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을 뛰어넘는 전쟁기계 : 승리하거나 죽거나(3)
<열전>을 메운 신라의 전사자들
앞에서 이야기했듯 『삼국사기』 <열전>에는 삼국의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신라의 병사들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그들을 살펴보자.
찬덕과 해론 부자의 대를 이은 죽음. 해론은 모량 사람이었다. 아버지 찬덕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가 있어 한 때 명망이 높았다. 건복 27년 을축에 진평대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 현령을 삼았다. 건복 28년 병인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와서 1백여 일에 걸쳐서 가잠성을 공격했다. 구원군이 가서 백제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가잠성 현령이었던 찬덕이 그것을 분하게 여겨 의리있게 죽기로 결심했다. 군사를 격려하여 일변 싸우고 일변 방어하다가 양식과 물이 떨어지자 송장을 먹고 오줌을 마시는 데까지 이르도록 쉬지 않고 힘껏 싸웠다. 봄 정월에 이르러 사람은 피로해졌고 성이 곧 함락하게 되어 정세가 다시 회복될 수 없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치기를 "우리 임금이 나에게 이 한 성을 맡겼는데 이것을 보존하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게 되니 차라리 내가 죽어서 악귀가 되어 백제 사람을 모조리 잡아먹고 이 성을 회복하기를 발원한다“ 하고 드디어 팔을 걷으며 눈을 부릅뜨고 달려가 회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가잠성이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했다.
찬덕의 아들 해론은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40년 무인에 왕이 해론을 임명하여 금산당주를 삼았는데 한산주도독 변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백제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몰아오므로 해론 등이 이를 맞아 싸우게 되어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해론이 모든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 전사하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 사람과 싸우니 이는 내가 죽어야 할 날이다."하고 드디어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가서 여러 사람을 죽이고 같이 죽었다.
찬덕과 해론 부자를 이어, 용맹한 심나와 소나 부자도 대를 이어 전쟁에서 죽었다. 아버지 심나에 이어 아들 소나도 갑자기 쳐들어온 말갈 군사에 맞서 싸웠다. 소나는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달려들어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활을 쏘았고, 말갈군사들 또한 소나를 향해 활을 쏘았다. 소나에게 박힌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되어 그만 쓰러져 죽었다. 소나의 아내 또한 전사의 부인다웠다. 아내를 조문하니 아내가 울면서 말했다. "나의 남편이 늘 말하기를 남자는 꼭 전장에서 죽어야 한다. 어찌 침석에 누워서 집안사람의 손에 죽겠는가? 하였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러했으니 오늘의 죽음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이다."
반굴과 김영윤 부자도 대를 이어 전사했다. 김영윤은 때를 기다려 물러서자는 장수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나가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군인의 도리라 하며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아버지 반굴은 그 아버지 흠춘의 명령을 받들어 목숨을 바쳤다. 태종대왕 7년 경신에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을 시켜 백제를 치는데 흠춘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병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에 호응했다. 가을 7월에 황산 벌판에 이르러 백제의 장군 계백과 부딪쳐 싸우다가 이롭지 못하게 되었다.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해야하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해야 하는데 위급한 때에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도 두 가지를 함께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이 “그렇습니다” 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위급할 때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성과 효도라고 말한 아버지 흠춘, 그의 아들 반굴, 그리고 그의 손자 김영윤은 그 말을 실천하고 죽었다.
부자가 전쟁에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전쟁에서 죽었다. 부과, 눌최, 핍실 삼형제가 그들이다. 특히 눌최는 백제군에 포위되었을 때 그 종과 더불어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다. 눌최는 도끼에 맞아 쓰러졌고, 종은 적을 향해 버티고 서서 화살을 쏘다 죽었다.
