든 대상을 모욕으로 느낀다. 다시 말하면 모든 체험을 상처에 소금을 뿌렸을 때의 느낌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인간과 사물은 집요하게 그에게 접근하고, 체험들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일종의 원한이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그래서 원한의 인간은 외부의 자극을 내면에 프로그래밍된 ‘상처’를 따라서만 받아들이고 만다. 이것은 원한의 숨 막히는 반복이다.
아마도 그는 반격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고 계산하기 때문에 반응하기를 단념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격의 힘이 내면으로 향하여 상처를 내고 만다. 결국 이런 상처를 제거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보상하기 위해서 일종의 생존 본능으로 밖의 대상을 비난하는데, 그것은 정신적이고,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즉 무능한 것을 은폐하고, 자신의 퇴행적인 감정을 보상받기 위해서 상대방을 악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비난한다. 애당초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셈이다. 그런 것들은 허구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 것도 해결해 주지 않고, 마약과 같이 일시적인 방편일 뿐, 종국엔 상처만 더 덧낼 뿐이다.
그러나 도련님은 자신의 적이나 재난, 실수 같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량인데, 그것이 바로 ‘망각의 역량’이다. 첫 수업 시간에 학생이 질문한 기하문제를 풀지 못하고 “지금은 나도 모르겠다. 다음 시간에 가르쳐주지”라고 하자, 학생들의 비웃음만 산다. 하지만 도련님은 교실을 나오자마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이 뭐가 그리 우습단 말인가”라며 이내 자신의 실수를 잊는다. 경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다. 도무지 실수에 대한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찾을 수 없다.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그에겐 프로그래밍된 상처 자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매번 즉각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지워왔기 때문에 곪은 기억이 존재할 틈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니체는 이런 역량을 문지기의 관리 효용에 비유하면서, 의식의 소음들에 방해받지 않도록 “의식의 문과 창들을 일시적으로 닫는” 상태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매번 새로운 것을 하도록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의식의 백지 상태(tabula rasa)”(니체, 『도덕의 계보학』)이다.
따라서 도련님의 경박한 정신은 나태한 정신이 아니라, 오히려 ‘제동력’이고 ‘완화 장치’이고 ‘재생시키고 치료하는 조형적 힘’이다. 망각의 역량은 기억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더 이상 외부의 자극이 상처를 따라 들어오지 않도록 한다. 원한의 반복을 이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망각 없이는 행복도, 명랑함도, 자부심도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이런 자를 ‘의식의 소화불량 환자’에 비유했다. 이 환자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끊임없이 경박해질수록 자신에 대한 제동력이 커지고, 힘이 강해진다는 역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도련님의 경박함, 즉 반드시 과거를 잊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인 셈이다.
기억의 역량: 미래는 절대 잊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전제가 있다. 이 망각은 약속한 것들만큼은 잊지 않는 역량이라는 점이다. 고귀한 인간은 약속한 것은 잊지 않는다는 믿음 위에서만 마음껏 잊는다.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 이것은 결코 한 번 새겨진 인상을 다시 벗어날 수 없다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며, 단순히 한 번 저당 잡힌 말[言]을 마무리할 수 없다는 소화불량도 아니고, 오히려 다시 벗어나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 상태, 일단 의욕한 것을 계속하려는 의욕, 즉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인 것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이 기억은 앞서 보았던 ‘상처로 곪아 터진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일단 욕망한 것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최초의 욕망과 최초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다. 한 발자국 더 나가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욕망에 대해서 지배하는 기억이다. ‘~ 하고 싶다“, ”~하겠다’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멈추지 않는 것이다. 특히 자기가 자기와 한 약속을 기억하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량이다. 상처투성이 기억은 수동적이고 자의적이고 허구적인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욕망을 끊임없이 산출하는 역량으로서의 기억은 상처 없는, 본래적인 기억이다.
