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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갑자와 12운성

[60갑자와 12운성] 운명은 파동이다— 60갑자와 12운성, 운명의 해상도를 높이다

by 북드라망 2026. 2. 27.
<하심당>의 박장금 선생님이 '60갑자와 12운성'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십니다. 

60갑자와 12운성을 통해 "운명의 해상도"를 높이고 싶으신 분들, 삶에 대한 고민이 깊은 분들은 모두 이 연재를 주목해 주세요. 12운성(장생, 목욕, 관대, 건록, 제왕, 쇠, 병, 사, 묘, 절, 태, 양)은 "인간 생명의 에너지 변화 과정을 해상도 높게 보여주는 구조"라고 말씀하시는 장금샘의 안내에 따라 운명에 대해 좀더 선명한 인식을 가져가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운명은 파동이다
— 60갑자와 12운성, 운명의 해상도를 높이다

박장금(하심당)


나는 크게 ‘세 번의 삶’을 산 것 같다. 사회가 주입한 궤도를 따라 달리던 삶, 공동체 속에서 세계를 새롭게 배운 삶, 그리고 <하심당>으로 독립한 이후의 삶. 첫 번째 삶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았다. 두 번째 삶은 우연히 들은 강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세 번째 삶은 내가 선택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건 속에서 열렸다. 12운성과 60갑자를 써야 하는 지금, 나는 그 전환의 과정을 공유하며 왜 이 글을 쓰는지 말하고자 한다.

1. 세 번의 삶
두 번째 삶의 전환은 2005년, 우연히 한 강의를 들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내가 얼마나 좁은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와 세계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유의 빛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래, 내가 있을 곳은 여기야.” 전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나를 존중하는 삶의 가능성이 나를 공동체로 이끌었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나는 교수들을 꿈꾸던 이들이 모여 있던 지성의 산실, 지식인 공동체 <수유+너머>에 겁도 없이 접속했다. 어린아이처럼 알고 싶었다. 자기계발이 아니라 철학, 사회과학, 동양고전, 예술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공부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 이익을 위한 조직에서 일만 하던 내게 공동체적 삶은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 무렵 나는 정규직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심신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과 명리학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가왔다. 내가 어떻게 기운을 쓰는지, 왜 몸이 망가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공부에 접속하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자기계발서와 신문만 겨우 읽던 내가 동서양의 고전을 종횡무진 읽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수유+너머>는 해체되었고 인문의역학연구소 <감이당>이 시작되었다. 회사를 그만둔 백수였던 나는 어느새 <감이당> 런칭 멤버가 되어 있었다. <감이당>을 시작할 때는 과연 누가 올까 싶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열기만 하면 자신의 운명과 몸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가 답답했듯이 저들도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알고 싶겠구나.” 어느덧 나는 <감이당>의 주술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기획의 중심에는 고미숙 선생님이 있었지만, 시작부터 나를 거치지 않은 프로그램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매니저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왔다. 그 시절의 기록이 2017년에 출간한 『다르게 살고 싶다』이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의 궤도에서 내려와 생명의 시선으로 나와 세계를 바라보게 된 전환의 이야기. 직장인의 삶에서 명리학적 관점으로 방향을 틀었던 기록이었다. 그때 나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후 나는 명리와 동의보감의 출발점이 궁금해졌다. 동양고전을 탐독하며 그 기원과 원리를 추적했다. 그 결과 천간과 지지가 동아시아 사유의 핵심이자 생명의 코드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북드라망의 제안으로 2023년 『간지서당』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 작업은 계절과 기운, 음양과 오행의 질서 속에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시도였다. 그 책을 쓰며 나는 확신했다. 생명의 원리는 인간 마음의 원초적 구조와 다르지 않다는 것. 자연은 무작위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리듬을 타는 존재라는 것. 그러나 그 원리는 내 삶에서 매끄럽게 작동하지 않았다. 앎과 삶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수유+너머> 4년, <감이당> 15년. 공부와 관계, 갈등과 성장, 오해와 신뢰가 교차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자랐지만, 안정되기보다는 더 흔들렸다. 어느 순간 나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어 있었다. 억울했고, 원망스러웠다. “19년 동안 그렇게 문제가 많았다면 왜 그동안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걸까?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뭐가 문제인 걸까?” 그런 생각 속에서 공동체 활동은 막을 내렸다. 지금은 안다. 19년이 지났는데도 달라지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공동체로의 전환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그 삶을 정답처럼 여겼다. <감이당>에서 뼈를 묻을 줄 알았다. 독립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23년 12월 25일, 나는 독립 이벤트를 열었고 <하심당>에서 2년을 보내고 올해 3년째를 맞고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내 의지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환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 나는 운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명리학으로 운의 변화를 말해왔지만, 변화를 몸으로 감각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자주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만 모르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나는 오랫동안 내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믿어왔다. 더 노력하면 더 나은 자리에 갈 수 있고, 더 잘 판단하면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둔 것도, 공동체로 들어간 것도, 독립을 감행한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나의 결단이라 여겼다. 그러나 내 삶은 혼돈에 가까웠다. 과거의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 팔자는 왜 이렇게 기구한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 나만 불행한 듯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가 그렇듯, 남들도 나를 보면 별일 없이 산다고 느낀다는 것을. 다시 질문해본다. 만약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가슴을 쓸어내린다. 솔직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

