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몸을 찾아서
: 평범한 세대의 ‘보디-가드’ 프로젝트
운명은 내 입에 ‘금수저’는 아니어도 ‘글수저’를 물려준 것 같다. 어릴 적부터 20대 초반까지 나는 훌륭한 사람들 속에 파묻히다시피 자랐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기만의 소신, 대의, 운동, 철학, 공동체를 떳떳하게 실현하는 어른들이었다. 하지만 금수저 출신이 무조건 행복한 게 아닌 것처럼 나도 이 환경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내 안에 내 것이 아닌 말이 너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말에 먹히기 전에 도망쳤다. 조기교육 실패! (결국 어떤 수저를 물려받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수저가 운명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ㅠㅠ.)
나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도대체 어떤 근거, 어떤 경험을 가졌기에 저렇게 뚝심 있게 하나의 믿음을 밀고 갈 수 있을까? 뼛속까지 제도를 믿는 사람들마저도 어느 정도는 부러웠다. 인터넷 정보와 도덕적 교육에 충분히 노출되어 왔지만, 내 고민은 그 어떤 정보도 내가 사는 실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선쌤에 의하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인성과다’ 팔자이기 때문이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정말 필요했던 건 말이 아니라 몸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하는가? 이런 실존적 질문은 정신의 영역이라고들 하지만, 그 대답을 찾는 것은 몸의 몫이다. 몸만이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세상에 옳고 그름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몸의 능동성이 순간순간의 선택을 진실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확신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지표라고 봐야 한다. 아무 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몸, 똑같은 반응만 반복하는 몸, 남의 반응에 의지하는 몸을 상상해보자. 사지가 멀쩡하더라도 그 ‘실존(實存)의 정도’는 매우 약할 수밖에 없다. 나와 세계의 관계를 ‘실감하는’ 몸의 능력이 저하될 때 사람은 자기 철학만 잃는 게 아니다. 자기 몸의 존재감도 잃는다. 몸은 있으되 몸을 잃어버린 꼴이다. 이 몸(철학)의 실종은 오늘날 점점 흔한 병이 되어가고 있다. 유동적인 세계는 공통의 문제의식은 해체시키면서 만인의 몸은 분열시킨다. 말초적 자극에 익숙해진 청년의 몸,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의 몸,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경직되는 노년의 몸을 보라. 면역력이 떨어져서 나와 다른 신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해야 직성이 풀리는 꼰대의 몸도.
몸과 말이 따로 노는 사람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이게 몸의 능력일 뿐이다.
뉴욕 동의보감 세미나 시즌2에서 우리는 <동의보감>을 통해 ‘잃어버린 몸’을 복원시키는 막강 무기를 배웠다. 바로 양생이다. 양생은 <동의보감>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러나 양생을 자본주의의 힐링 마케팅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힐링 마케팅은 철저하게 건강 상품을 파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런 얄팍한 상술보다 더 괘씸한 점은 정상적인 몸을 ‘고통이 제거된 상태’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고통을 통찰할 수도 없고 또 느껴서도 안 되는 유리구슬처럼 다루는 것이다. 이러면 세상과 몸 사이의 단절은 심화된다. 잃어버린 몸이 돌아오기는커녕,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력도 사라질 판이다.
양생의 일차적인 목표도 물론 치료다. 하지만 양생은 병을 치료하는 것과 병을 지양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기르는 것을 똑같이 요구한다. 게다가 병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병은 실체 없이 매번 발생하는 불통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양생의 목표는 몸의 소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몸 내부 장기들끼리의 소통이나 몸과 환경 사이의 소통이 활발해지면 병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본다. 하지만 이때 소통은 꼭 고통의 사라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감정과 감각을 견뎌내고, 통찰하고, 흘려보내면서 ‘실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동양 의철학의 뿌리 깊은 테제가 깔려있다. 몸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세계라는 것. 몸과 세계는 어떤 매개체도 없이 곧바로 연결된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있는 이 자연의 동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양생의 출발점이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전자책)
활용법 1번. 정, 기, 신을 길러라. 정, 기, 신은 몸을 구성하는 3요소다. 기는 에너지, 정은 유형의 물질, 신은 무형의 벡터다. 조금 더 쉽게 풀면 에너지, 몸체, 마음이다. 이때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기른다’는 말의 의미다. 이것은 게임에서 캐릭터 HP(Health Point) 올리듯이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정, 기, 신의 베이스가 다르고, 또 특정 시대가 정, 기, 신을 소모시키는 법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고난 개성은 자연스럽게 펼치되, 어떤 변수가 닥쳐도 잘 통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정, 기, 신의 역량을 판단한다. (자신의 정, 기, 신 베이스는 사주팔자를 공부하면 알 수 있다. 궁금하신 분은 뉴저지에 사는 정선쌤의 사주스쿨을 들을 것!)
