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아스만, 『이집트인 모세』 - 유일신과 다신교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 어쩐지 다르지 않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동의보감』에서 “인체는 한 나라와 같다[人身猶一國]”이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이런 문장들이 비유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저자가 그런 비유들을 이용하리라고 짐작하기 보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사실’이지 않을까라고 한동안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냥 ‘유사성’이라고만 뭉뚱그려서 말하기에는 우리 주변에 그런 일은 굉장히 많은 것이다. 다르다는 것, 그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1
'저울'은 정의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추상'의 방법이기도 하다
아마도 철학자들도 나처럼 어리숙하지 않게 이런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고민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구조’라든가, ‘형식’이라는 개념은 이런 느낌을 구체화해서 탐구한 용어들임이 틀림없다. 철학공부를 하다보면 역사학이나 인류학, 나아가서 과학도 읽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각기 다른 대상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치고 있음에도, 어쩐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떤 것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다른 것에 적용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해 보면 그것이 연구상 방법론의 동일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방법론이 같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대상을 유사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대상이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어 생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학문적 대상 이전에 각각의 대상들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오히려 학문은 그 이후의 이야기일 뿐이고, 또 그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일의 이집트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의 『이집트인 모세』를 읽었을 때, 나는 오래전에 생각했던 그것, 그러니까 방법론이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대상의 독특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기원전 2~3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지역과 부족마다 문화나 언어, 또는 관습은 아주 달랐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공통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가 상호 문화적 번역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다. 그리스 신들의 라틴적 해석과 이집트 신들의 그리스적 해석은 그 대표적 예다. 즉 신들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각기 자기들이 모시는 신들을 보여주면,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신교는 오히려 공통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문화와 언어, 관습들을 용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신들을 숭배했지만 누구도 낯선 신들의 존재와 그 신들을 숭배하는 낯선 형식이 지니는 정당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다신교적인 상황에서 반-다신교적인 종교가 탄생한다. 그러니까 유일신교인 유대-기독-이슬람교가 그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롭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종교는 “반-종교”(counter-religion)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런 종교가 그들 앞의, 혹은 그들 밖의 모든 종교를 ‘이방인’이라 부인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반-종교는 앞서 이야기한 다신교가 보여준 상호 문화적 번역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런 급진적인 사태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인 아케나톤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전통(다신교)에 대해 급진적으로 거부하는데, 그에게 다신교는 신성하지 않은 개별적인 것들을 숭배하는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치세 첫 6년간 다신교적인 사원들은 폐쇄되었고, 신들의 성상은 파괴되어 그 이름이 지워졌고, 그 신들을 위한 제식은 중단되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무척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각각의 제식과 성상을 통해 자연을 상상하고, 그 자연의 지배를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이런 파괴는 엄청난 혼란이었다. 제식의 중단과 사원의 파괴는 모든 대중들에게 축제의 중단을 뜻했다. 또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살려면 도시의 주인인 신성의 일부로서 참여해야만 가능한데, 이 사건은 그런 신성을 파괴하고 만 것이어서, 어쩌면 그것은 이집트인 개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일일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우주적이고 사회적인 질서뿐 아니라 개인의 질서를 중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얀 아스만은 아마르나 시대가 극도의 신성모독과 파괴, 그리고 공포를 이집트인들에게 주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신이 부재하고 어둠과 질병만이 창궐한 시대였을거라는 의견이다.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투탕카멘 시절의 시도 있었다. “그 신전들이 마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이제는 짓밟혀 길이 되었구나. 그 땅은 중한 질병이 창궐했고 신들은 그 땅을 외면했도다.” 2 그런 고통이 무척이나 심했는지 아케나톤에 대한 기억이 이집트 역사에서 급속히 사라진다. 3
바로 이 시점에 “모세”가 나타난다. 후대 새로운 모세담론들은 하나의 가설을 내세우는데, 이집트인이자 아마르나식 제사장인 모세가 유대인들을 이끌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이집트를 탈출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년에 쓴 『그 사람 모세와 유일신교』(Der Mann Moses und die Monotheistische Religion)은 바로 그 지점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아스만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이집트인 모세가 아케나톤과 그의 유일신적 혁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4
성서에 모세는 이집트에서 아주 위대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탈출 11,3). 그리고 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학문을 배워 말과 행동이 뛰어나게 되었다고도 되어 있다(사도 7, 22). 이런 표현들은 분명히 ‘이집트인’ 모세에 대한 암시이고 이집트인으로서 그가 히브리 성서에 남긴 흔적들이다. 성서에서 그는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못했고(“혀가 둔한 자”), 항상 자기 형 아론에게 의존하는 것(통역자로서의 아론)을 볼 수 있듯이,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암시가 성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5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가 그의 나라를 떠나 새로운 종교와 율법에 근거한 새로운 종류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 백성으로 유대인을 택한 것은 아톤 종교(아케나톤의 종교)의 몰락이었다.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들에게 자신의 유일신 신앙을 가르쳤으며,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대담한 가설을 추가하는데, 그것은 모세가 유대인 부족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집트인 모세는 어떤 타협이나 ‘적용’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친 유대인들이 이 폭군(모세)을 제거했다. 즉 유대인들이 모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모세의 비타협적인 요구들은 그의 목숨을 대가로 잔인한 폭력과 폭정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그는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가설이다.
