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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갑자와 12운성

[60갑자와 12운성] 목욕, 세계에 노출된 존재 (1)― 감각이 열리고 흔들림을 통과하는 시간

by 북드라망 2026. 4. 27.

목욕, 세계에 노출된 존재 (1)
― 감각이 열리고 흔들림을 통과하는 시간

박장금(하심당)



1. 목욕, 보호에서 벗어나, 세상과 부딪히는 시간

“이제는 많은 아이가 자연, 놀이, 음악, 언어에 대한 첫 경험을 스크린 등 기술을 통해 매개되는 세상에서 자라고 있다. 그들의 장난감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반응을 기록한다. 베이비 모니터는 그들을 지켜본다. 기기는 그들을 추적하고 모니터링 한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온라인 아이디와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만든다. (중략) 기술 회사들이 말하듯 그곳은 가능성의 세계이며, 애플 광고 슬로건이 약속하듯 ‘자동적이고 수월하며 매끄러운’ 곳이다. 이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다. 과연 여기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인가?”(『경험의 멸종』, 크리스틴 로젠, 어크로스, p.46)


우리 시대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기기에 노출된다. 출생은 사진으로 기록되고, 울음을 터뜨리면 스마트폰이 쥐어진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곧 울음을 멈춘다. 디지털 기기가 아이의 주의를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렇듯 인간이 세계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 엄마와 관계를 맺고 세상과 부딪히기도 전에, 아이는 먼저 이미지로 기록되고 데이터로 저장된다. 『경험의 멸종』의 저자 크리스틴 로젠은 이 시대를 ‘경험이 멸종되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경험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기술이 제공하는 쾌락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 기업이 파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 경험은 몸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매개된 형태로 소비된다. 그 결과 공감 능력은 약해지고, 타자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도 카메라를 먼저 든다는 뉴스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맹자는 길을 가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면 누구나 놀라고, 가엾게 여기며, 구하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그 말을 쉽게 믿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기술의 발달이 치르는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생명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해온 인간의 감각과 본성이 빠르게 무력화될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은 그만큼 은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요괴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외주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다시 아이로 돌아가 보자. 아이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만지고, 부딪히고, 놀라고, 울고, 그 과정을 생략해도 되는 걸까. 장생에 이어지는 ‘목욕’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장생이 존재의 드러남이라면, 목욕은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노출되는 시간이다. 장생의 시기, 아이는 어머니의 보호 속에 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 아이에게는 아직 분리의 감각이 없다. 조지프 캠벨이 말하듯, 이 시기의 안정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에 ‘나’와 ‘세계’는 아직 나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어느 순간, 분리가 시작된다. 엄마와 내가 다른 존재라는 감각이 생겨나는 순간, 아이는 행복뿐 아니라 두려움과 낯섦을 함께 경험하기 때문이다. 보호막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세상은 직접 마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아이는 이제 엄마를 벗어나, 세상에 노출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기에 이른다.

 

 


자연의 흐름도 다르지 않다. 인월에는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 움직임은 아직 땅속에 가까운 보호된 움직임이다. 그러나 묘월이 되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생명은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싹은 햇빛과 바람, 비와 서리를 그대로 맞아야 한다. 연약한 잎은 쉽게 흔들리고, 가느다란 줄기는 위태롭다. 이것이 노출된 생의 운명이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떤 생명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남산의 오래된 은행나무 또한 한때는 연약한 새싹이었을 것이다. 12운성에서 목욕은 장생의 보호 상태를 벗어나 세상에 노출되기 시작한 상태를 의미한다. 햇빛을 그대로 받고,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비와 서리를 피하지 못하는 시간. 그 속에서 감각이 열린다. 『감각의 박물학』에서 다이앤 애커먼은 말한다. “감각이라는 레이더망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 목욕은 인간이 세상과 처음으로 접촉하며, 감각을 통해 세계와 만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경험의 멸종 시대에, 목욕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감각의 열림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감각을 회피하고 있는가.

 


2. 경험 속에서 인간이 되는 과정
목욕은 깨끗해지는 시간이 아니다. 세상과 섞이기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질서한 혼합이 아니다. 나와 세계의 경계가 생기기 시작하지만, 그 경계는 아직 고정되지 않았다. 말랑한 찰흙처럼 흔들리고, 변형되는 상태다. 섞이기 위해서는 기꺼이 구부러지고 물러나야 한다. 그 변형은 결코 쉽지 않다. 안과 밖이 뒤섞이고, 보호받던 감각은 무너지며, 새로운 자극이 몸 안으로 밀려든다.


