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에게 배우는 여행의 태도
며칠 전 친구와 이런저런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수다를 떨던 중에 당시 내가 봐두었던 태블릿을 살지 말지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제품이 비싼 건 맞았지만 공돈이 생기기도 했고, 못 살 만큼 비싸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문득 친구는 “하지만 나 같았으면 그 돈으로 뉴질랜드행 비행기 티켓을 샀을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뉴질랜드 비행기 티켓 값이 비싸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 통장 잔고를 가늠해보았고, 지금 당장에라도 뉴질랜드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미지의 세계였던 뉴질랜드가 아주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뉴질랜드가 마치 제주도나 울릉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뉴질랜드행 비행기 표 값을 나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쉬는 날이면 주로 집에 있다. 태어나서 해외여행이라고는 딱 한 번 가 본 게 전부다. 나는 내가 여행을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못 된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가끔 여행기를 읽고, 관련한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 특히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친한 누가 해외 어딘가를 간다고 하면 내가 너무 반갑다. “사진 많이 찍어와! 다녀와서 꼭 얘기해주고!”라고 덧붙인다. 휴일이면 IPTV와 넷플릭스와 함께 소파에 들러붙어 우주를 망라하는 '디스플레이 여행'을 즐기고 있지만, 왠지 요즘 들어 여행 생각을 많이 한다. 이 반도에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경관과 낯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직접 두 발로 걸어서, 두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담헌이 청나라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행운만은 아니었다. 담헌은 이미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자였다. 담헌은 떠나기 몇 해 전부터 이미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의 『연행록』을 읽었으며, 중국어를 익히고 있었다. … 노가재의 여행기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청나라를 풍광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노론 계열 젊은이들에게 한번쯤은 청나라 외유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 이후 연행을 가는 사신들은 노가재의 『연행록』을 읽고, 그가 보았던 것을 보고자 노력했다. 담헌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도 많았고, 서양의 천문역학 기구를 직접 관찰하고 싶었던 담헌은 이미 외유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담헌은 한어(중국어)를 써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 길진숙, 『18세기 조선의 백수 지성 탐사』, 북드라망, 2016, 230~231쪽.
홍대용은 청나라에 가기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 청나라에 갈지 모를 때부터 말이다. 그 덕에 홍대용은 청나라에 가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알차게 청나라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선배의 여행 경로를 따라 절경을 구경하고, 여관주인을 붙잡고 거듭 말을 걸어 자기의 한어 실력을 시험해 보기도 한다. 연경에서 ‘프리패스’를 얻기 위해 관리들을 직접 만나 선물(혹은 뇌물^^;)을 주고 편지를 준비해 보내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는 관리들의 성향을 미리 조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어이 '프리패스'를 얻고, 출입허가를 받아냈다. 이 모든 것이 더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기 위함이었다. 홍대용의 ‘여행가서 꼭 할 것’ 목록에는 ‘마음이 맞는 한 명의 선비와 실컷 이야기해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서, 흥미가 있는 사람은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교제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 노력으로 평생지기도 얻게 되었다. 다녀온 후 여행기는 물론 지기와 나눈 필담을 책으로 엮어냈고, 당시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책도 써냈다. 여행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어냈다고나 할까. 아마도 이것은 여행을 가기 전에 이런 ‘치밀한 준비’를 하고,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여행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간 몇 안 되는 여행은 즉흥적인 경우가 많았다. 사전조사라고는 교통편이나 숙소, 하루에 가야 할 곳 한두 곳을 정해놓는 정도고 예산도 그냥 헐렁헐렁하게 잡았다. 날짜도 좀 급하게 잡는 경우가 많아서 혼자 가는 일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런 여행도 재미있었다. 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몇몇 기억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복잡한 환승역에서 길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나를 잡아끈 아주머니의 손길 같은 것이나, 신사에 돌쯤 된 아기를 데려온 부부를 만난 일, 길을 잃은 공원에서 샤미센을 켜는 아저씨를 구경한 일 같은 건 아직도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도 이제는 다른 여행을 해보고 싶다. 18세기와 달리 21세기에는 선진문물을 배우러 직접 외국에 가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렇지만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고 싶은 것은 18세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다면 분명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득, 뉴질랜드행 티켓 가격도 알았고 여행도 가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한 요즘, 나도 이런 알찬 여행을 목표로 준비 하면 어떨까 싶다.(그리고 그런 계획은 태블릿 PC 같은 걸로 짜면 참 좋겠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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