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움베르토 마투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앎의 나무』,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우리는 세계의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visuelles Feld)를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공간(chromatischer Raum)을 체험하는 것이다.(30p)
신경체계와 관련된 책들, 이를테면 뇌과학이나 인지과학과 관련된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하긴 모든 과학책이 술술 읽히지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의 과학책이 어려운 이유는 용어들의 낯설음 때문이다. 낯설다는 심리적 거리감이 어렵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학서적들은 이런 용어의 낯설음을 통과하고 나서 내용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앎의 나무』는 이런 어려움과는 다른 어려움을 안겨준다.
사실 다른 신경과학 책에 비하면, 『앎의 나무』에 등장하는 용어들의 수는 보잘 것 없다. 그 용어들 자체도 그다지 어렵게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기란 수월치 않다. 그 이유는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말하는 내용 자체가 기존의 우리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유를 뒤집어엎는 대공사가 필요하다.
이
대공사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 ‘외부와 나의 관계’다. 우리는 외부의 어떤 자극을 받아들여 그 외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우리는 보통 ‘앎’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호랑이를 안다’고 말하면, 호랑이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를 안다는 의미다.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 1928~)
그러나 마투라나와 바렐라에게 그런 앎은 없다. 우리는 내 눈 앞에 서 있는 호랑이를 체험하는 게 아니다. 이를테면 호랑이의 갈색
털과 얼룩덜룩한 무늬를 경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호랑이의 ‘색깔’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색채 공간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보자. 손가락으로 살을 누른다. 그때 살이 쑥 들어간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손가락이 살을 쑥 들어가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요컨대 인과는 ‘손가락’과 ‘살’ 사이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살이 그렇게 쑥~ 들어가는 이유는 손가락에 있지
않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마투라나와 바렐라에 따르면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의 내적 관계에 달려 있다. 생명체들은 내적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려 한다. 두 남녀가 파트너가 돼서 서로 손을 잡고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면 좋다. 이런 춤의 경우 남자가 자세를
바꾸면 여자도 따라 자세를 바꾼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춤추고 있는 남자를 툭 쳤다고 해보자. 남자는 우연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럼 여자는 어찌되었든 남자와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꾸고 따라간다. 아마추어들은 남자가 건드려지는 돌발사건에 춤을 멈추겠지만, 프로 댄서라면
금세 자세를 틀어 춤을 이어갈 것이다. 이런 프로 댄서가 우리 몸의 세포들이다.
살이 쑥 들어가는 현상은 이런 춤의 결과다. 손가락은 남자 댄서에게 닥친 하나의 돌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의 간섭이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를 ‘섭동’이라 부른다. 이런 섭동이 그 두 남녀 사이에 ‘구조 변화’를 일으킨다. 이 때 일어난 구조 변화에 발맞춰
여자가 재빨리 자세를 틀어준다. 이렇게 여자가 자세를 바꿔, 기존의 내적 관계를 계속하려는 것, 이것이 세포들이다.
세포들이 가진 바로 이런 춤추는 능력. 이 능력이 살을 쑥 들어가게 만든다. 손가락이 살에 구조변화를 일으키면, 세포들의 내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힘에 의해 살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살이 쑥 들어가는 근원적인 인과는 외부 대상인 손가락과 내 살
사이에 있지 않고, 살을 이루는 세포-세포의 내적 관계에 있다.
아직까지도 이 인과가 찜찜하다면, 세포가 춤추는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를 떠올려보자.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한다. 언제?
