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 자기 삶의 기준을 세우는 시간 (1)
박장금(하심당)
1. 배움,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기 위한 필요
“역사상 인간이 생존 시험이 아닌 학교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교실에서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은 없다.”(『고유지능』, 앵거스 플레처)
『고유지능』의 저자 앵거스 플레처가 던지는 오늘날 교육에 대한 비판은 충격적이다. 배울수록 성적 기계가 될 뿐,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무력해진다는 것. 그는 “학생들을 컴퓨터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컴퓨터가 잘할 만한 일을 하도록 훈련시킬 뿐, AI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지혜는 길러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의 교육 모델은 오랫동안 ‘컴퓨터 되기’에 가까웠다. 정답을 빠르게 찾고, 오류 없이 계산하며, 정해진 기준 안에서 높은 성과를 내는 인간 만들기. 그렇게 훈련된 인간은 결국 자신을 압도할 인공지능을 만들어냈고, 이제는 그 인공지능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인공지능의 역습 시대에 앵거스 플레처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결정적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그 차이는 ‘모른다’에 있다. 인간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인공지능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것. 아마도 인공지능의 환각, 즉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비도덕적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설계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패턴 안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생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과거의 경향과 축적된 정보를 조합해 빈틈을 메우고, 가능한 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결국 인공지능은 ‘정답 만들기’ 구조인 셈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 방식과도 닮아 있다. 성적을 위한 정답 맞히기 게임. 컴퓨터처럼 사고하도록 훈련받은 인간 역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기 쉽다. 무조건 정답을 맞혀 경쟁에서 이기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삶의 현장에 고정된 정답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앵거스 플레처는 우리의 교육이 “관계가 틀어졌을 때, 상사가 아무 것도 모를 때, 애써 세운 계획이 무너졌을 때 대처할 역량을 길러주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교실에서는 끊임없이 평가받는다고 느꼈고, 교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세상을 무섭고 낯설게만 느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주소다.

우리는 흔히 확신하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자기 의견이 분명한 사람, 흔들리지 않고 말하는 사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 말이다. 그러나 삶에서 정말 위험한 사람은 틀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더닝-크루거 효과라고 부른다. 능력이 부족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할 메타인지 자체가 낮아져 오히려 더 강한 확신에 빠지는 현상이다. 반대로 깊이 사유하는 사람은 쉽게 확신하지 않는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 그리고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논리가 발달해도 삶은 불확실하다. 인간은 낯선 상황 앞에서 멈칫하고, 관계 속에서 흔들리며, 실패 앞에서 절망하거나 자기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나는 정말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믿어온 기준은 정말 나의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인간만이 던질 수 있다. 우리가 없애고 싶어 하는 불안과 두려움 역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삶의 기준을 만들어가는 존재인 셈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흔들리는 삶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공자의 배움은 이와 연결된다. 공자에게 배움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었다. 배움을 통해 삶의 방향과 기준을 세우고, 혼란 속에서도 자신을 바로 세워가는 과정이었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자기 삶으로 검증하는 태도였다. 관대(冠帶)는 바로 이 지점과 연결된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시공간은 쉼 없이 출렁인다. 아무리 거대한 데이터와 정교한 논리로 분석한다 해도 변화하는 삶 전체를 통제할 수는 없다. 장생에서 목욕으로 이어지는 흐름 또한 그렇다. 생명은 태어나고, 세상과 부딪히며 흔들린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관대가 이어진다. 흔들림 속에서 삶의 기준과 형식을 세워가는 단계. 장생과 목욕이 보호 속에서 감각을 열어가는 과정이라면, 관대는 흔들리는 삶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자기 삶의 기준을 조직하는 단계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보호받는 존재로 머물 수 없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삶을 책임져야 한다.
자연 또한 그렇다. 관대는 진토(辰土)의 시기로, 봄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인월과 묘월 동안 솟아오른 생명은 더 이상 방향 없이 흔들리는 상태에 머물 수 없다. 싹은 줄기가 되고, 줄기는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진토는 안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힘을 붙잡아 형태와 구조로 조직하는 과정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감각만으로는 오래 살아갈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자기 언어, 자기 리듬, 자기 책임을 만들어가야 한다. 관대는 바로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자기 삶의 기준과 형식을 세워가는 시간인 것이다.