도련님에게 이 본래적인 기억은 바로 ‘기요에 대한 기억’이다. 사실 기요 자체는 과거의 여인으로서 퇴행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아련한 추억으로 작동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도련님을 뒤로 잡아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즉 어떤 점에서는 기요가 아주 의존적이고 허약한 인간으로 비춰질 요소를 다분히 품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도련님은 기요를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장난을 보다가 도련님이 기요를 기억해내는 장면을 보자.
그러다가 문득 기요가 생각났다. 기요야말로 우러러볼 만한 사람이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분도 미천한 노인이지만 인간성은 높이 살만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살핌을 받고도 딱히 고맙다는 생각 한번 안했는데 혼자서 이렇게 멀리 고향을 떠나와 보니 비로소 신세를 많이 졌다는 것을 알겠다. 기요는 날 보고 욕심 없이 올곧은 성품이라고 칭찬하곤 했는데 칭찬받는 나보다 칭찬하는 쪽이 더 훌륭한 인간이다. 기요가 보고 싶다.
─소세키, 『도련님』
이 이후에 기요는 순수하고 솔직한 것이 손가락질 받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다시 그것들을 상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현재의 부정적인 것을 돌파해서 미래의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기요라면 이런 때 결코 웃지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준다. 기요가 빨간 셔츠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다.”(소세키, 『도련님』)
또 한 번은 기요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하숙집 할머니가 아직도 보고 있냐는 질문에 도련님은 “아니오. 소중한 편지라서 바람에 날리면서 보고 날리면서 보고 하는 겁니다.” 라고 대답한다. 아마도 그것은 기요의 기억은 끊임없이 날려 보내더라도 다시 보고 또 볼 수 있다는 그 무한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 무한한 기억은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퇴행으로 작동하지 않고, 항상 현재의 곤경을 돌파해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올바름을 기억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것은 퇴행적인 대상조차 그 가치를 전환할 줄 아는 기억인 셈이다. 아마도 고전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해서 창조적으로 정립하는 역량이나, 구체제를 뒤집고 신체제를 만들어내는 혁명 등이 바로 이런 기억의 발로일 것이다.
이것을 ‘습관’의 관점에서 표현해 볼 수도 있다. ‘상처투성이 기억’을 그대로 쫓아가는 것은 그저 수동적인 습관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적인 기억은 ‘습관을 만드는 습관’(베르그송)에 관련된 기억이다. 즉 가치를 전환하고, 자신의 행동과 규범을 바꿀 수 있는 기억이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의 습관을 발명하고 재구조화시킬 수 있다는 기억인 것이다. 이 습관을 조정하는 능력으로서의 기억은 ‘~을 하겠다.’는 것으로서, ‘약속하는 능력’이고, 따라서 미래를 만드는 기억이며, 어쩌면 미래 자체에 대한 기억이 된다. 다시 말하면, 기억할 줄 안다는 말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기억할 줄 안다는 것이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장 뒤뷔페, <무제>
여기서 이제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고, 미래를 기억해야 한다는 놀라운 전회에 다다른다. 이것은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마음껏 잊는 것이다. 그래서 도련님은 배짱이 두둑하지는 않았으면서도 한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잘리면 금방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하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너구리건 빨간 셔츠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즉 현재를 계산하지 않는다. 하물며 학생들에게 잘 보일까 해서 그들을 치켜세우거나 하는 일 따위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든 내가 창안한 습관과 법칙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미래의 기억을 품은 자야말로, 두려움과 계산 없이 약속에 따라 즉각적인 행동(반작동)이 가능한 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반작동의 행위조차 발명되고, 또한 기억되어 어느 순간에도 즉각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결국 기억을 발명할 줄 아는 자, 바로 그가 망각할 줄 아는 자다.
자, 그렇다면 이런 기억은 어떻게 발명되는가?