아이는 이때 처음으로 세상을 ‘몸으로’ 경험한다. 부딪히고, 놀라고, 울고, 피할 수 없기에 매번 다시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반복하며 자신과 세계의 경계를 배워간다. 목욕은 장생의 보호와 안정의 시간을 지나, 세상과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다. 이미 태어났지만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상태, 세상과 만났지만 그것을 감당할 힘을 연습해야 하는 시기다. 그래서 이 시간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방향은 없고, 감각은 열려 있지만 그것을 해석할 경험은 아직 부족하다. 우리는 이 상태를 피하고 싶어 한다. 불안정하고, 위험하며, 감당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을 기술과 자본은 정확히 파고든다. 첨단 기술은 ‘가상 경험’을 제공한다. 충돌은 줄이고, 감각은 조절하며, 경험을 매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덜 놀라고, 덜 아프고, 덜 흔들리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난다. 유튜브와 각종 체험 콘텐츠를 소비하며 마치 경험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몸을 통과한 경험이 아니다. 『경험의 멸종』의 저자 크리스틴 로젠은 이를 ‘가짜 경험’이라 부른다. 그는 지리학자 이푸 투안의 말을 빌려 경험이란 낯선 곳으로 나아가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위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sns에 공유하고 그것을 즐기는 게 어떻게 경험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생명의 성장은 세상에 노출되는 과정, 불확실성과 위험 감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감각이 열리는 시간이자, 나와 세계가 분리되는 고통을 체감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목욕의 시기는 알려준다. 노출, 고통, 흔들림은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통과해야만 싹은 나무로 자랄 수 있다고. 


왜 이 과정을 ‘목욕’이라 했을까. 목욕(沐浴)은 물로 씻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씻음은 단순한 정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내가 무너지는 경험’이다. 신화에서 물은 죽음과 재탄생의 상징이다. 기존의 형태가 해체되고, 다른 감각이 열리며, 새로운 세계가 밀려온다. 그래서 목욕은 이전 상태를 씻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도착이 아니다. 아직 통과가 끝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존재가 완성된 것도 아니다. 그저 다른 세계를 만나기 시작한 상태다. 이 시간에는 감각이 먼저 열리고 의미는 나중에 따라온다. 물에 들어가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물이 몸에 닿고, 피부가 반응하며, 몸이 먼저 안다. 이해는 그 다음에 온다. 그래서 목욕은 이해의 시간, 논리의 시간이 아니라 감각의 시간이다. 먼저 닿고, 먼저 스며들고,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의미는 그 다음에 온다. 솔직히 이 시기에는 잘 정리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몸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의 시기에는 충분히 세상에 노출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움직이며 그 경험을 담을 구조, 몸이 만들어진다. 뇌과학은 말한다. 빛을 본 뒤 시각이 정교해지고, 소리를 들은 뒤 청각이 분화되며, 몸을 움직인 뒤 공간 감각이 형성된다고. 몸은 이미 알고 있고, 의미는 그 뒤에 따라온다. 동양 의학에서도 아이를 완성된 존재로 보지 않는다. 아직 형태가 굳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본다. 오장육부는 완성되지 않았고, 몸은 끊임없이 변하며, 균형은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 불안정성이 성장의 조건이다. 아이는 세상과 접촉하면서 조금씩 몸을 만들어간다. 낯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낯선 음식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기운과 만난다. 그 과정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토하고, 아프고, 울면서 통과한다. 그러나 바로 그 과정을 통해 몸은 스스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아이의 아픔은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경험이 사라진 시대는 단순히 성장이 멈춘 시대를 넘어, 인간을 인간으로 형성하지 못하는 위험한 시대다. 『감각의 박물학』의 저자 다이앤 애커먼은 말한다. 감각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개인을 세계와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통로이며,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와 만날 수 있다고. 그러나 그 만남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감각의 열림은 우리를 흔들고, 낯선 곳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감각이 열리는 목욕의 시기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상태를 문제로 여긴다. “왜 이렇게 불안정하지?” “왜 이렇게 예민하지?” 그러나 이 불안정성은 결핍이 아니라 과정이다. 만약 이 과정을 생략한다면, 만지지 않아도 되고, 부딪히지 않아도 되며, 아프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펼쳐진다. 이미 가공된 이미지와 정보로 세상을 대신 경험하는 삶. 그곳에는 흔들림도 없고 고통도 없다. 그러나 그곳에는 성장도 없다. 목욕의 시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경험은 대체될 수 없다고. 세상은 직접 만나야 하고, 감각은 몸으로 겪어야 하며, 생명은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고.