양생법의 1번 명제. 정,기,신을 기르자!
기는 몸 밖의 자연과 통한다. 기가 우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따라서 기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의 리듬에 맞게 사는 것이다. 해가 뜰 때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것, 공기가 맑은 곳에서 호흡을 깊게 하는 것, 아스팔트 대신 흙을 밟고 다니는 것, 모두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잠과 관련된 충고는 <동의보감>에 자주 나온다. 눈에 기운이 사라지고 침침해지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자. (...) 비록 농담 같아 보이지만, 기묘한 방법이다.” (<낭송 동의보감 외형편>, 53~4)
정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생명활동과 통한다. 따라서 정을 보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 밥에 정이 모여 있다고 하니, 불량식품이 아니라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게 포인트다. 또, 섹스를 너무 많이 해도 정이 소모된다. 섹스 자체가 새 생명(물질)을 낳는 활동이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애는 못 낳게 하고 성욕은 미친 듯이 부추기는 괴상한 시대에서는 특히 정이 참으로 쓸데없이 소모될 가능성이 높다. 조심해야 한다.
가장 까다로운 것이 신이다. 신은 마음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와 통한다. 인간사가 원체 다이나믹한데다가, 각자의 사주팔자가 가장 ‘더럽게’ 드러나는 영역도 신인지라 신을 통하게 하려면 고도의 내공이 필요하다. 신은 심장에 머무르기 때문에 신이 어지러워지면 심장과 나머지 장기가 치명타를 입는다. 가장 대표적인 병증은 감정 조절에 실패하는 것이다.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화를 내거나, 깊이 생각하거나 걱정하면 하루나 한두 시간 사이에도 [심장에서] 직경이 한 치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불길이 타오른다.”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64쪽) 그래서 <동의보감>은 “신을 보양하는 것이 가장 좋고, 형체를 보양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고 하며 “신이 없으면 형체가 무너지므로 신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낭송 동의보감 내경편>, 64쪽)고 신신당부한다.
활용법 2번. 오장육부를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라. 정, 기, 신 자체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이런 정, 기, 신이 오행별로 실체화된 것이 바로 오장육부다.
장부는 구체적인 장기이면서 동시에 기운의 분포도다. 예컨대, 간은 간이면서 간의 기운이 작용하는 영역과 흐름을 동시에 의미한다. (...) <동의보감>에서 장기의 건강성 여부는 그 장부의 기운이 미치는 전체 영역의 유동성과 연관되어 있다. 즉, 리듬과 강밀도가 관건인 것. (...) 그리고 리듬과 강밀도의 분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순환과 접속이다. 그리고 자기가 담당하는 구역에 제대로 된 에너지를 순환시키고 있는가 하는.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전자책 버전)
오장육부는 단순히 장기가 아니다. 정, 기, 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한 눈에 보여주는 탐색 스크린이다. 음양오행이란 여러 종류의 에너지(강밀도)를 상생상극이라는 관계(리듬) 속에서 공존시키는 원리다. 음양오행 운동이 오장육부에서 벌어진 결과로 병증도 생기고, 건강도 유지된다. 다시 말하면 몸 상태가 어떻게 되든 간에 그 원인과 결과는 모두 동일한 현장(오장육부)에 있다는 뜻이다. 간의 기운이 너무 성하면 목극토의 원리를 따라서 토기운의 체현인 위장/비장이 쓰러지고, 화기운의 심장이 너무 성하면 수기운의 신장이 졸아들어 허리가 아프게 된다. 하나의 장부가 무너지면 다른 장부도 무너지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음양오행의 원리는 일상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기에, 오장육부는 내가 생활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반영한다.
활용법 3번. 양생은 몸체를 넘어서 정신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어떤 철학을 공부하고 사유를 전개하든 간에 몸이라는 차원을 기본 바탕에 놓아야 한다. <동의보감, 삶과 우주의 비전을 찾아서>는 양생을 불교, 도교, 유교와 병치시켰다. 도교의 수련으로 정을 쌓고, 불교의 수행으로 생사를 통찰하면서 신을 다스리며, 유교의 수양으로 사회관계를 원활하게 해서 기를 소통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몸과 정신이 딱 맞물릴 때에야 존재에 진실성이 생긴다. 내 몸이 태어날 때 우주에서 잠시 빌려온 ‘본성(nature)’을 제대로 이해한 후, 이 본성을 활용해서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함께 살고, 어떻게 사유해야만 덜 병들 수 있는지 결론내리는 것이다. 그때야 사람은 자기 인생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병을 고친다는 건 존재의 원초적 간극을 넘어서는 것이면서 사회적으로, 나아가 영적으로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 굳이 말하자면 ‘사이’에 더 가깝다. ‘사이’란 정해진 척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배치에 따라 매순간 달라지는 존재의 무게중심 같은 것이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전자책 버전)
타인은 내 몸이 어떤 '사이'에 있는지 알려주는 '움직이는 좌표'다.