이 밖에도 내밀왕의 8대손인 김흠운과 죽죽, 필부 등도 모두 죽을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필사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전장에서 죽었다.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인 흠운이 죽으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 성중의 수치라고 만류해도 흠운은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바친 이상 남이야 알거나 모르거나 마찬가지니 어찌 구태여 명예를 바라겠느냐"고 하며 적 두어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를 본 보기당주 보용나도 적 서너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선덕왕 때 품석이 백제와 맞서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자 항복하러 성 밖으로 나가려 하자 죽죽이 만류했다. 그러나 품석은 성 문을 열었다. 백제의 복병이 장병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품석은 자기 처자를 죽이고 자기도 목을 찔렀다. 죽죽은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참대와 같이 한겨울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니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성이 함락될 때까지 힘껏 싸우다가 용석과 함께 죽었다.
필부는 "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을 다하여 싸우자. 이성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렸다."고 말하고 나아가 싸웠다. 빗발같이 날아오는 화살에 필부의 팔다리와 전신이 뚫어지고 터져서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리매 그만 쓰러져 죽었다.
이처럼 『삼국사기』 신라조에는 전쟁에 임하는 신라인들의 태도가 매우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다. 진골이든 육두품이든 양민이든 종이든 전쟁에 나가 후퇴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전쟁에 임할 때 신라인들은 충효 두 글자를 가슴에 새겼다. 『삼국사기』 열전의 삼분의 이는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와 군사들의 이야기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니 신라측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승되어 그런 것이겠지만, 『삼국사기』는 이 전쟁영웅들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계백과 김유신은 과연 '애국'의 영웅들이었을까?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충효로 무장된 전쟁기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용맹성, 그 어떤 병법도 당할 수 없는 최종무기가 아닌가? <삼국사기>는 그렇게 보는 것 같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수다한 화랑출신들에게 전쟁에 임해 후퇴란 있을 수 없었다. 김부식은 이런 화랑의 정신을 높이 칭송한다.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며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여기에서 양성된다."고 예찬한다. 태종까지의 3대 왕조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은 전장에서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
우리도 화랑들의 정신을 높이 칭송한다. 그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동지애,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성을 높이 산다. 전쟁의 시대, 이기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법이다. 다른 것은 돌아보거나 성찰하지 않는다. 아니, 판소리 『적벽가』의 군사들처럼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회의하지 않는다. 사회가 그렇게 이들을 전장으로 몰았다. 이들에게는 어떤 의구심도 없다. 아니 『삼국사기』 <열전>에는 전쟁에 대한 다른 목소리는 없다. 오직 전쟁기계들의 장렬한 전사 장면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참담하게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의연한 군사들. 오직 적을 이기겠다는 불굴의 정신만을 강조한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고, 너를 죽이고 죽겠다는 필승의 투지만이 길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전장에서는 죽었지만 이름은 남기는. 아니 이름도 남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이 전쟁기계가 되어 죽었다.
물고 물리는 전투는 우리들을 전쟁기계로 내몬다. 이런 현장에서 성찰은 가능한가? 애국심이 아니라 삶에 대해 얘기한다면 벼락 맞을 소리일까? 장자는 그렇게 말했다. 다리 하나 없는 사람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나라에서 주는 식량으로 먹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인의라는 이름으로 치르는 전쟁도 무고한 목숨을 앗아갈 뿐이며, 그런 전쟁조차 천하를 소유하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천하를 소유하지 않으면 전쟁은 사라진다는 것. 그런 사회가 진정 모색될 수 있는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70,80년대는 그 용맹성에 전율을 느끼고 호국의지를 불태웠지만, 현재는 그런 맹목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렇지만 막상 우리 앞에 던져진 삶이라면 또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상시 전장인 이라크처럼 싸우며 축구하며 그렇게 사는 것. 어쩔 수 없는 삶이지만 거기서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대하다. 신라인들과 우리들은 다르다. 어떤 명분이 주어진 전쟁에서도 우리는 외쳐야 한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 싸우기. 전쟁에 저항하는 길은 그것 외에는 또 없다. 온 지구가 항시적인 전쟁에 직면해 있다고 안토니오 네그리는 말했다. 국지전이든 내전이든 모든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세계 전쟁임을 분명히 했다. 전쟁이 멀리 있지만 늘 전쟁하는 삶. 그러나 실감되지 않는 전쟁이다. 죽음을 직면해야하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깨어있어야 하는지, 7세기 한반도의 전쟁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전승의 대가, 부귀공명과 명예욕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일념은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 『삼국사기』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삼국전쟁의 시기, 신라인들에게 임전무퇴는 충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 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면 이 또한 충효가 아니다. 전공에 대한 보상은 나를 인정받는 일이다.