 

 


3.  흔들림, 감각이 열릴 때 시작되는 변화 
목욕의 시간은 어지럽다. 세상과 접촉하는 순간, 감각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 감각을 통해 낯선 자극들이 밀려들고, 인간은 흔들린다. 흔들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감각이 열렸다는 신호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이 흔들림을 불안정한 상태로 이해하고, 그것을 줄이거나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목욕의 시간에서 흔들림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다.


독립 이후,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상태를 겪어야 했다. 감이당에서의 시간은 보호 속에 있었다. 장생의 시간이라 할까. 스승의 그늘 아래에서 나는 온전히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심당에서의 삶은 달랐다. 모든 관계를 직접 감당해야 했고, 모든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광야에 서 있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한 번도 세상에 온전히 노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 보호는 끝났고, 감각은 열렸으며, 세상은 그대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상태. 12운성 중 ‘목욕’의 시간이 온 것이다. 


낯선 감각들이 연속해서 밀려왔다. 관계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사람들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며, 감정은 쉽게 흔들렸다. 감당하기 어려울 때면 모든 것을 접고 싶기도 했다. “내가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뭔데 여기까지 개입해야 하지.” 생각은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모든 생각은 나를 중심에 둔 반응이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삶은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고집스러웠던가. 부모와 스승, 도반들은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려주었는가. 그 기다림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식의 개입을 통해,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흔들림 또한 나를 구부리고 내려놓으면서 넘어야 할 시간임을 이해하게 된다. 고정된 나를 해체해야 하는 또 하나의 국면, ‘목욕’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목욕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요즘 내가 나 같지 않아.” “괜히 예민해진 것 같아.” “왜 이렇게 마음이 들쭉날쭉하지?” 이 변화는 대부분 문제로 여겨진다. 감정은 쉽게 흔들리고, 사람의 말과 시선에 민감해지며,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상태를 왜곡하기 쉽다. 다시 단단해지려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흔들림은 무너짐이 아니다. 감각이 열리는 신호다. 그동안 안쪽에 머물던 감각이 바깥과 직접 접촉하기 시작하고, 그 자극이 그대로 몸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삶은 갑자기 시끄러워진다. 사소한 말이 크게 들리고, 작은 표정이 오래 남고, 하루의 기분이 요동친다. 이때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약해진 걸까.”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 반대다. 새로운 감각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 빅터 터너는 『의례의 과정』에서 이 상태를 ‘리미널 상태’라고 불렀다. 이전의 나도 아니고, 새로운 나도 아닌 상태. 완전히 열려 있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목욕의 시간에는 느끼지만 결정하지 못하고, 반응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상태가 반복된다. 이때 사람은 자신을 서둘러 규정하려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건 나랑 맞지 않아.” 그러나 이 시기는 정체성이 아직 굳지 않은 상태다. 이때 자신을 고정시키면 감각은 더 크게 흔들린다. 그래서 목욕에서 필요한 것은, 안정되기 위해 서둘러 규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흔들림의 시간을 수용하는 유연함이다. 지금의 반응을 자책하지 않는 것, 흔들리는 감각을 곧바로 해석하지 않는 것. 하심당 독립 이후 겪는 갈등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두 발로 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목욕의 과정이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낯선 것들을 소화해내는 감각이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의 시대는 이 감각을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끊임없이 노출되고, 끊임없이 비교되며, 끊임없이 반응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과잉된 감각 속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중심이 없지?” 그러나 목욕은 말한다. 지금의 흔들림은 결함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묘목의 생이 햇빛과 바람을 피할 수 없듯, 목욕의 인간도 세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목욕의 시기에는 질문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흔들리면서 감각을 넓힐 것인가.” 사람들은 목욕을 깨끗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욕의 물속은 맑고 고요한 곳이 아니다. 감각과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는 자리다. 그 물속을 통과할 때, 비로소 무엇인가가 씻긴다. 씻음은 안정이 아니라 통과다. 지금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감정이 이전과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지금 감각이 열리는 시간, 목욕의 물속에 들어와 있는 중이다.

 




*다음주에 목욕의 기질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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