바로 보톡스다. 보톡스는 독이다. 보톡스를 맞는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여자댄서에게 독을 주입해 기절시킨다는 의미다. 그래서
여자 댄서는 남자 파트너의 돌발사건에 맞춰 춤을 출 수 없다. 보톡스의 효과란 이런 거다. 요컨대, 웃을 때, 옆의 세포와 함께
춤추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런 웃음을 보면 우리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상해. 분명 보톡스 웃음이야.’ 라고.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로부터 우리가 느끼는 것, 그리고 안다고 하는 것까지 그 내용을 확장해 간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외부 작용이
아니라, 내 몸을 이루는 세포들의 춤뿐이다. 즉, 우리는 호랑이의 색깔을 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색채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궁금증이 생긴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게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면, 대체 앎이란 무엇일까? 앎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아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앎의 불가능성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외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여 정보를
취득하는 앎은 환상이라는 것뿐이다. 그들은 그런 앎이 아닌 다른 앎, 실제로 우리가 구성하는 앎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고자
할뿐이다. 이것이 『앎의 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앎에 대해서까지 얘기를 진행시킬 수는 없을 듯하다. 내게 할당된 지면 문제도 있지만, 직접 들어가
스스로 그 대공사를 경험해 보길 바라서다. 음…나도 완전히 대공사가 끝난 상태는 아니지만.(^^;;)
여하튼 내가 얘기한 것은 이 책의 현관을 여는 열쇠다. 이제 그 열쇠를 꽂고, 돌려서, 문을 열고 들어가, 책을 체험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장담한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아주 다른 생명이, 그 생명의 삶이, 그리고 앎이 있다고.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섭동이 유발하는 내 세포들의 춤, 그 춤의 대공사가 몸을 간질간질, 짜릿짜릿하게 할 거라고. 자, 이 열쇠를
들고 문을 열어보심이 어떠실지.^^
글. 신근영(남산강학원)
생물을 특징짓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말 그대로 지속적으로 생성하는 데 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생물을 정의하는 조직을 자기생성조직이라 부르고자 한다.(그리스말로 ‘autos’는 ‘자기 자신’, ‘poiein’는 ‘만들다’를 뜻한다.)(56p)
…… 생물에게 독특한 점은 조직의 유일한 산물이 자기자신이라는 점, 곧 생성자와 생성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자기생성체계의 존재와 행위는 나눠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기생성조직의 특성이다.(60p)
예전에 ‘생물학적으로 나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나는 매일매일 변하는 내 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고 싶었다. 그리곤 쉽게 대답했던 것 같다. 그것은 나의 DNA라고. DNA이야말로 거의 변하지 않으며, 나라는 생명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니 뭔가 께름칙했다. 내가 ‘나는 DNA야’ 하는 순간, 나는 저절로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 되었다. 보존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를 잘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먹고, 자고, 싸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만나는,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리적 활동들이 나라는 동일성, DNA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가 무얼해도 나란 인간은 바뀔 수 없는 건가? 모두 DNA 손바닥 안이던가. -.-;; 물론 변하기 싫을 때가 훨씬 많지만^^;; 나에겐 그 변화의 가능성조차 차단돼 버린 것만 같았다.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 1946~)
『앎의 나무』에서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생명에 대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해를 통해 내 의문에 답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생명 탄생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지구의 역사에서 거의 무한히 신축적이고 복잡해질 수 있는 단백질과 같은 유기분자들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을’(63p) 즈음. 수많은 유기분자들이 각각의 화학적 친화력에 따라 일정한 형태로 얽히고 결합한다. 허나 그렇다고 이들이 생명인 건 아니다.
이 유기분자들의 그물망 속에서 어떤 생성이 일어난다. 유기분자들이 a-b-c-d-e로 뭉쳐 있다고 하면, 이 그물망 속에서 a,b,c,d,e 모두가 계속 생성되므로써, a-b-c-d-e의 관계가 유지된다. 그물망이 계속 생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 내적 관계다.
이런 과정은 단세포 생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물망으로써 단백질, DNA, 호르몬, 지방과 같은 걸 생성함으로써 자기 자신, 내적 구조를 끊임없이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정한 내적 관계를 지닌 하나의 그물망으로 존재한다. 이 생물체는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유기분자들의 그물망이다. 이렇게 자기가 자신(autos)을 생산하는(poiesis) 활동을 자기조직, 자기생성(autopoiesis)라 말한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렇게 자신이 자기를 생산하고 있는 하나의 그물망, 여러 분자들의 구조를 자기생성조직, 생명체라 말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자기생성의 운동이 바로 존재와 동시적이란 점이다. 어두운 밤에 막대불꽃을 동그랗게 돌려보자. 움직이는 불꽃은 빨간 원을 그린다. 만약 막대불꽃을 더 이상 돌리지 않는다면, 그 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은 존재와 같다. 생명체는 자기 자신을 생산함을 멈추는 순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생성하는 행위는 존재와 분리되지 않는다.
세포막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그것 속에는 세포라는 자기생성조직을 유지시키는 온갖 생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일부를 떼내어 호르몬을 만든다거나, 에너지를 생산한다든가, 세포전체를 위한 물질교환을 한다. 한편으로는 세포막은 안과 밖, 자신과 타자를 가른다. 하지만 세포막이 전체의 그물망 속에서 운동하기 전에 안과 밖이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 중에 있는 세포막을 통해 안과 밖, 존재와 그 밖의 것들이 생겨난다.