인간이 스스로 기억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길 때, 피나 고문, 희생 없이 끝난 적은 없었다. (…) [희생, 신체훼손 등] 이 모든 것의 기원은 고통 속에 가장 강력한 기억의 보조 수단이 있음을 알아차린 저 본능에 있다. (…) 나는 이것이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이 계약 관계는 (…) 그 입장에서 보면 다시 매매, 교환, 통상, 왕래라는 근본 형식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 바로 이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가 냉혹함. 잔인함. 고통을 찾아내는 발굴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니체에게 기억의 관점에서 인간들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관계로 결정된다고 본다. 이 관계에서야 비로소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부채에 대한 강력한 책임 때문이다. 약속은 책임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런데 그것은 지켜지지 않을 때 냉혹하고 잔인한 고통을 줌으로써 기억하게 한다. 니체는 이를 수행하는 것은 자연이고, 수단은 문화라고 보았다. 즉 자연이 문화라는 수단을 가지고 인간의 기억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그런 관계(문화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그 관계 속에서 스스로 약속을 만들고, 만약 약속이 깨지면 잔인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기억은 만들어진다.
도련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철저했다. 한번은 숙직 당번이어서 숙직실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는데, 온천탕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밖으로 나가는 잘못을 저지른다. 학교 처음 온 날 숙직실이 비워 있던 것을 관행인 줄 알고 따라한 탓은 있지만, 분명히 공동체의 약속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 교무회의에서 거센 바람이 이를 두고 공격하자, 즉각적으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격받아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솔직하게 시인한다. 그러나 이런 시인이 반성이나 고백과는 완연히 다르다. 솔직하게 시인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두들 웃었지만, 도련님은 이렇게 말한다. “이놈들아, 니들이 나처럼 자신이 잘못한 일을 곧바로 잘못했다고 시인할 수 있어? 할 수 없으니까 괜히 웃는 거지.” 도련님은 자기 스스로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불편한 마음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하게 대가를 치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기억의 역량이라는 점에서 도련님의 힐난은 정당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란 놈은 장난을 쳤어도 거리낄 게 없다. 거짓말을 해서 벌을 피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난을 하지 말 일이다. 장난과 벌은 붙어다니는 것이다. 벌이 있으니까 장난 칠 마음도 생기는 거지. 장난은 실컷 쳐놓고 벌은 안 받으려고 피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인가. 돈은 빌리면서 갚아야 될 땐 오리발 내미는 비열한 놈들은 모두 이런 녀석들이 어릴 적 버릇 못 버리고 자라서 하는 짓거리다.
─소세키, 『도련님』
여기서 우리는 기억과 망각의 통일된 사이클을 만난다. 우리는 자연에 의해 움직여지는 관계(문화) 속에서 약속을 하고, 만일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잔인한 대가라도 치를 줄 아는 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대가를 치름(‘부채에 대한 책임’)으로써 끊임없이 미래의 기억을 만들어내고, 아울러 그 새로운 기억 위에서 매순간 과거를 미련 없이 떠나고, 미래를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된다. 결국 기억과 망각은 서로를 끊임없이 산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약속을 지키는 훈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 하겠다’는 것은 반드시 하고, ‘~하지 않겠다’는 것은 반드시 하지 않는 훈련을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 니체의 말대로 끝없는 훈련 끝에 ‘나는 원했다’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다시 말하면 욕망 자체가 변할 때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체가 그것을 기억할 때까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기억은 새로운 가치를 발명하는 미래의 기억이 된다. 이처럼 도련님의 기억은 약속의 기억, 미래의 기억이다. 도련님은 미래를 절대 잊지 않는다.
능동적 인간: 끝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부정적인 것들이 정의 주변을 검버섯처럼 감싸고 있다. 학생들이 몰래 숙직실에 메뚜기를 풀어놓는 장난을 해놓고도 발뺌을 하는 것, 골동품 가게를 하는 집주인이 매번 허락 없이 들어와서 차 마시고 골동품 얘기만 반복하는 짓들은 차라리 애교라고 치자. 그러나 수업 시간은 적고, 숙직은 안서고, 규칙조차 자기 멋대로 정하는 빨간 셔츠와 너구리는 애교를 넘어서서 도련님의 능동적인 힘을 무력화하는 독이 된다.