그런데 이 길에는 역설이 있다. 나의 본래면목을 찾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지만, 이 길은 혼자서 갈 수가 없다. 내 몸이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이 자신의 몸을 실감하는 것은 다른 몸, 다른 존재, 다른 사람을 통해서다.
지난 삼 년간 내 몸의 ‘실존력’은 본의 아니게 급격히 끌어올려졌다. 내 몸이 '확신'을 갖게 된 좌표는 뉴욕이라는 공간과 세월호라는 시간이다. 일단 뉴욕은 내게 세상에 대한 감각을 격하게 일깨웠다. 온갖 인간들이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도시의 에너지는 내가 인터넷을 통해서만 알았던 세상에 ‘신체’를 입혔다. 중동, 남미, 아프리카 뉴스를 읽으면서 이제 나는 내가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몸을 먼저 떠올린다. 시리아의 마을에 미군이 오폭을 할 때 내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학교에서 만난 시리아 친구, 그리고 그와 닮은 사람들의 망가진 몸이다. 그리고 세월호. 세월호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죄책감도 화병도 아니다. 차가운 복수심이다. 이 사건에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든, 아니면 어떤 멍청한 관료가 실수를 했든 간에, 나는 이게 국가 시스템과 과학 문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몸의 처지라는 것을 본다. 가장 소름끼쳤던 것은 네 살 어린 동세대 친구들이 죽을 때 느끼던 고통이 아니었다. 침몰의 순간을 밖에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 후에 사건을 ‘보상금 문제’로 도배해버렸던 나를 포함한 산사람들의 무능력과 무감각이었다. 뉴욕과 세월호는 물자와 기술은 넘쳐나지만 가장 중요한 몸을 천대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몸을 천대하는 주체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생각만 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으니, 나는 한동안 이 현장에서 글을 쓸 것이다. 그래야 복수도 하고 내 몸도 살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은 수용소, 우리는 호모-사케르’라고 사형선고를 내렸던 조르주 아감벤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자의식을 믿지는 않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몸의 힘은 믿는다. 600만 년 째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롭게 살아남고 있다. 뉴욕처럼 살벌한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즐겁게 살 방법을 탐색하고, 핵폭탄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 미친 시대에 인류는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구원을 찾는다. 71세에 유투브 스타가 된 박막례 할머니가 평생 고된 식당일을 했지만 행복한 일상을 사시는 것처럼. 바로 이런 생기를 증진시키고 싶다. 언제나 진실에 고개를 돌리지 않되, 어디서든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확신’을 기르고 싶다. 이게 보디-가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동의보감>의 양생을 기본으로 하면서 각 사람의 사정에 따라서 조금씩 바뀔 것이다. 가령, 나는 글을 쓰면서 산다. 그렇다면 글을 쓰기 위해 자연의 기운을 받고, 글쓰기가 내 몸을 해치지 않도록 생활을 조절하며, 나와 사회가 통하는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선'을 택할 의무가 있다고 쉽게도 말씀하셨던 작가 사르트르. 하지만 중요한 건 '선'을 확신할 수 있는 몸이란 말이야!
고등학교 때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르트르의 글에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했었다. 그는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강렬하게 실감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몸을 이 세계에 내던지겠다고(pro-ject) 할 때, 이 세상의 어느 ‘사이’로 던져야 할 지 그는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아마 사르트르는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이미 확신했을 것이다. 나는 머리로는 사르트르처럼 되고 싶었으나 몸으로는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에 가까웠다.
수없이 고꾸라져서 수없이 정강이를 벗기더라도 말숙한 정강이를 가지고 늙느니보다는 낫다,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어 보지만 어떻게 하면 힘껏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캄캄했고, (...) 정강이를 벗기자면 걸려서 널어갈 도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의 발부리에 걸리는 것이라곤 영미가 기르는 고양이밖에 없다. (최인훈, <광장>)
다행히 뉴욕은 내가 이십대에 “걸려서 널어갈 도불”을 많이도 준비해 놓았다. 참으로 고맙...다......ㅋㅋ. (역시 감각을 일깨우는 데에는 고통이 최고?) 덕분에 조금 더 ‘호모 사피엔스’가 될 수 있었다. 완전히 벗겨지지는 않았지만 생채기는 난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가련다. 쿠바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의 ‘잃어버린 몸’과, 그 몸과 만나는 과정에서 벌어질 요절복통 고통과 희열은 아직은 생각하지 않으련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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