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자기배려의 책읽기』 인터뷰 1 -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일"

『자기배려의 책읽기』 지은이 인터뷰 1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일"






1. 이번 『자기배려의 책읽기』는 굉장히 많은 책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루고 있는 책들이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만만치 않은 책들인데요. 보통 직장인들은 소설 한 권 읽기도 쉽지 않다고들 하는데, 바쁜 은행에 근무하시면서도 철학책들을 꾸준히 읽으시는 동력은 무엇일까요? 시간 활용은 어떻게 하시는지, 특별한 요령이 있으신지도 듣고 싶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직장 생활은 직급이 낮으나 높으나 버겁습니다. 그러나 밥벌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삶은 언제나 밥벌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저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니까, 온종일 회사 일에 집중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항상 아침 일찍 출근 준비를 해서 6시 반 이전에 집을 나섭니다. 지금은 차를 몰고 회사에 가지만, 팀장 때까지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반가량 걸려 출근했습니다. 출근하면 7시 반이 넘어 있는데, 그때 시장 단말기를 통해서 간단하게 간밤의 시장 상황을 점검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침 8시 반이면 본부 직원들이 모인 '모닝 미팅'에 참석해서 딜러들과 함께 시장 리뷰를 하고, 오늘을 어떻게 대응할지 마음을 가다듬지요. 


그리고 9시에 한국 시장이 시작되면 정신없이 시장 움직임을 파악하고, 때때로 들어오는 리스크 요소를 판별해서 의사결정 해줘야 할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합니다. 그러느라 온종일 딜링룸을 돌아다닙니다. 또 내부 행정이나 기획 업무와 관련해서도 계속 의견을 주고받으며 때론 전화로, 때론 회의로 온종일 정신이 없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오후 시간도 다 갑니다. 오후 네 시가 되면 한국 시장도 마무리가 되고, 이어서 유럽 시장이 시작됩니다. 이즈음에 한 번 더 시장 체크를 하는데, 그때도 우리 부서 포지션에 영향이 없을지 리뷰하고 필요하다면 의사결정을 해줘야 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북(book)을 운용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직원들과 함께 진땀을 흘리며 상황수습에 온통 정신을 빼앗깁니다.


그러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나 다시 한 시간 반 걸려 성남 집으로 돌아가면 대개 저녁 아홉 시에서 열 시가 됩니다. 그러나 그즈음 뉴욕 시장이 시작되므로 핸드폰의 블룸버그 어플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미국 트레저리 채권이나 에스앤피(S&P)지수 움직임뿐 아니라, 스왑(Swap)과 원자재 가격들, 그리고 시장의 중요 뉴스들이나 코멘트·분석들은 사실상 이때 마구 쏟아지니까, 가능한 현지 기사나 메시지를 여러 개 찾아 읽어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가지요. 혹시 리스크에 노출된 오버나잇 포지션이 좀 있기라도 하면 밤잠을 설치기 일쑤입니다. 제가 술을 전혀 안 마셔서 그렇지, 술까지 많이 마셨으면 삶은 더 피폐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평일 아침 6시부터 최소 저녁 9시까지 제 시간은 촘촘하게 일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지요. 하긴 누군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 시간 동안엔 전혀 다른 짓을 하지 못합니다. 회사에서도 저는 굉장히 전투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그래야 한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수련을 받아 온 사람입니다. 그래야 마음도 편안하고요. 

그러므로 제 입장에서 여분의 시간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로마시대 스토아주의 정치가들은 ‘여가’(Otium)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냐, 그리고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공부(글쓰기나 책읽기)를 하고 있느냐로 사람들을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것 자체가 역량이었죠. 


