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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위의 윤리 : 언약과 맹서(盟誓)의 미학

by 북드라망 2016. 11. 29.

윤리 위의 윤리 : 언약과 맹서(盟誓)의 미학




공주가 온달에게 간 까닭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온달전」이다. '현처우부(賢妻愚夫)'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바보온달'의 이야기는 동화로, 혹은 남자를 성공시키는 능력 있는 여성들의 신드롬으로 회자된다. 온달이야기는 '남성의 성공은 곧 여성의 성공'이라는 등식을 유포하며 여성의 내조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우리의 뇌리에 콕 박혀있다. 그야말로 평강왕의 딸은 '내조의 여왕'의 원조이다. 부자에 능력 있는 여성을 만나 금시발복하는 남성들의 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해석이라고 할까?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다시 읽어보자. 꼼꼼하게 읽어보면 강조점이 다르다. 동화로 읽었던, 혹은 이야기로 들었던 ‘평강공주와 온달’을 일단 기억 저편으로 보내고, 『삼국사기』열전에 실려 있는 「온달전」의 이야기 전체를 찬찬히 읽어 보자.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의 용모는 여위고 허름하여 우습게 보였으나 마음은 순박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낡은 신으로 저잣거리에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지목하였다. 


평강왕의 딸이 어려서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네가 늘 울어서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필시 점잖은 사람의 아내가 못될 것이요. 바보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겠다"하여 그가 울 때마다 왕이 이런 말을 했다.(兒好啼, 王戱曰, "汝常啼, 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매 왕이 상부 고씨에게 시집을 보내려하니 공주가 왕에게 말하기를 "대왕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였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변경하십니까?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거든 하물며 임금으로서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그릇되었으므로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謬矣, 妾不敢祗承.")하니 왕이 성을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도저히 내 딸로 될 수 없으니 어찌 한집에 살겠느냐? 너는 너 갈 데로 가려무나."

이에 공주가 진귀한 금은팔걸이 수십개를 손모에 걸고서 대궐문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웬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는 눈먼 늙은 어머니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을 하면서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여 귀인의 가까이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 이제 그대의 냄새를 맡으매 꽃다운 향기가 보통이 아니며 그대의 손을 만지매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에 귀인인데 누구의 허튼 수작을 듣고 여기까지 왔는가? 그런데 내 자식은 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림 속으로 갔다."


공주가 그 집으로부터 나와 산 밑에 이르러서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만났다. 공주가 온달에게 자기의 심회를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성을 내어 말하기를 "여기는 어린 여자들이 다닐 데가 아닌데 필연코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로구나. 나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하고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공주가 쓸쓸하게 돌아와 사립문 바깥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온달 모자에게 세세한 말을 하였으나 온달은 이럴까 저럴까 뜻을 결정하지 못하고 그 어머니는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지리도 못나서(貧具陋)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해서 아예 귀인이 있을 수 없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한말의 곡식도 찧어서 함께 먹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기워서 같이 입을 수 있다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고 하면 어찌 꼭 부하고 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古人言, 一斗粟猶可眷,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當貴, 然後可共乎.") 하고 이에 황금 팔걸이를 팔아 전택, 노비, 우마, 기물들을 사들이니 살림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저잣사람의 말을 사지말고 나랏말로서 병들고 수척하여 버리게 된 것을 고른 다음 값을 치러야 한다."하니 온달이 그 말을 따랐다.


공주가 말을 기르는데 매우 부지런히 하매 날로 살찌고 건강했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3월 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을 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령에 제사를 지냈다. 그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갔다.

이 때에 온달이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왕을 수행하는데 온달이 항상 앞에서 달렸으며 잡은 짐승도 제일 많아 다른 사람은 온달만한 자가 없었다. 왕이 온달을 불러 성명을 듣고 놀라는 한편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이 때에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하여 요동을 침략하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판에서 맞받아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으로 되어 재빠릴 싸워서 적병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고 들이쳐서 크게 이겼다. 전공을 평정할 때에 모두들 온달의 공로가 제일이라고 하였다.