영화 <황산벌> 중에서 _ 신라의 장수 김유신도 '화랑' 출신!
삼국통일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76세에 죽은 김유신도 공적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니 그가 포획한 전리품과 목을 벤 적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유신이 죽은 이후라도 국가는 그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혜공왕 때 김유신의 후손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문에 김유신의 무덤에서부터 시조대왕의 무덤에까지 자욱하게 안개가 끼고 슬피울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삼국유사에서는 김유신 귀신이 미추왕 귀신에게 나라를 떠나겠다고 아뢴다.) 혜공왕이 사과하고 제를 올리자 가라앉았다고 한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이유는 나라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문 누대의 명예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을 간과하면 귀신도 화를 낸다.
김유신 장군의 전투에 참여해 공로를 이루었던 열기와 구근도 공로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비판한다. 열기와 구근은 고구려 군사의 장막을 뚫고 소정방에게 기별을 전하는 공로를 이루어 급찬 벼슬에 오르고 여기에 더해 사찬의 품직까지 받았다. 유신의 아들 삼광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그를 찾아가 군수를 달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의 승려 순경에게 말했다. "나의 공로가 큰데 군수를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으니 삼광은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 나를 잊어버린 것이겠지?" 순경이 이 말을 삼광에게 말했더니 삼광이 열기에게 삼년산군의 태수 자리를 내렸다. 구근은 원정공의 서원술성을 쌓는 공사에 종사했는데 원정공이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서 구군이 일을 게을리 하였다 하여 곤장을 쳤다. 구근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열기와 함께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지대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실행하였으며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로 대우했는데 지금 뜬 말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에 이보다 더 큰 욕이 없다.”고 했다. 원정이 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후회하고 부끄러워했다.
열기와 구근의 공명심은 김유신이 죽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당당하게 군수직을 요구하고, 더럽혀진 명예로 인해 상대방을 통렬하게 꾸짖는다. 전쟁의 공로는 인정받아야 한다. 전장의 승리는 부귀와 공명의 다른 말이다.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도 욕망은 살아있다. 승리하면 부와 직위와 명예가 내려진다.
우리의 유명한 화랑 관창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역사적 격전지 황산벌에서 백제의 장군 계백과 신라 화랑 관창이 대적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관창은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바로 적진을 쳐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적 두어 명을 죽였다. 그러나 적은 많고 우리 편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산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고 그의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아깝게 여겨 차마 죽이지를 못했다. 이에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특출한 사람이 많다. 소년도 이렇거든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그냥 살아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다시 적진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격렬하게 싸웠는데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가지고 그의 말안장에 매어 돌려보냈다.
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바, 그 관창의 이야기이다. 어린 나이에 적진을 향해 죽기로 뛰어드는 담대함. 어린 소년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장군 계백.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에는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게 한, 그 뒤에는 아버지 품일이 있었다.
관창은 풍채가 잘나서 소년시기에 화랑이 되었는데 남과 교제를 잘하고 16세에 말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사를 등원하여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했는데 관창으로 부장을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두 쪽 군사가 맞서게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 품일이 관창에게 이르기를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은 의지와 기개가 있구나. 오늘이야말로 공훈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오리다.