꼭 그 관점이 아니더라도 제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저는 회사일을 제외하고는 필사적으로 글쓰기와 책읽기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합니다. 팀장 때까지는 출퇴근 시간만큼 중요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현재 제가 읽은 것들과 쓴 것들은 거의 모두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그리고 출근 전 짜투리 시간에 저의 모든 전투력을 쏟아서 나온 것들입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것들도 저에겐 제 모든 것을 걸고 획득한 것입니다. 글도 순간순간 스마트폰 메모앱을 이용해 조각조각 정리한 것을 모아다가, 주말이나 저녁에 조그만 틈을 내 단락문장과 에세이 형태로 바꾸어 냅니다. 어디 발표할 것도 아니면서, 이런 생활방식은 거의 10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장이 되고, 차를 몰게 되었는데도 집에 가면 반드시 한두 시간은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게 제 공부의 전부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객관적으로 훌륭한 방법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좋은 방법에 대한 환상’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가끔 ‘방법’에 대한 인식의 계보학을 추적해 볼만 하다고 여기고 있지요. 무슨 일에 닥치면, 왜 우리는 방법이 있는지 먼저 생각할까요? 방법을 찾다가 정작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우리는 무의식중에 무언가 하려면 그것에 대한 방법이 무조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보면, ‘방법’은 어디에도 없을지 모릅니다. 사실 살아 보면 우리는 방법을 모른 채 이미 할 일을 하고 있지요. 모든 것을 다 하고 나서, 그것들을 소급하여 그럴듯하게 재구성하여 말한 것을 ‘방법’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을 뿐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담론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나름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가는 철학자에 대해서는 주요한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글을 쓰다 보니 쓰기 위해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분해하고 사유하는 버릇도 어느 정도는 형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모두,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제가 하고 있는 이 방식이 옳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누가 하라고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철학이나 글쓰기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철학이 정말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내 식대로 읽어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쓰기를 통해 사용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큰 쾌락입니다. 쾌락이 있기 때문에 아주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서 이 책들을 읽고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철학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요.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을 왜 하겠습니까. 어떤 일이든 기쁨이 행동을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책 독서도 그런 쾌락 때문에 하게 됩니다. 아침부터 오늘 나의 쾌락을 이끌 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혹시 읽지는 못하더라도 그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 내고, 때때로 글을 쓸 요량으로 여백이나 메모앱에 메모를 하면서 글감들을 모으는 일, 그것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쾌락입니다. 그게 완성된 글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과정 자체가 쾌락입니다. 이 쾌락 때문에 읽고 씁니다. 간단합니다. 


아이들도 보면 게임을 하는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간을 확보해 내지요. 즉, 어떤 행위에 위험과 벌이 뒤따르더라도 쾌락이 있다면 그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시간을 확보하여 해내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 흐름 속으로 들어가면 시간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오로지 욕망을 따라서 어떠한 행위든 해내고 있는 것이죠. 저의 책읽기나 글쓰기도 그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고상한 목표가 있거나,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읽고 쓰는 게 아닙니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책을 읽고,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제게는 최고의 쾌락이기 때문에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읽어 내고 쓰고 있을 뿐인 겁니다. 정해진 아무런 방법도, 단계적 과정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일단 저는 술·담배를 하지 않으니까, 회식이 있든 없든, 퇴근하고 나면 정신이 멀쩡하기 때문에 단 1시간이라도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근하기 전에도 1시간 정도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지요. 회사에서는 책을 차분히 읽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지만, 틈틈이 스마트폰의 메모앱을 이용해서 때때로 머리에 잡히는 생각들을 몇 문장으로 정리해 둘 수는 있습니다. 이런 게 모두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이것을 중심으로 계획되어지고 실천되어집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버릇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을 좇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쾌락을 좇아 자동으로 구성된 버릇입니다. 이제는 그냥 그것이 생활이 된 것 같습니다. 이게 대단한 것도 아니므로,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2. 2014년에 『자기배려의 인문학』 이후 두번째 책입니다. 첫번째 책이 인문학과의 만남, 그리고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이번 『자기배려의 책읽기』는 주로 독서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첫번째 책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인터넷 서점 바로가기 ▶▶  교보문고  | 알라딘 | YES24(예스24) | 인터파크