모세, 어떤 혁명의 이미지
살해당한 모세는 종교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원시 유목민 집단에서 아버지는 자식들 위에 대단히 포악하게 군림했으며, 만약 아들들이 그 무리의 여성들을 감히 소유하겠다고 덤비면 죽음과 추방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자식들에 의해 살해된다. 이런 살해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런 살해의 기억이 정신에 흔적을 남긴다. 즉 반복을 통해 그 경험은 인간의 정신에 생물학적으로 세습되는 방식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인은 억압을 통해 ‘암호화되어’(encrypted), 즉 의식적으로는 접근하여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는 역사의 모세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각인된 모세로부터 추출된 ‘기억의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가 ‘사람들의 기억에 돌아오고’, ‘신성한 존재로 승격되는 것은’ 바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그 살해 행위를 덮기 위해서 그들은 그를 숭배하고 ‘암호화’하였다. 모세의 유일신교 그 자체가 반복이었다. 아케나톤의 혁명적 유일신교에 대한 이집트적 개념인 모세의 가르침이 근본 종교의 원시적 유일신교의 형태로 되살아났다. 모세의 유일신교는 아버지의 복귀였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면 “대중에게 주문을 걸려면” 그것은 “억압이라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모세 살해는 원시 아버지의 운명을 재연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얀 아스만은 프로이트가 보지 못한 것을 본다. 그토록 폭력적이었다고 보았던 아케나톤의 사유가 자연주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범신론이었다는 견해다. 아케나톤이 실제로 발견한 것, 그가 아마도 발견자로서 최초가 될 그것, 그리고 분명히 계시로 직접 경험한 것은 천지만물(nature)이라는 개념이었다. 그의 <위대한 찬가>를 보면 그는 신이란 태양일 뿐이고, 또한 자연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물의 주여, 그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 그들에게 빛을 주는 온 땅의 주여(Their Lord ofall, who toils for them; Lord ofall lands, who shines for them)” 6
아케나톤은 전통의 종교가 자연적이지 않았다고 여긴 듯하다. 그는 다신교의 번역가능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번역가능성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들어 간 것일지 모른다. 유일신이란 범신으로서 모든 다신론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여 보다 더 해체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가리키는 신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탈신비화, 탈신화화, 탈신격화, 탈분극화, 탈정치화, 탈도덕화(a radical demystification, demythologization, dedivinization, depolarization, depoliticalization, and demoralization)”가 바로 아케나톤의 유일신이었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현실의 ‘자연적인’ 성격을 입증할 수 있었다. 자연은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 극한적 세계는 극적으로 성서의 「시편」으로 전해져 되살아난다. 7
이것이 바로 아케나톤의 반-다신교주의이고, 바로 프로이트가 항상 되돌아온다고 말했던 “억압된 것”이었다. 그 의미에서 유일신교와 다신교는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다양한 대상들이 사실은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고 여겼던 것은 바로 이런 화해의 징후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애당초 그것들은 같은 것이었고, 단지 얀 아스만이 말한 “모세구별”과 같이 의도적인 구별이 나에게 덧씌워지면서 만들어진 구성된 구별이었을 것이다. 다르다는 것, 그것은 이 기반 위에서 다시 생각해야할 주제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 허준 지음, 『동의보감』, 동의문헌연구실 옮김, 법인문화사, 2009, 205쪽. [본문으로]
-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종교개혁왕 아케나톤(재위, 기원전 1364년경~기원전 1347년경)가 활동했던 도시 아케트아텐의 현재 이름인 ‘아마르나’에서 따서 붙여진 시대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한다. 아마르나에 수도를 둔 아케나톤의 치세, 그리고 개혁의 싹이 튼 선왕 아멘호테프 3세의 치세 후반을 가리키며, 때로는 다음 왕인 투탕카멘왕의 치세를 포함하는 수도 있다. 이 시기에 아케나톤은 급진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켜 태양을 상징하는 유일신 ‘아톤’을 신봉하였다. 이때 그는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겼다. [본문으로]
- 얀 아스만 지음, 『이집트인 모세』, 변학수 옮김, 그린비, 2009, 55~56쪽 ; Jan Assmann, 『Moses the Egyptian』, Harva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edition, 1998, p.26~27 [본문으로]
- ‘그 사람 모세’는 한국천주교 성서에서 ‘이 모세라는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성경』 「탈출 11,3」,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편찬, 2008, 96쪽. [본문으로]
- ‘혀가 둔한 자’는 한국천주교 성서에서 ‘말솜씨가 없는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다.[『성경』 「탈출 4,17」,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편찬, 2008, 85쪽. [본문으로]
- 얀 아스만 지음, 『이집트인 모세』, 변학수 옮김, 그린비, 2009, 336쪽 ; Jan Assmann, 『Moses the Egyptian』, Harva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edition, 1998, p.189 [본문으로]
- 얀 아스만 지음, 『이집트인 모세』, 변학수 옮김, 그린비, 2009, 339쪽 ; Jan Assmann, 『Moses the Egyptian』, Harvard University Press paperback edition, 1998, p.18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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