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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물러날 때를 아는 자가 진정한 승자

by 북드라망 2019. 1. 4.

물러날 때를 아는 자가 진정한 승자



나에게 아버지는 어린 시절 추종과 숭배의 대상, 사춘기 시절 가능하면 피해야n하는 사람, 돌아가시고 난 후 가끔 보고싶은 애증의 대상이다. 아마 아들도 이와 비슷하게 나를 생각할 것이다. 아직은 추종과 피하기의 중간 단계에 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나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길 것이다. 



우리 아빠는 엄청 많이 먹는다!


나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고관절염을 앓았었다. 하지만 적시에 치료하지 못해 왼쪽 다리가 오른쪽보다 약 7-8cm 정도 짧았다. 4급 정도의 장애 등급을 받았고, 걸을 때 한쪽 다리를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해에 살았을 때 기억이니 아마도 5-6살 무렵일 것이다. 어린 내 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멋있고 좋아보였나 보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면서 걷기 위해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너무나 뚜렷한 기억인데, 엉덩이를 맞아가며 아버지와 어머니께 무척이나 크게 혼났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의 멋있는 걷는 폼을 따라해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연습했는데, 욕을 듣고 파리채로 맞기까지 하다니! 왜? 아버지는 나의 롤모델이자 우상인데. 부모님이 화를 내셨던 이유를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고, 사춘기가 되어서는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아들이 6살 때 동네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던 중 하던 ‘아빠 자랑 배틀’을 듣다가 배꼽을 잡고 웃었던 일이 있다. 아이들이 미끄럼틀 밑에 모여 서로 자기네 아빠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최고라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아들의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아빠는 엄청 많이 먹는다! 그래서 엄청 키도 크고 뚱뚱해!" 그래 난 많이 먹고, 그래서 뚱뚱하다. 이걸 자랑이라고 동네 친구들에게 늘어놓다니.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어 칭찬을 많이 하고, 밥을 많이 먹어야 아빠처럼 키가 클 수 있다고 이야기 해 준 결과가 아빠의 비만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들도 나처럼 아버지를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동네가 떠나가라 자랑했겠지.

 

조금 더 크면 아빠가 그리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빠를 따라하고 흉내 내고 싶은 아들에게 난 어떠한 모습을 보여야 할까? 근엄하고 고귀한 삶의 태도를 가지며 열심히 돈벌어 가족의 생계를 넉넉하게 책임지면서도 자상하며 친구 같은 모습도 보이는 사회가 원하는 만능아빠가 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아빠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의 행동과 발언들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오리처럼


5월 늦봄에 태어난 아들은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자 펴 놓은 이불 위를 벗어나 꼬물대며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한 겨울을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을 때 웅얼거림 사이에 ‘아빠’, ‘엄마’를 말하며 걸음마를 시작했다. 갓난아기 시절 잠을 안 자고 보채던 아들이라 시간이 지나서 조금 크면 편해지겠다고 생각했었다. 오판이었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온갖 물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관심가는 물건에 접근하는 시간마저 빨라졌다. 잠깐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아들을 돌보기 위해선 갓난아기 시절과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첫 돌이 지나고 이제 걸음마도 안정되어가던 시기, 아들은 주변의 사물을 물고 뜯고 부수는 일을 넘어서서 일상의 내 행동을 조금씩 따라하기 시작했다. 


18개월 무렵부터 신문읽기, 목욕하기, 티비 보며 앉아 있기 등의 내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애썼다. 정말 신기했다, 아침에 신문을 양손에 펼쳐서 보고 있으면 글자도 모르는 무지랭이 녀석이 신문을 거꾸로 양손에 펼치고 읽는 척을 했다. 샤워기를 고정시켜 놓고 머리부터 감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아빠처럼 하겠다며 눈에 샴푸가 들어가도 울지않고 선 채로 샤워를 마쳤다, 자기 눈에 처음 들어온 두 명의 어른 중 하나인 아빠를 따라하는 모습에서 태어나자마자 본 대상을 따라다니며 살아가기 위한 여러 행동들을 습득하는 오리가 생각났다. 아들은 오리보다 늦었지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흉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생물학적 아빠다. 아들도 오리처럼 처음 본 대상에 대한 각인으로 나를 따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아들은 오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들의 아빠에 대한 각인은 생물학적 생존에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관찰하며 따라하는 아빠의 모습은 아들의 사회적 생존에 분명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아빠를 믿고 따르는 아들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여야 할까? 죽을 때 까지 계속될 질문이자 답이 없지만 아빠가 된 이상 해야만 하는 고민이다. 집에 들어와 아무일도 하기 싫어 다리를 꼰 채로 티비를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옆에 앉아 똑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아들을 보면 두렵기도 하다.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는 보고 있다. 삼십 년이 지난 후 아들이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아서 게으르게 티비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나의 착각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아들은 내가 그랬듯이 아빠가 세상의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들아 고맙다