2. 관대, 우주적 스케일로 삶의 기준을 배우는 시간
관대(冠帶). 관(冠)은 머리에 쓰는 장식이고, 대(帶)는 허리에 두르는 띠다. 왜 인간은 성장의 한 단계를 ‘관대’라 불렀을까. 동양에서 사모관대는 단순한 예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 상태의 존재가 질서와 책임을 감당하는 인간으로 전환되는 상징이었다. 어린 시절의 천방지축인 몸을 지나, 이제 인간은 자기 삶의 기준과 방향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 목욕의 시기를 지나며 인간의 감각은 세계를 향해 열린다. 욕망은 활성화되고, 감정은 흔들리며, 세상은 강렬하게 다가온다. 쉽게 끌리고 쉽게 상처받는다. 그러나 인간은 흔들리는 감각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어느 순간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무엇이 내 삶에 유익한가.” 관대는 바로 이러한 질문과 마주하는 시기다.
만약 이런 질문 없이 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루돌프 슈타이너는 삶의 방향성을 배우지 못한 인간이 결국 감정의 노예가 된다고 보았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분노하고, 작은 자극에도 상처받으며, 인정 욕망과 피해의식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그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미성숙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통과하지 못한 결과로 보았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갈등하고, 상처받는 경험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한계를 마주하고 타인의 고통 또한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삶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슈타이너에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삶의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정신의 방향키를 잃지 않는 힘을 길러내는 과정이었다. 고통과 불편함을 제거하는 데만 몰두하는 사회는 오히려 자기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발도르프 교육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탄생했다.
이 지점은 공자가 말한 배움과도 깊이 연결된다. 공자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于學)”고 한 것은 단순히 공부를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혼란과 욕망 속에서도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배움에 자기 삶을 걸었다는 뜻에 가깝다. 청년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다. 무엇이 내 삶에 유익한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지 배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자기 충동을 조율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법을 익히며, 자기 형식과 언어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배움은 자연스럽게 극기복례(克己復禮)로 이어진다. 흔히 극기복례를 욕망을 억누르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정도로 이해하지만, 동양에서 예(禮)는 단순한 매너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심신을 조율하고 천지의 질서와 연결하는 기술에 가까웠다. 주역의 뇌천대장괘는 거대한 힘이 솟구칠수록 더욱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레와 하늘이 만나면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지만, 그 힘을 조율하지 못하면 오히려 스스로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극기복례란 결국 자기 힘과 욕망을 삶의 리듬 속에서 조율하는 기술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관대와 같은 예복은 단순한 옷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몸의 움직임과 호흡, 시선과 태도,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장치랄까. 관복을 입으면 함부로 걷기 어렵고, 몸의 속도와 말투 또한 달라진다. 인간은 형식을 통해 자기 몸의 리듬을 재조직 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의 가사와 승복, 샤먼의 의례복, 전사의 갑옷, 왕의 대관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인간을 이전과 다른 존재 상태로 전환시키는 장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신화와 통과의례 속에서도 반복된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의 성장을 익숙한 세계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통과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신화 속 영웅들은 늘 흔들린다. 유혹받고, 실패하고, 길을 잃는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을 통과하며 이전과 다른 존재로 변화해간다. 마치 모든 행성과 자연이 흔들림 속에서도 자기 궤도를 유지하듯이. 샤먼의 입문 의례, 전사의 갑옷 수여, 왕의 대관식, 승려의 수계 역시 모두 이전의 자신을 벗고 새로운 존재로 진입하는 과정이었다. 인류학자 아놀드 반 제넵 또한 인간의 변화를 분리, 경계, 통합이라는 세 단계로 설명했다. 기존의 삶에서 떨어져 나오고, 이전과 새로운 상태 사이를 통과한 뒤, 새로운 존재가 되어 공동체 안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 과정이 단순한 사회적 절차가 아니라 우주적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의 저서 『통과의례』에서 신화시대 인간들이 삶을 우주의 거대한 질서와 연결하려 했던 사유에 깊은 경외심을 보내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어쩌면 관대란 바로 이러한 감각을 배우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작은 개인이 아니라 우주적 리듬 속에 놓인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관대는 단순한 규율이나 억압의 단계가 아니다. 흔들리는 감각과 욕망을 삶의 형식으로 조직하며, 자기 삶의 리듬과 기준을 세워가는 과정이다. 목욕의 시기를 지나 인간은 이제 스스로의 방향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기에 관대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도달하는 단계가 아니다. 우주적 스케일의 질서를 배우고, 그 거대한 리듬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조직하며, 삶의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식적 선택의 과정이다. 그것은 우주 질서와의 계약이며, 공동체와의 약속이고, 자기 자신과 맺는 하나의 맹세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삶에서 무엇과 계약했는가. 무엇과 약속했는가. 어떤 맹세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

3. 흔들림 속에서 자기 삶의 기준을 세우는 힘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관계가 조금만 어긋나도 불안해한다. 상대의 무표정 하나만으로도 미움받고 있다고 느끼며, 인정받기 위해 자기감정과 욕망을 끊임없이 억누른다. 누군가는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핀다. 자기 삶보다 타인의 감정을 우선하며,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 앞에서도 거절하거나 맞서기보다 오히려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반대로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을 보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타인보다 세상을 더 잘 알고 있으며, 더 이상 속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냉소는 강해 보이지만, 상처받지 않기 위한 극도로 방어적인 태도일 때가 많다. 타인과 관계 맺는 고통, 실패와 실망의 흔들림을 회피하려는 또 다른 방어 전략인 셈이다.