일단 차이보다 그때와 같은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에피멜레이아 헤아우투’(Epimeleia Heautou), 그러니까 ‘자기배려’라는 말을 책 제목에 다시 내걸었다는 점에서 첫 책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이제 저에게 ‘자기배려’는 매우 중요한 용어이자 개념이 되었습니다. 물론 현대의 교육자들이 공자왈 맹자왈 하듯 이 개념이 지배했던 고대의 윤리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했다면 다시 공자가 주장한 ‘인’(仁)의 정신을 되살리자고 말하는 교육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개념은 푸코가 ‘주체변형의 구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개념이고, 푸코는 이 개념으로부터 자기가 자기와 관계를 맺는 구조라는 새로운 대상을 발굴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듯이 개별자인 주체 밖에만 관계와 장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안에도 수많은 관계와 장치가 존재하고, 그것은 자기와 자기의 관계라는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흔히 “내 자신과 대화한다”고 할 때, 그것은 정확히 이 사태를 알려 주는 일상화된 문구일 것입니다. 나는 내 자신과 대화하면서 내 자신을 구축합니다. 그것은 완벽히 자기와 자기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별자인 ‘나’ 안에도 수많은 관계와 수많은 사건이 발생 가능합니다. 아마 그 사건들과 함께 나라는 존재가 바뀌어 가는 것일 테지요. ‘자기배려’라는 개념은 이 주체 변형의 구조를 드러내 주는 중요한 개념이므로, 첫 책과 이번 책은 그 정신에 있어서는 다른 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사고를 하는 책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첫 책과 이번 책은 굉장히 차이가 생겼습니다. 첫 책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5~6년간 공부한 것 중 친구들 앞에서 발표한 글들을 중심으로 뽑아서 책으로 묶은 것이라면, 이번 책은 저 스스로 책을 읽고 홀로 그 책에 대해 서평으로 쓴 글들을 묶은 것입니다. 따라서 앞의 책이 나라는 주체 밖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쓴 글이라면, 이번 책은 철학책들을 중심으로 내 주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를 하면서, 나의 변화, 내 안의 사건들을 관찰하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특히 책읽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나의 사건들, 나의 변화들을 ‘후기’라는 형태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기라는 게 그저 정보의 취득이거나 마음의 평안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글 안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진리들이 읽기라는 과정을 거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그런 진리들이 내 안에서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임을 내가 나에게서 발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첫 책에서는 그리스·로마 철학이 ‘자기배려’를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정리한 에세이들이어서 철학 텍스트가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책은 그리스 로마 철학책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내 관점에서 쓴 서평글들을 모은 것이고, 동시에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에게 나타난 정신적인 사건들과 변화를 가감 없이 보여 주는 글들(후기)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저는 이제 저 자신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남들 생각에만 따르지 않는, 저만의 생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한 게 훌륭해서가 아니라, 저의 어떤 생각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조금 무모할지 모르지만, 첫 책과 달라졌다면 바로 이것이 달라졌습니다. 



3.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인문학 고전들이 어떻게 선생님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요즘에는 “삶을 바꾼다”는 말을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합니다. 단순히 책이 삶을 바꾼다는 말은 다소 허망한 구호인 것 같습니다. 그게 사실이면 골방에 갇혀 책만 읽으면 삶이  바뀐다는 말일 텐데, 저는 그런 경우를 본 적도, 또 그리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읽기와 삶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정신을 앞지르는 급진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의 정신뿐 아니라, 시간이 흐른 지금-여기의 정신도 언제나 앞서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고전다움을 지니고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끼칩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이 세상에 도래한 이래 언어는 문명을 일으키고, 지식을 전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하였으니까, 그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책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책은 삶을 바꾸기도 하고, 바꾸지 않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책읽기는 그것만으로는 삶을 바꾸지 않지만, 어쨌든 삶을 바꾸는 문제에 깊이 연루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제 경우도 철학책을 읽기 시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전에 저의 모습은 지금의 제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거의 매일 야근에다, 언제나 제가 자청한 술문화에 찌든 모습이었고, 생활면과 의식면, 모든 면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해서 도무지 구제불능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후회가 막급합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제 모습이니 지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제가 도덕적으로 변했다, 군자가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철학은 도덕이 아니니까요. 다만, 그때와는 다른 윤리와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책읽기가 책읽기를 넘어서 있을 때 책읽기가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즉, 책읽기가 책읽기를 넘어서서 삶의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책읽기가 삶을 바꾼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읽기가 책읽기로만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골방에서 책만 읽는 사람들처럼, 삶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읽기의 의미는 책읽기를 넘어서는 곳에 있습니다. 


