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긍정하라 : 소수자의 철학(1)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런 모습을 잃지 않는다. 발가락이 붙어있어도 네 발가락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생각지 않으며 짧다고 부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변무, 246쪽)
스스로 자연스럽게 보지 않고 남에게 얽매여 보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로잡혀 만족하는 자는 남의 만족으로 흡족해하고 스스로의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한 자이며 또 남의 즐거움으로 즐거워하고 스스로의 참된 즐거움이 없는 자이다. (변무, 253쪽))
1. 주변 지대의 존재들을 호명하다
장자는 세상의 '인위'적 기준 때문에 변방 혹은 주변(margin)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호명한다. 세상은 권력과 권한, 지식과 부의 핵심을 장악한 소수의 세력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존재로 구분된다. 장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소수 세력에 의해 주변화되고, 쓸모없으며, 비정상으로 취급되었던 존재들을 복권하기 위한 호명 작업을 끈기 있게 보여준다. 이런 존재에 대한 언급은 선진시대 다른 문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이들은 『장자』 외편․잡편의 저자들조차 관심 갖기를 꺼렸던 존재들이다. (김경희, 『장자』의 변과 화의 철학) 그런 의미에서 『장자』 내편의 <인간세>와 <덕충부>는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에 대한 헌사다.
위왕이 혜시에게 하사한 5석(石)들이 큰 박(소요유), 울퉁불퉁하고 비비 꼬인 가죽나무(소요유), 제나라 곡원의 사당목인 상수리나무(인간세), 상구의 특이한 거목(인간세), 외발이 된 우사(右師)(양생주), 심한 불구자인 지리소(支離疏)(인간세), 외발인 왕태(王駘), 외발인 신도가(申徒嘉), 외발이 된 백혼무인(伯昏無人)(덕충부), 외발이 된 숙산무지(叔山無趾)(덕충부), 위나라의 추남 애태타(哀駘它)(덕충부), 절름발이에 꼽추에 언청이인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 커다란 혹이 달린 옹앙대영(甕㼜大癭)(덕충부). 이들은 세상의 유용성이라는 척도로 보자면 쓸모가 없고, 정상이라는 기준에 기대면 비정상으로 구분된다. 장자는 우리의 통념에 의하자면 무용한 존재들이자 비정상인들을 불러내어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일까?
2. 진정한 소수자들 : 쓸모없음의 쓸모!
외부적 가치에 자신의 목숨을 헛되이 쓰지 말라가 장자의 모토다. 그러니까 사회적 가치나 욕망이나 충동에 의한 죽음은 개죽음이라는 말씀! 그렇다면 생명을 기른다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모든 만물이 자연의 결대로 살아가는 것, 그런 조건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 세상에 살면서 느닷없이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양생하는 길인가? 세상은 구질구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걸 인정. 수긍.
지리소라는 사나이는 턱이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으며,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고 내장이 위로 올라갔으며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다. 옷을 깁거나 빨래를 하면 충분히 먹고 살아갈 수 있고, 키질을 해서 쌀을 고르면 열 식구는 먹여 살릴 수 있다. 위에서 군인을 징집하면 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팔을 걷어붙인 채 다닐 수 있고, 위에서 큰 역사가 있을 때 지리는 언제나 병이 있다고 하여 일이 내려지지 않는다. 위에서 병자에게 곡식을 내릴 때는 3종의 곡식과 열 다발의 장작을 받는다. 저 육체가 온전하지 못한 자도 그 몸을 보양하여 천명을 다할 수가 있는데, 하물며 그 마음의 덕이 온전하지 못한 자야 더할 것이 아닌가?" (「인간세(人間世)」)
턱이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가 하늘을 향하고, 내장이 위로 올라가고,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는 지리소라는 곱추를 보자. 지리소는 곱추기 때문에 남들처럼 전공(戰功)을 세우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세우는 위인이 되지 못하고, 아니면 큰 사업을 해서 큰 부자가 되지 못한다. 사회적 시선으로 보자면 매우 열악하지만, 장자는 지리소를 열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느질하고 빨래하면 혼자 먹을 것은 충분히 벌며,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 사람들 사이를 당당히 다녀도 징집되지 않고, 나라에 큰 역사가 있어도 언제나 면제받는 행운을 누린다. 게다가 병자들에게 곡식을 배급하면 3종의 곡식과 장작 열 단을 받는다.
장자는 지리소가 외형 때문에 오히려 천명을 다할 수 있지 않았냐고 묻는다. 다른 외형으로 인해 세상의 덫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장자는 모든 차별화된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두 발이 달리고, 등을 펼 수 있는 사람들은 군대에 끌려가 제 식구뿐만 아니라 제 한 몸도 추스르기 힘들다. 그러나 지리소는 군대에 징집되거나 부역을 지거나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건사하고, 열 식구를 먹여 살린다. 지리소는 국가적 쓸모로 볼 때는 쓸모가 없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의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쓸모 있다. 지리소는 국가의 의무(쓸모)로부터 자유로운 덕분에 천수를 다할 수 있었다. 이런 시각으로 따지면 지리소의 쓸모없음은 오히려 대단한 쓸모다. 이것을 결핍, 비정상, 불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모자란 존재는 없다. 결핍된 채 태어난 존재는 없다. 불완전하다면 모든 존재는 불완전하다. 결핍된 존재로 상상하게 하는 것은 정상인이라는 이미지다. 정상이 원래부터 존재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이미지. (고병권, 추방과 탈주) 각자 불완전한 채로 불완전한 만큼 살아내면 된다. 누구보다 결핍되었다는 비교 자체가 착각이다. 만물은 비교 불가능하다. 이상하다면 각각 다 이상하고, 온전하다면 모두 온전하다.