왕이 온달을 칭찬하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의 사위로다."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였으며 그에게 대형(大兄)이라는 벼슬을 주니 이 때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총애와 영광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온달의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해졌다. 


그 뒤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매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떼어내어 자기들의 군현을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통분하게 생각하여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다 하지 말고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한 번 걸음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이 떠날 때에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지역이 우리 땅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드디어 행군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도중에서 죽었다. 

그를 장사하려 하였으나 널이 움직이지 않으매 공주가 와서 널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결판이 났구려. 아아! 돌아가시라."하니 그제야 널이 들리어 하관을 하였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삼국사기, 열전, 온달) 


무용총 수렵도


얼핏 읽으면 부인을 잘 만나 성공한 남자 이야기인 듯하다. 물론 왕족인 부인을 만나 온달은 장군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온달전」에서 보여주는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온달은 가난하지만 이미 유명했다. 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다. 물론 바보 온달로 일컬어졌다. 바보 온달인 이유는 진짜 바보여서가 아니었다. 온달은 옷이 누추하고 가난하지만 마음은 질박하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온달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착한 아들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온달은 길거리에서 구걸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순수하고 착해서 바보 소년의 대명사로 불린 듯하다. 마음이 질박하다는 것은 본바탕 그대로를 지니고 있는 매우 순수한 소년이라는 의미이다. 가난이나 구걸에도 흔들리지 않고 본바탕을 지니고 있다면 온달 또한 매우 능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던 것이다. 공주는 온달의 품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모양이다.


바보온달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궁에도 퍼져간 듯하다. 문제는 왕의 딸이 울보라는 것. 울보 공주가 의미하는 건 뭘까? 공주는 불만이 많은 소녀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운다. 궁중생활에 대한 불만족,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울음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딸에게 왕은 그렇게 울면 사대부의 처가 될 수 없고 바보온달의 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왕은 매번 이렇게 말했다. 불만 많은 소녀가 16세의 여인으로 성장한다. 공주는 왕이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왕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말한다. 행위가 따르지 않는 말은 필부도 하지 않는다. 지존(至尊)인 왕은 희언(농담)조차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농담은 없다. 공주는 왕의 언약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존에게 농담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약속이므로 약속에는 신의가 뒤따라야 한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공주는 떠난다. 이 지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공주가 온달에게 시집가기 위해 '왕에게 희언이란 없다'를 물고 늘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고대사회의 윤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공주에게 '말은 곧 행위이다.' 내뱉은 말은 반드시 행위로 지켜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 신의가 생긴다. 행동하지 않는 말은 허언이자 식언이다.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는 바로 말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는 궁중에 불만이 많았다. 궁중을 벗어나 살고 싶었고,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이 생활을 주도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공주가 울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공주는 사대부의 처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의 처가 되고 싶었다. 공주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과감하게 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창경궁 문정전 _ 어느 시대에나 '궁궐'은 격식과 경계로 닫힌 공간이었다.


온달은 공주가 원하는 짝이었던 것이다. 가난하여 추레하지만 마음만은 올곧고 순수한 온달은 공주가 찾는 짝이다. 그래서 공주가 온달을 만나 한 말이 바로 동심(同心)이다. “한 말의 곡식과 한 자의 베를 나눠 먹고 입더라도 마음이 맞으면 함께 할 수 있다”고. 평강왕의 딸이 온달을 찾아온 것은 그런 믿음 때문이다. 마음이 맞는 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공주를 움직인 것이다. 공주는 온달을 만남으로써 서로가 믿고 믿어주는 관계, 신의가 있는 부부로서 맺어지고 싶다는 발원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동지(同志)가 될 수 있는 남편을 찾은 것이다.  


이미 궁중 밖에서 자유롭게 원하는대로 살고자 했던 공주였기에 공주는 준비를 철저히 했다. 가난한 온달과 살기 위해 궁중을 나오면서 보석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철두철미한 생활력을 갖추고 나왔던 것이다. 김부식은 공주를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않으며, 두 사람의 결합도 환상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공주는 궁에서 가지고 나온 보석을 팔아서 집안을 일으키고, 온달에게 좋은 말을 사오게 하여 그 말을 준마로 길러낸다. 공주의 내조 덕에 사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로 인해 장수로 발탁된다. 장수가 된 온달은 혁혁한 공을 이룬다. 부모의 나라 고구려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장수로 성장한 것이다. 왕은 자랑스런 사위로 온달을 인정한다. 