내 직업인 학원 강사는 일반 직장인과 다르게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입하느냐에 정확하게 비례해 수입이 결정된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없던 나는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쉬는 날 없이 강의를 계속했다. 소위 '독박육아'를 아내에게 강요하며,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며 열심히 돈벌러 다녔다.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입시 시즌이 어느 정도 끝난 12월과 1월 두 달 정도였다, 지금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들과 재미있게 두 달 정도를 지낸 후인 2월 중순, 아침부터 같이 놀다가 저녁에 강사총회와 회식이 잡혀 나가려고 하자 평소에 떼쓰고 우는 일이 거의 없던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현관에 드러누웠다. 아빠랑 같이 놀고 싶다며 나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겨우 아들을 떼어놓고 나오던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나가면서 아들의 외침이 계속 생각났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아들이 나와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지금 6살부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친구들을 만나는 게 더 좋은 나이가 될 때까지 아빠를 원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바로 종합반 수업 이외에 단과로 진행되던 주말 수업을 없애고, 주5일 근무만 하기로 결심했다. 종합반 수업도 후배와 동료 강사에게 많은 부분을 넘겼다. 주말은 온전하게 가족과 함께하기로 결정했고, 함께 야구하고 레고조립하고 부루마불 주사위를 던지며 주말을 보냈다. 




강의를 덜 하기로 결정한 후 줄어드는 수입에 대해 걱정했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버는 돈은 1/3 정도 줄었지만 쪼들리지는 않았다. 세밀하게 가계부를 쓰지는 않지만, 수입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불필요한 사치를 줄이니 가계 수지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들과 소소한 재미를 찾는 일이 너무 좋았다. 독박육아를 하던 아내와의 관계도 좋아졌다. 심지어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도 에너지를 전달해 줄 수 있어 더 좋았다. 아들의 요구에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부응한 결과 내 자신이 오히려 좋은 기운을 얻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아가 40대가 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나를 갉아먹는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로 일했던 나에서 벗어나, 세 가족의 독립적인 관계를 정립하고 서로의 삶을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계기가 아들의 요구로 부터 가능해졌다. 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아들이 나를 원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직까지도 수업 한 시간을 하면 얼마의 돈을 벌고, 단과 수강생 몇 명이 수강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인지 계산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으로 소비를 하며 나에게 주는 보상 내지 선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정신승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들의 가지 말라는 외침으로 부터 시작된 내 삶의 고민은 스스로 주 40시간 이상은 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물러나야 할 시기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서 방과 후 공동육아에 다니고 있다, 공동육아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매주 세 번씩 학교가 끝난 후 모여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고, 도서관에 가고, 그림 그리는 정도의 활동을 한다. 부모들은 당번을 정해 같은 학교 아이들을 모아 터전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담당하고, 1년에 5-6번 정도 아이들의 간식을 마련한다. 외아들이라 형 동생들과 함께 어울리는 경험을 해 보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 참여하게 되었고, 다행히 잘 적응해 친구 형 동생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다. 나도 방과후모임을 계기로 동네 친구들이 생겼다. 같은 초등학교들 다니며 함께 당번을 정해 등하원을 시키는 세 가족을 만나 즐겁게 놀고 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 네 가족이 모이면 어른 8명에 6살부터 시작해 초등학교5학년까지 아이들 8명 총 16명이 된다. 재미있게도 네 가족 모두 부모들의 생활 패턴이나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하지만 매 주말 모여서 함께 식사하고 밤 늦게까지 맥주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들끼리 많이 친해졌고, 부모들도 많이 친해졌다. 아빠들끼리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 자전거 라이딩을 다니기도 한다. 2학년인 지금 아들은 3,4,5학년인 세 명의 형들과 노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뜨거운 8월 한여름에도 아빠와 야구하러 나가자고 난리였는데, 이제는 평일 주말을 불문하고 형들부터 먼저 찾는다. 


