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가야만 해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가야만 해



오월의 바람을 타고

영어 낭독이 들려온다

뒷집 대학생 목소리

곧이어 일본어 번역이 뒤따른다

발표를 준비하는 듯

격식을 차린 목소리로

영어와 일본어를 교차로 구성했다


그 젊음에 

잠시 일손을 멈추고

들어보는데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불쑥 침묵이 흘렀다

왜 그래? 그 다음은


갑작스레 실연의 상처가 찾아든 것일까

혹은 깊은 사색의 늪으로

끌려들어간 걸까

바람이 불어와도

두 번 다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남은 것은 라일락 향기뿐 


원문은 모르지만 

그 뒤는 내가 이어볼게

그래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살아가야만 해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이 되어


_이바라기 노리코,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처음 가는 마을』, 봄날의책, 2019, 126~129쪽



실패(失敗) :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 ― 표준국어대사전


젊었을 때는 ‘실패’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한 번 ‘실패’하면 어쩐지 내 삶 자체가 되돌릴 수 없는 사태를 맞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어떤 ‘실패’든 겪고 나면 견딜 만해지고,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젊은 시절의 실패는 그래서, 어쩌면, 새로운 ‘국면’, 새로운 ‘삶’을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돌이켜보니 그런 면도 크다는 거다). 


중년의 한복판을 지나는 지금, 나는 ‘실패’라는 말을 잘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실패’라는 단어 자체도 이 시를 보면서 참 오랜만에 맞닥뜨린 느낌이다. 중년의 삶에는 ‘실패’가 없기 때문인가. 당연히 아니다. 중년에도 갖가지 크고 작은 실패들이 늘어선다. 다만, 그것 하나하나를 모두 ‘실패’로 부여안고 울고불고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든달까. 아마도, 내 생각에, 어떻게든 사람은 사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서 중년에는 여러 완화 장치를 개발해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럼에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남기는 실패를 삶에서 적어도 꼭 한 번은 만나게 마련이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전히 내 경험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나를 지지해 주는 친구 몇 명(단 한명이라도)과 함께 살아 있는 것들의 편으로 자꾸 가보려고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살아가면, 누구라도 또한 만나게 마련이다. 크든 작든 길든 짧든 눈부신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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