우리가 주목했던 온달 이야기의 정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정작 ‘온달’을 입전한 김부식은 공주의 결단을 더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바보 같고 가난한 온달의 성공신화에 눈길을 준다. 사실 이 이야기는 공주의 성공이자 온달의 성공이기도 하다. 공주는 결혼생활을 아주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이끌고 있다. 온달도 벼락 출세한 것이 아니다. 공주 덕분에 능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사냥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것은 온달 스스로의 힘이다. 서로를 믿어주고 끌어주는 관계. 그것이 공주가 꿈꾼 생활 아니었을까?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도 다 갖춘 남자를 만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현대의 ‘독립적’이라고 하는 여성들과 사뭇 다른 결혼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결혼에서 중요한 관건은 사랑도 사랑이지만,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즉 뜻을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 공주와 온달을 맺어준 열쇠는 바로 이 것이었다.    



윤리 위의 윤리, 신(信)


그리하여 「온달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고구려의 땅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하고 아단성에서의 전투에 참여한다.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던지고 전투에 나아갔다. 온달은 신라군사와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공주 앞에서 했던 맹세가 지켜지지 않았다. 시체로 돌아온 것이다.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생사는 결정되었으니 돌아가시라'고 언약을 풀어준 뒤에야 관이 움직였다.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 신의가 온달을 움직이는 윤리이다. 공주를 못 떠나서 관이 요지부동한 것이 아니다. 전쟁터에 나서기 전, 공주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온 데 대한 책임 때문에 관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공주가 그 약속을 풀어주자 비로소 온달은 떠날 수 있었다. 

온달전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일관하는 윤리는 '신'이다. 말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뱉은 말을 지키는 것이다. 말은 행해져야 하지, 허공에 떠돌게 해서는 안된다. <논어>에서도 "행위는 민첩하게 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어야 하며", "행위를 먼저 하고, 말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실천이 우선이다. 언약도 맹세도 지켜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말에서는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 친구사이에 기초한 윤리가 신의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신의에 기초한다. 고대사회에서는 공증을 받지 않아도 말이 공증이 된다. 그러니 말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 언약과 맹세가 지켜지지 않으면 전쟁은 시작된다.   


이렇듯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약속된 말이 지켜져야 한다는 건 고대사회의 절대적 윤리이다. 신라 25대 진지대왕의 일이다. 진지대왕은 음란하고 정사에 소홀하여 일찍 쫓겨나 죽임을 당했다. 이런 왕에게 내건 언약도 지켜져야 한다. 


제25대 사륜왕의 시호는 진지대왕. 대건 8년 병신(576)에 즉위했다.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운데다 음란한 짓에만 빠졌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내쫓았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 민간에 자태와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도화랑이라고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사랑하려고 하자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만승천자의 위엄으로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죽이겠다면 어쩌겠느냐?”

여자가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다른 남자를 따르지는 않겠습니다.”

왕이 장난삼아 말했다. “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괜찮습니다.”

왕이 그를 놓아 보냈다. 그 해에 왕이 쫓겨나 죽었다. 2년 뒤 그의 남편도 역시 죽었다. 


열흘 뒤 별안간 밤중에 왕이 생시와 같은 모습으로 여자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네 남편이 없어졌으니 괜찮겠지?” 

여자가 가볍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알렸더니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딸을 방으로 들여보내 이레 동안 모시게 했는데, 늘 오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이레 뒤에 왕이 별안간 사라졌다. 여자는 곧 임신했는데 달이 차서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한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삼국유사)


진지대왕이 살아서 남편이 있는 도화랑을 빼앗으려 했으나, 뜻대로 하지 못했다. 도화랑은 두 남편을 따르지 않는 것이 부인의 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왕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왕이 죽었고 도화랑의 남편이 2년 뒤에 죽었다. 진지대왕은 귀신이 되어 도화랑에게 나타났다. 진지대왕은 언약을 실행하라고 귀신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훌륭하지는 않은 왕이지만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윤리를 죽어서도 보여주고 있다. 도화랑은 부모와 상의하여 왕을 모신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는다. 