왜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까. 인간은 어린 시절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생존 전략을 만든다. 돌봄을 받아야 하는 아이는 부모의 눈치를 살피고, 분위기를 맞추며, 상대의 기분을 먼저 읽는 법을 배운다. 문제는 그 전략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반복된다는 점이다. 관대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고통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삶 전체가 타인의 감정과 반응에 끌려다니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
내 삶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관대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세우는 시간!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돌아갈 기준을 만들어야 방향을 잃지 않고 잘 흔들릴 수가 있다. 두려움과 흔들림을 피해가지 않는 힘. 관계 속에서 상처받더라도 자기 삶의 방향을 잃지 않는 힘. 타인의 감정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힘 말이다. 『주역』의 뇌풍항괘에서 항상성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우레와 바람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오히려 항상성 유지가 가능하다. 우리 몸이 딱 그렇다. 몸이 36.5도라는 기준을 유지하는 건 외부 환경과 끊임없이 관계 맺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성이란 변화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기준이다. 관대는 바로 신체의 온도처럼 기운을 만드는 시간이다. 공동체 안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자기 욕망 앞에서도 인간은 계속 흔들린다. 중요한 것은 흔들림 자체가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생명이 유지되는 기준을 세우는 능력이다.
독립 이후 나도 이 과정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공부 공간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관계를 맺으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았다. 기준이 없으니 공간은 쉽게 흔들렸다. 연구 공간은 어느 순간 친목 공간이 되고, 자기 삶을 탐구하는 공부는 정보 소비로 바뀌며, 수행은 인정 욕망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그 과정에서 내 안의 욕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많이 모으고 싶은 마음, 편한 관계 속에서 좋은 게 좋은 것처럼 흘러가고 싶은 마음, 확장과 안정에 대한 탐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왜 독립했는가” 그리고 “나는 왜 공부하는가” 그리고 “난 왜 사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질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 고민 끝에 ‘비전과 윤리’가 세워졌다. 난 모든 프로그램 시작 전에 이것을 읽고 시작한다. 우리가 왜 모였는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기준이 중요하다. 기준이 없으면 탐진치의 함정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돌아보면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의 나는 이익과 효율의 기준 안에서 살아왔다. 남들보다 더 잘해야 했고, 더 인정받아야 했으며, 더 안정된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삶이 견딜 수 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것은 바로 기준을 세우라는 몸이 주는 메시지, 관대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눈앞의 이익보다 삶 전체의 방향을 질문하라는 시간이자 기회였던 것!
공자가 열다섯에 말한 지우학(志于學)을 나는 삶의 중반부에서야 비로소 마주한 것이다. 그것은 공부와 함께 시작됐다. 그렇다. 자기 삶을 잘 살아가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기존의 기준과 욕망,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을 바라보는 기준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가”를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관대는 바로 그 질문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삶의 방향인가를 스스로 묻기 시작하는 시간. 흔들리지 않기 위해 타인을 통제하거나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돌아올 기준을 세워가는 시간. 이것이 관대의 시간이다. 관대는 흔들림이 끝난 상태가 아니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자기 삶의 방향으로 돌아오는 힘을 배우는 시간이다. 타인의 욕망과 세상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하는 시간. 관대는 바로 그 첫 번째 기준이 세워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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