내가 안 간다고 하면 낚시 따위는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서 안 가는 줄도 모르고-도련님은 먹고 사는 데 문제없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은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분명 낚시가 서툴러서 피하는 줄로 착각할 거라는 생각에, 빨간 셔츠가 낚시 가자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한다. 언제나 이런 인간들의 말솜씨는 청산유수라서(“문학사니 뭐니 하는 것들은 역시 말발 하나는 끝내준다”), 말로 들러붙어 도련님의 능동적인 힘을 갉아먹으려 한다.
니체는 힘을 능동적인 힘(적극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반동적인 힘)으로 나눈다. 능동적인 힘은 주인의 힘이다. 반면 반동적인 힘은 능동적인 힘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노예의 힘이다. 그것들은 ‘나’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그것은 마치 질병과 같다. 만일 빨간셔츠나 너구리같은 부정적인 것들의 반동적인 행위가 커지면, 도련님의 능동적인 힘은 분리되어 고립될 수 있다. 이 구도 하에서 고립이 커지면 능동적인 힘은 자신의 가능성을 약화시키면서 반동적인 힘으로 변해버린다.
이때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망각 역량에 의해 이루어지는 원한 없는 ‘반작동 행위’는 외관상 ‘부정적인 행동(허무주의)’과 닮아 있다. 즉 과거의 상처를 잊고, 매번 도래하는 모든 사건들을 절대 긍정하고 감응하는 태도는, 무엇이든 결국 의미가 없으니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뭐든 될 대로 되라’라고 하는 허무주의적 태도와 외관상 같아 보인다. 노예들은 바로 이 기만을 이용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물리적인 반작동 행위-인용자]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가치를 설정하는 시선을 이렇게 전도시키는 것─ 이렇게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리는 대신 반드시 밖을 향하게 하는 것─은 실로 원한에 속한다.
─니체, 『도덕의 계보학』
어떤 정신은 망각 역량 없이 상처투성이인 기억에만 의존한다. 그 정신은 실제적인 반응, 즉 물리적 행위를 포기하고 내면에서 상상적으로만 복수한다. 이런 복수는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밖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적극적인 힘을 반동적인 힘으로 전도시킨다. 다시 말하면 사건들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적극적인 힘을 오염시킨다.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마치 깨달은 자의 정신인 양 기만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반동적인 힘이 능동적인 힘에게 승리하고, 마침내 반동적인 힘들이 ‘주인인 척하는 노예’로 올라선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주인을 알아보는 눈을 잃고, 진짜 귀족은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래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거짓말하면 안 된다. 솔직해야 한다’라고 가르치지 말고 차라리 ‘거짓말하는 법’이라든가 ‘사람을 의심하는 기술’ ‘사람 등치는 술책’을 가르치는 편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도련님의 조소가 현실적으로 크게 틀리지 않다. 이쯤 되면 반동이 강자가 되고, 능동이 약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무슨 일이건 깊이 고민해본 적 없는 도련님도, 이곳 시골에 온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다고 자주 생각하게 되고, 5, 6년 휙 지난 것 같은 느낌이어서 빨리 일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가고만 싶은 마음이 든다. 이제 도련님에게도 피로의 징후, 오염의 징후가 보인다.그러나 도련님은 부정적인 것들 앞에서 놀라운 현명함을 보여줬다.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는 것을 곧이듣고 용서하는 것은 물정 모르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인거다. 좋다, 거짓으로 사과하는 것이면 거짓으로 용서하면 된다. 정말로 끝까지 사죄를 받아내야 될 일이라면 말 대신에 두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흠씬 두들겨 패주어야 한다. (…) 이런 비열한 근성은 막부시대부터 이어내려오는 뿌리 깊은 것으로 아무리 말로 타이르고 가르쳐도 그런 흉내라도 내지 않고는 못 배긴다.