노나라에 발 하나가 잘린 왕태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를 따라 배우는 자가 중니의 제자와 맞먹을 정도였다. 상계가 중니에게 물었다. "왕태는 외발이입니다. 그를 따라 배우는 자가 선생님의 제자와 노나라를 반씩 갈라 가질 정도입니다. 서 있어도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어도 의논하는 일이 없는데, 빈 마음으로 갔던 자가 가득 얻고 돌아옵니다. 본래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이라는 게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 완성된 마음을 지닌 자가 아닐까요?" 중니가 대답했다. "그분은 성인이야. … 나는 노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온 천하 사람을 이끌고 그를 따르려 한다."
왕태는 외발의 외형을 지녔는데도 공자만큼 제자들이 따른다. 왕태는 서 있어도 가르치지 않고, 앉아서도 토론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비운 채 가서 가득 싣고 돌아온다. 외형이 결핍된 자가, 남들의 빈 곳을 채워주다니, 공자의 제자 상계에게 왕태는 정말 이상한 존재로 보인다. 그래서 상계는 공자에게 ‘말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이 정말 있는지 물어본다. 공자는 이런 왕태를 진정 성인이요, 진정 스승이라 일컫는다. 덕을 채우는데 외형 따위는 문제 되지 않는다.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절름발이, 꼽추, 언청이)이 위나라 영공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영공은 기뻐했다.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 목이 오히려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 옹앙대영(甕㼜大癭:커다란 혹이 달린 사람)이 제나라 환공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환공은 기뻐했다. 온전한 사람을 보면 그 목이 오히려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외형 따위는 잊게 되고 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고 있다. 이런 일을 참으로 잊고 있음[誠忘]이라 한다. (덕충부)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은 외형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이들의 덕은 뛰어나서 제후들의 맘을 흡족하게 하는 ‘정견’을 말한다. 위나라 영공과 제나라 환공은 이들의 외형에 매이지 않는다.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이 훌륭한 덕을 펼쳐 보이자 이들의 외형에 익숙해지고 매료되어 다른 사람들의 목이 오히려 야위고 가냘프게 보인다. 이들이 기준이 되자 정상이라고 취급되는 다른 사람들의 외형이 외려 이상하게 보인 것이다. 왕들은 이들을 척도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소수성을 척도로 다수의 척도를 깨뜨리는 역전. 장자의 통쾌함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는다. 통념에 사로잡혀 공통의 이미지만 기억한다. 그러나 존재를 제대로 보려면 성망[誠忘]해야 한다. 잊어야 할 것은 가냘픈 목이 정상이라는 다수의 이미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혹이 달린 목이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위나라에 애태타(哀駘它)라는 추남이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사내들은 그를 추종하여 떠나지 못하고, 그를 본 여자들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그의 첩이 되겠다고 부모에게 간청한다. 애태타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고, 남의 죽음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쌓아둔 재산이 있어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 것도 아니다. 오직 가진 건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흉한 몰골뿐이다. 노나라 애공은 이런 애태타가 궁금해서 만나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끌리고 1년도 안 돼서 그를 믿게 되고, 대신의 자리까지 맡기려 하였다.
생각해보라. 사실 따져보면 이상하지 않은 존재가 있는가? 존재는 태과(太過) 아니면 불급(不及)이라지 않는가? 외형이 이상할 수도 있고, 내심이 이상할 수도 있고. 우리는 어딘가는 이상하다면 이상한 채로 살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경우도 있고, 살면서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폭풍과 같은 삶은 언제든 우리를 바꾸어 놓지 않는가? 장자는 그런 우리들의 상태를 ‘외형이 다른 존재들’로 대변하여 보여준다. 남들은 비정상이라는 기준으로 그들을 폄하하지만 이런 존재들은 모두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 <덕충부>에서는 통념으로 보자면 쓸모없게 취급되었던 존재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하지만 위대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 완전하며, 모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역설하고 있다.
장자는 유용과 무용,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척도를 벗어나 이들의 특이성에 그리고 이들의 운명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장자의 입장에 서면 이들은 주변적 존재 혹은 비주류가 아니라 소수자다. 소수자는 수적인 소수 혹은 권력분배에서 밀려난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공통성(common sens)과 양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수다. 주변화가 척도에 의한 부차화를 가리킨다면 소수화는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리킨다. 주변인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는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소수자는 다수자의 척도에 의해 차별받고 착취되는 지대로부터 점차 그 척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대로 이행한다. (고병권, 『추방과 탈주』 참조, 그린비) 장자는 우리 안의 소수성을 일깨우고, 이 세계 안의 소수자들에게 주목한다. 다수자 혹은 주류가 아니라 소수자로 세계와 맞서기를 제안한다.
글_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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