나는 그동안 나라는 개체 혹은 DNA가 먼저 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생명활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생명체‘가’ 활동한다고! 하지만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나와 정반대로 생각한다. 단지 지속적인 생성의 활동 혹은 운동으로 조직되는 구조가 바로 생명이라 말한다. 바로 운동하는 게 생명체다! 그들은 생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명관 속에서 DNA는 나의 본질이 아니었다. 또 변하지 않는 본질같은 것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나란 존재는 끊임없는 운동으로써, 세포, 단백질, 여러 소기관들이 일정한 내적 관계를 맺는 그물망으로 생겨날 뿐이다. DNA는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그 동안 나는 DNA를 그 그물 전체로부터 분리하여 마치 생명체의 전부인양 특권화시켰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키고, 잠을 자고 하는 일상의 모든 나의 활동들은 매번 나를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매번 비슷하지만. 그렇게 운동하기에, 그런 존재로 살아간다. 허나 우리는 언제나 거꾸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런 존재기에 그렇게 운동한다고. 하지만 그 반대다. 나는 태어났고 숙명적으로 나를 보존하기 위해 이렇게 운동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운동하는 존재였고, 앞으로 계속 운동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운동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는 다른 존재를 꿈꿀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주어서 운동하면 되니까. 언제나 생성 중인 나라는 그물망을 다르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이제 어떤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
글. 정철현(남산강학원)
두 개의 (또는 더 많은) 자기생성개체들이 각자 개체발생을 하는 가운데 서로 접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것들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재귀적(recursive)이거나 매우 안정된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체발생은 언제나 어떤 매질 안에서 일어나는데, 관찰자인 우리는 이 매질을 방사작용, 속도, 농도 등의 어떤 특별한 구조를 지닌 것으로 기술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자기생성개체도 어떤 특별한 구조를 지닌 것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개체와 환경의 재귀적 상호작용은 둘의 상호섭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환경의 구조는 자기생성개체의 구조에 변화를 유발할 뿐, 그것을 결정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체와 환경이 해체되지 않는 한, 이런 재귀적 상호작용은 구조변화를 서로 주고받는 역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조접속(structural coupli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90p)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을 들으면 늘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환경이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자연선택설에서 생물은 최대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적응에 성공한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도태된다. 그래서 환경이 삶과 죽음을 ‘선택’한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너무 무기력하게 그리는 것 같아 자연선택설의 도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생명들이 정말 이토록 무기력하다면, 인간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절대적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삶, 그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정말 생명이 이런 모습인 걸까, 무언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앎의 나무』는 생명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열어줘서 연신 와! 감탄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무지 어렵다^^;) 특히 환경과의 관계에서는 ‘구조접속’이라는 말로 풀어내는 부분이 나의 답답함을 날려주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생명과 환경은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동성이 내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겠구나.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들고 있는 예는 대기 중에 산소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처음 지구가 생겼을 때는 대기 중에 산소가 없었다. 대부분의 세포들은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마 환경이 절대적으로 정해져있다고 한다면, 초기 지구의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 35억년 전 쯤부터 세포들이 광합성을 시작했고, 그 결과 대기 중으로 산소가 조금씩 나오게 되었다. 오랜 세월지난 지금 대기 중 산소농도는 21%에 이른다. 세포들의 광합성 작용이 대기환경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세포들이 산소농도 21%를 맞추기 위해 광합성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대기의 산소농도는 계속해서 변해왔다. 산소농도가 30%에 육박하게 되니 자연스레 산소를 많이 소비하는 생물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농도가 낮아졌다. 반대로 산소농도가 10% 정도였던 때는 대멸종이 있었다. 그렇게 산소를 소비량이 줄어듬에 따라 다시 산소농도가 증가했다. 이처럼 산소농도는 대기환경과 생물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지금의 21% 농도 역시 생물과 대기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 것이고, 그와 함께 우리 또한 이 정도의 농도에서 살 수 있도록 진화했다. 21%도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것이다.
생물의 생사를 결정한다고 오해하는 ‘환경’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산소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수많은 생물들이 각자 작용한 결과, 21%의 산소농도를 가진 대기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환경도 수많은 생물들의 효과로 형성되었고 일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생물들의 관계망이 환경의 구조인 셈이다.
구조접속은 구조를 가진 두 개의 개체가 결합해서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생물들과 대기환경이 구조접속을 이루고 있다. 생물 쪽에서 변화가 생기면 이는 대기환경의 변화로 이어지고, 대기의 변화는 또 다시 생물들의 변화를 촉발한다. 그렇게 두 개체의 상호작용이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가 역동적으로 변화해간다.
그러므로 마투라나와 바렐라에게 고정된 환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리고 생명 또한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 자기 존재의 조건을 창조해간다. 이 역동적 관계야말로, 자연선택설이 주었던 답답함을 날려버렸던 것이다. ‘생명은 자기 삶의 조건을 스스로 형성해간다!’
사실 처음에 이 말이 굉장히 희망적으로 들렸다. 우리가 주어진 조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나쁜 행동을 하고 있으면 동시에 그 악을 키워내는 조건 또한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악한 행동은 악한 행동을 가능케 하는 인연과 조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섬뜩한 진실을 담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연선택설처럼 환경이 절대적 기준으로서 삶을 재단하는 것은 답답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구속을 원하기도 한다. 정해진 도덕규칙이나 법이 있으면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들이 없이, 우리 삶이 우리의 조건을 만들어간다고 할 때, 그때 비로소 삶과 행동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마 이것이 구조접속과 자기생성조직이 주는 의미가 아닐까.
글. 박영대(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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