이 일화는 진지왕의 음란함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남편이 죽으면 왕을 모시겠다'는 도화랑의 말을 잊지 않고 기어코 실행에 옮긴 왕의 행위에 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라도 다른 남자를 따르지 않지만, 남편이 죽으면 따를 수 있다. 부부로 맺어진 한 신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한 쪽이 죽으면 다른 관계를 맺는다. 고대사회에서 재가는 당연한 것이기에 남편이 죽자 왕을 받아들이는 도형랑의 행위는 부부윤리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재가는 생존의 문제이다. 부부로 맺어지지 않으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다. 죽은 후 다른 배우자를 얻는 일은 부부의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니다. 


'말'은 지켜져야 하는 것!


그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어떤 말도 지켜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도화랑은 왕이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나온 발언임에도 '남편이 죽으면 왕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을 실행한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도화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자에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불경이부(不更二夫)와는 다른 윤리에 기초한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오직 한 남편을 위해 절개를 지켰다면, 삼국시대의 부부는 믿음에 기초한다. 살아 있을 때, 부부로 맺은 약속을 깨지 않겠다는 윤리에 기초한다. 

이 윤리는 여성들만의 윤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위에 놓여 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문장에 뛰어난 강수선생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미천한 부인에 대해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에 있던 대장장이 집 딸과 야합하여 정이 매우 두터웠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매, 부모가 읍내의 여자로서 얼굴과 행실이 좋은 자를 가려 장가를 들이려 하니 강수가 두 번 장가들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아버지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네가 지금 명망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미천한 자로써 배필을 삼는다면 역시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니 강수가 공손히 절하며 말했다. 

"사람이 가난하고 천한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고생을 같이하던 아내는 홀대하지 못하고 가난하고 미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 하였으니 이 미천한 여자를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중략)


강수는 언제나 생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집이 가난하여도 늘 만족하게 여겼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에서 받는 벼 1백 섬씩을 주게 하였다.

신문대왕 때에 이르러 강수가 죽으매, 장사에 관한 비용을 나라에서 당하여 주었다. 부의로 준 옷과 피륙들이 특별히 많았으나 집안사람들은 그것을 사사로이 차지하지 않고 모두 불공하는 데 돌렸다.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대신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벼 1백 섬을 주었더니 그 아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내가 천한 몸으로 남편을 따라 입고 먹었기 때문에 나라의 은혜를 입은 것이 많았다. 지금은 홀로 되었거니 어찌 나라의 후한 대우를 다시 받을 수 있겠느냐?"하고 끝내 받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수는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여 부부가 되었는데, 강수의 부모는 미천한 자를 배필로 삼으면 수치스럽다고 다른 데 장가들 것을 강요한다. 이에 대해 강수는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도리[信]을 저버리는 일이 부끄럽다고 부모에게 말한다. 강수는 함께 고생한 아내를 홀대하지 못하고, 미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하며 대장장이 딸과의 결혼을 주장한다. 부부의 관계나 친구의 관계는 신의가 중요하다. 

강수와 대장장이 딸이 관계 맺는 방식 또한 평강왕의 공주와 온달 사이에 통하는 동지의식에 버금간다. 뜻이 맞아 부부로 맺어지고, 부인도 남편의 뜻을 존중한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독립적이다. 남편이 죽자 나라에서 주는 그 어떤 혜택도 거절한다. 부인은 강수와 산 덕분에 신분에 넘치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며 고향으로 떠난다. 부인은 가난과 미천한 처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인은 자기 신분에 대해서도 당당하다. 평생 가난을 달게 여기며 살았던 강수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남편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강수나 그의 부인이나 가난과 미천함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지로 맺어진 부부는 끝까지 신의를 지켜간다. 서로의 뜻이 꺾이지 않게 생생(生生)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간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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