11년 전에 몸이 잠시 좋지 않아서 철학을 찾아 공부하기 시작했고, 혼자 하는 것보다 관심이 같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연구실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이 책읽기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강조하는 곳이라서 철학 에세이를 의무적으로 썼는데, 철학이 주는 기쁨, 글쓰기가 주는 쾌감이 뒤섞이면서 직장 밖에서의 생활양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술·담배를 끊고 직장 밖에서는 글쓰기나 읽기에 전념하게 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족이나 직장 생활에서도 모든 것이 철학과 뒤섞이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저는 회사에서도 굉장히 전투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 격렬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아마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를 부드러운 사람으로 알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제가 철학을 공부한다느니, 글을 쓴다느니 하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할 거고, 안다고 해도 그분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제게도 책읽기나 글쓰기는 저 혼자만의 일이지요. 회사에서는 회사 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책읽기나 글쓰기가 이 현장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책을 읽다가도 회사일이 생각나고, 회사일을 하다가도 어제 저녁에 읽은 책 내용이 생각납니다. 또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다가도 철학책의 어떤 논리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보고서의 어떤 부분에 그 논리가 연결되기도 하고, 철학책의 어떤 단락이 너무 어려워서 돌파하기 어려워졌는데, 갑자기 회사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들이 생각나면서 아주 쉽게 이해되기도 합니다. 책읽기와 철학이 책읽기를 넘어서서 현장과 뒤섞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순간 현장의 모든 것이 철학의 대상이 됩니다. 거꾸로 철학의 난해한 개념들이 현장과 함께 이해됩니다. 철학이 현장을 바꾸고, 현장이 철학을 고양시킵니다. 그러고 보면 철학의 개념 세계도 현장입니다. 즉, 철학을 통해 획득한 개념의 현장과 직장이나 가족의 현장이 뒤섞이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언어와 직장의 언어가 뒤섞이면서 나만의 새로운 현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제 신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새로운 현장입니다. 아마 책읽기와 글쓰기가 새로운 생각, 새로운 생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면 바로 이런 새로운 정신의 현장과 함께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제게는 매우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아마 나중에 지금을 회고하게 되면 과거에 펼쳐졌던 이 정신의 현장을 기억해 내고 너무 기뻐할 것 같습니다. 내가 변해 가는 순간의 모습들일 테니까요. 


영화 《매트릭스》만큼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영화도 드물 것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가지 말하자면, 이 영화가 제게 직장을 대하는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준 영화였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묘합니다. 컴퓨터가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에서 빠져 나왔는데도, 앤더슨 일행은 끊임없이 다시 매트릭스로 다시 돌아와 싸워야 합니다. 이 내러티브는 불교의 보살론을 상기시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앤더슨은 깨달았으므로 속세(매트릭스)에서 벗어났지만, 해탈의 문을 열어 그 속세를 빠져나가지는 않습니다. 앤더슨 일행에게 매트릭스 안은 진정한 현실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활동하는 곳이므로 여전히 현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야만 매트릭스와 싸울 수 있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해방구는 여전히 매트릭스 안에서 찾아야만 했던 거지요. 이것은 제게 아무리 정신적으로 깨달음이 있더라도, 여전히 밥벌이의 세계로 돌아와 매우 구체적인 정황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철학은 고결하게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고결하면 철학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신이 고결하게 등반을 했음에도 다시 내려와 밥벌이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그 등반이 완성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밥을 먹고 산다는 매우 간단한 사실 앞에서 철학은 매 순간 시험받습니다. 저는 매우 급진적인 정신(=고전의 정신)을 지니고, 밥벌이라는 상식의 세계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일반적인 것과 뒤집혀 있는 것 같습니다. 상식적인 내가 남는 시간에 고전, 즉 급진적인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전, 즉 급진적인 철학을 가지고 상식적인 직장/가족/모임으로 매일 돌진합니다. 그 과정을 매번 거치면서 앞서 말했던 ‘새로운 정신의 현장’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그 순간 정신은 더욱 달구어집니다. 아마도 매번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매트릭스의 상식, 그러니까 현장(직장/가족/모임)의 상식도 바꿀 기회를 갖게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뒤돌아보았을 때, 삶이 바뀐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제게는 철학 없는 삶의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내일(1.22) 2편으로 이어집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