나를 원하던 아들이 내 품을 떠나가려는 모습이 당연하고 너무 좋아보이지만 내가 예상했던 시기보다 너무 빠른 것 같아 약간 섭섭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빠 엄마와 노는 것보다는 또래와 노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2-3년 차이 나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놀려면 힘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재미를 느끼고 있다면 힘든 일도 견디고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이제는 아들의 일상과 놀이에서 살짝은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미 형성된 친구들과의 관계에 내가 개입한다면 그들의 놀이는 정말 재미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조용하게 지켜보면서, 때로는 모른 척하기도 하고, 선을 넘었을때는 단호하게 혼내기도 하면서 점점 아들의 일상에서 관심을 줄여나가 보려 한다. 



우리 좀 평범하게 지내요


지금 우리 세 가족은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캄보디아에 와 있다. 올해 초부터 10주년을 기념해 무얼할까 고민하다가 앙코르와트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10주년 기념이라는 핑계로 2주일이 넘는 장기 여정을 계획했다. 이전에도 세 식구가 장기로 여행을 많이 다녔었다. 12월과 1월에 바쁜 일이 없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 열흘 이상의 여행이 가능했다. 아내와 나 모두 럭셔리한 여행보다는 좀 저렴한 숙소를 잡고, 현지인들이 주로 다니는 식당이나 길거리 노점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험한 여행에 데려다니기 시작했고, 다행히 별 불만없이 따라다녀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결정하고 나서 아들에게 캄보디아와 베트남에 갈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빠, 저희 좀 평범하게 살면 안되요?"라고 일갈하는 아들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학교에도 빠지기 싫고, 집에서 편하게 밥먹고 싶고, 친구들과 학교 끝난 후에 그냥 놀고 싶다고 한다. 엄마 아빠랑 같이 여행 가는 게 싫으냐는 질문에는 머뭇거리더니 싫은 건 아니지만 힘들게 돌아다니기보다는 편안하게 집에 있는게 더 좋다고 한다. 그래 너무 힘들게 끌고 다녔나 보다. 한편으로는 세계 전국 곳곳을 같이 여행가는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권에 도장찍힌다고 좋아하던 녀석이었는데 여행이 힘들고 싫다니. 아주 어렸을 때는 잘 따라다니더니 이제 좀 머리가 굵어졌다고 자기 의견이 생겼다. 먹을것, 숙소, 장거리 버스 타고 이동하기등 힘든 게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 다음부턴 안 데리고 다닐게. 아들도 좋아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바로 오늘도 '지금 여행오지 않았다면 동네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을 텐데"라며 한숨을 쉰다. 최근 들어 자신만의 세계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올바름에 관한 문제가 아닌 취향과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나의 의견을 내세우지 말아야 겠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여행은 이제 혼자 다녀야지. 나도 너랑 다니는게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아 같이 여행한 거 아니야!



언젠가의 강한 반란을 기대한다




내 품을 벗어나려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질없는 상상과 고민을 해 본다 점점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아들이 아빠의 삶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일이 생기면 슬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부정해야 아들도 진정한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있다. 당연히 벌어질 것이고 벌어져야만 하는 아들의 반란과 독립을 슬픈 기분으로 상상하고 있다니. 아직 난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난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독립된 개체로 살지 못했다. '착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한 가정을 이룬 독립적인 존재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남편과 아빠가 아닌 '아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례를 다 치르고 난 후 집에 와서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어머니가 집을 사야겠다고 많은 돈을 보태달라고 했을 때도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어머니와 아내 둘 모두의 눈치를 보며 흐지부지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아들'이라는 지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내 아들은 나보다 좀 더 빨랐으면 좋겠다. 어서 나를 밟고 떠나라. 난 쉽게 물러날 수 있다. 너가 독립적인 개체로 세상을 사는 것이 너와 나 엄마 모두가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 세 식구 모두 삶의 승자가 되자.


글_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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