품일이 관창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얼굴이 산 것과 같구나. 나랏일에 잘 죽었으니 후회할 것 없다." 3군이 이것을 보고 모두 격분되어 뜻을 가다듬고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쳐들어가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아버지 품일은 관창에게 공훈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라고 말한다. 관창은 이 말을 들은 후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달려든다. 그리고 머리를 베이지만 신라를 승리로 이끈다. 살아서 부귀와 공명을 얻지는 못했지만 집안에 부귀와 영광을 안겨주었고 이름을 남겼다. 충효는 이렇듯 집안을 살리는 길이자 집안을 영광으로 이끄는 길이다. 어린 화랑들은 공명심에 전장에서 사라져갔다. 길이길이 그 용맹함이 회자되는 것,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찬사가 이들을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성공을 부추기는 욕망의 장, 전쟁터
전쟁은 성공을 부추기는 욕망의 장이기도 하다. 집안을 빛내기 위해, 그리고 부귀를 위해 어린 소년들이 전장에서 몸을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당나라로 가서 부귀공명을 이루기를 원했다. 설계두는 진골이 아니면 승진이 안 되는 계급구조 때문에 신라를 벗어나 당나라로 떠났다.
설계두는 신라의 행세하는 집안 자손이다. "신라는 사람 쓰는 데 골품을 운운하여 만일 그 골품에 속한 자가 아니면 아무리 큰 재주와 훌륭한 공로가 있더라도 높이 승진할 수가 없다. 나는 서쪽으로 중국에 유착하여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고 비상한 공훈을 세워서 자신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바 예복을 입으며 칼을 차고 천자의 곁에 드나들면 만족할 것이다." 무덕4년 신사에 계두가 비밀히 배편 따라 당나라에 갔다. 태종 문황제가 손수 고구려 정벌하게 되매 그는 자원하여 좌무의 과의가 되었다. 요동에 이르러 주필산 밑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웠는데 적진 깊이 들어가 격렬히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전공이 1등으로 되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이리저리 보기만 하고 앞으로 나가지 않는데 외국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나랏일로 죽었으니 무엇으로써 그의 공을 갚으랴?" 평소 소원하던 말을 듣고 자기의 옷을 벗어 그를 덮어주고 벼슬을 주어 대장군을 삼았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계두는 자원하여 싸우다 죽는다. 전공이 1등이라 이름은 남겼지만 당 나라 땅에서 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이름뿐인 영화가 그를 기다렸다. 그의 주검에는 황제의 옷이 덮이고 대장군의 벼슬이 내려졌다. 영예는 주어졌지만 부귀공명은 누리지 못했다. 그래도 신라를 벗어나 당나라에서 활약하는 게 훨씬 나은 삶이었을까? 설계두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죽어서라도 그 영광을 누리는 게 낫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최치원은 설계두의 후예이다. 최치원은 무공이 아니라 문예로서 부귀영화를 이루려고 12살에 당나라로 유학 갔다는 사실이 다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이름은 날렸지만 변방인의 설움을 못 이기고 신라로 돌아온다. 국운이 쇠해지는 신라로 돌아왔지만 6두품 최치원에게 계층의 벽은 높기만 하다. 청운의 꿈은 실현되지 않는다.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그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당나라로 가서 야망은 이루어진 것인가? 설계두는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고, 최치원은 경계인으로 최후를 마쳤다.
전장에서 크게 공을 세우거나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던 이들의 모습은 이렇게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절개와 의리 때문에, 어떤 이는 공명심에, 어떤 이는 부귀영화를 위해 제각기 죽어갔다. 어떤 이유의 죽음이든 어떤 병법보다 더 강력한 전법이 되어 신라를 승리로 이끌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쟁기계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켰고 이름을 남겼다. 이들은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죽음을 향해 달렸다.
『삼국사기』의 전장에서 강렬하게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쟁의 파괴력와 공포에 대해 일깨워준다. 전쟁의 전략과 전술, 승리자와 패배자, 죽은 적병의 숫자를 기술하는 기사에서는 파괴력과 공포가 덜하다. 그러나 용맹하게 내달리는 장수와 병사들의 죽음을 기술한 열전은 전쟁의 상흔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전쟁에서의 어떤 값진 죽음도 사는 것만은 못하다는. 전사자에게 부귀공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는.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되었지만, 통일은 누구의 욕망인가하는 여러가지 의구심이 차례로 일어난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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