─소세키, 『도련님』
도련님은 이런 곳에서 있다가는 추잡한 꼴 못 보는 나도 꼭 저렇게 닮아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선생의 권위를 이용해 교묘한 복수를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토박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도저히 머리로는 당할 수가 없는 놈이다. 아무래도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도련님이 도달한 결론. 어차피 이 세상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이곳에서는 도련님조차 반동적인 힘으로 변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 퇴락해버린 ‘나’의 반동적인 힘은 어떻게 능동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메뚜기 사건 때문에 복도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대책이 안 선다고 질 수는 없다. 내가 솔직하기 때문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는 거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에선 정의가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오늘 밤 안으로 못 이기면 내일 이긴다. 내일도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긴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해서 승리할 때까지 이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결심했기 때문에 복도 한가운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날이 샐 때를 기다렸다.
─소세키, 『도련님』
니체는 반동적인 힘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더 나가서 반동적인 힘 그 자체에서 어떤 양면성을 보았다. “무력한 자들이 주입한 정신이 없다면 인간의 역사는 실로 우둔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니체, 『도덕의 계보학』) 어쩌면 이런 반동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감각을 가져야 하는 곳으로 강제된다. 유태교와 기독교가 있으니까, 그것들과의 싸움이 발생하고, 그 싸움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과 감각으로 무장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부정적인 것의 끝까지 쫓아가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극한의 경계에서 감각이 전환되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기억으로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위험하기까지 한 양면성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신이 다른 전략, 다른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둘러싸여 있는 부정적인 것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돌파할 때까지 나아가야만 가능한 장면이다. 즉 끝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전쟁에 돌입한 도련님은 본능적으로 “끝까지 가는 것”을 택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능동적인 힘이다. 부정적인 것들이 질병과 같은 것이라면, 차라리 병든 자가 되라는 말과도 같다. 그것은 병자인 의사이고, 의사인 병자다.
환자의 관점에서 서서 보다 건전한 개념들, 보다 건전한 가치들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와 반대로, 과도하게 충만된 삶이 소유하고 있는 충만과 자기 감정을 의식한 채 퇴락의 충동의 비밀스러운 노동 속에 시선을 던지는 것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이것은 결국 “끝까지 가볼 줄 아는 역량”이다. 놀랍게도 반동적인 힘조차 긍정하는 역설이다. 반동적인 힘 덕분에 벼랑 끝에 몰리고 새로운 전투의 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때서야 ‘나’는 깨닫는다. 이 벼랑 끝에서 ‘나’는 병든 자가 되고, 동시에 의사가 된다. 이 환자의 관점에서야 비로소 건전한 가치를 깨닫고, 거꾸로 충만된 삶속에서 퇴락을 깨닫는 경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능동적인 인간이란, 부정적인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이 세계에서, 그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경계 끝까지 가 볼 줄 아는 자이다. 오늘 밤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해서 승리할 때까지 이곳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소세키는 바로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도련님』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인간 유형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오늘 밤 안으로 못 이기면 내일 이긴다. 내일도 이기지 못하면 모레 이긴다. 모레도 이기지 못하면 하숙집에 도시락을 싸달라고 부탁해서 승리할 때까지 이곳에 있을 것이다." (『도련님』, 문예출판사, 60~61쪽)
아마도 도쿄로 돌아온 도련님은 다시는 순수했던 이전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며 돌아오던 그 학생과도 같아 보인다. 그들은 이제 선생님도, 기요도 없는 쓸쓸한 도쿄를 거닐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이제 어쩌면 순수함이 사라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들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피로를 물려받고, 다시는 싸우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오염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부터 병자의 감각을, 그러니까 아주 다른 감각과 감성으로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의사가 되었다고 말이다. 차라리 그들은 오염되어서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염 속에서 펼쳐지는 능동적인 드라마, 망각과 기억이 끝까지 밀고 가는 드라마가 예고되고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도련님은 표표히 떠난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본 무대에 올라섰다는 생각이다.
-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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