 


2. 사건은 축적의 폭발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 의지로 산다고 믿어왔다. 더 많이 노력하면, 더 잘 판단하면, 더 치밀하게 준비하면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나만의 감각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고, 자기계발을 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애쓴다. 마치 삶을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다룬다. 회사를 그만둔 일도, 공동체로 들어간 일도, 어느 정도는 내 의지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심당 독립은 달랐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남고 싶었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고, 설득하고 싶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피할 수 없는 흐름 앞에서 벌어진 결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순간’이었다. 그는 사건이 주체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흐름이 모여 어느 순간 폭발하듯 일어난다고 보았다. 사건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무르익은 시절이 나를 통과하며 드러난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전환은 모두 그랬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전환의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몸이 먼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규직 스트레스에 심신은 이미 망가져 있었고, 다른 삶과 접속할 준비가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결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쌓여온 것들이 한계점에 도달해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공동체에서의 19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구원처럼 느껴졌고 배움은 황홀했다. 공동체적 전환은 혁명처럼 다가왔기에 다른 삶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결은 달라졌고, 나의 위치와 역할도 변해갔다. 다만 그 변화를 ‘나만’ 알아채지 못했다. 내 의식만 멈춰 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외면했던 것이다.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축적되고, 감정이 응축되고, 관계의 밀도가 바뀌고, 내 안의 리듬이 이동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나는 그 지점을 사건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흐름의 정점에 올라탔을 뿐이었다. 『주역』에서 말하듯, 천지의 기운이 움직이다가 때가 되면 비가 내리는 것과도 같다. 사건은 내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천지의 흐름에 내가 온몸으로 참여하며 드러나는 일이다. 메시아적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흐름을 이해하고 체감하는 자만이 모든 순간을 구원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침 그 무렵, 나는 신화 세미나에서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를 읽고 있었다. 그중 한 비유가 깊이 꽂혔다. 라마크리슈나는 “환생하는 단자는 바다로 들어간 소금 인형처럼 해체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이 바다는 우주적 자아의 바다이며, 무(無)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세상이 바다라면, 나는 그 안에서 서서히 녹으며 형태를 바꾸는 존재일 것이다. 회사의 삶도, 공동체의 삶도, <하심당>의 시간도 내가 설계한 구조물이 아니라 바다의 물결 속에서 잠시 형상을 띠었다가 다시 녹아드는 과정일 뿐이다. 소금 인형이 자기 인식을 지닌 채 바다에 들어간다면, 아마 형태를 유지하려 발버둥 칠 것이다. 그러나 바다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고 믿는 순간, 천천히 녹임을 당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발끝부터, 손끝부터 조금씩. 해체되는 자유. 이미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된 과정을 인정하는 자유. “나도 소금 인형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난 “이제 애쓸 필요가 없구나. 삶이란 매 순간 소금 인형처럼 바다와 하나가 되는 일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나면 인과를 따진다. 내가 잘못했는지, 누가 문제였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자책하거나 원망한다. 그러나 사건을 ‘축적의 폭발’로 본다면 관점은 달라진다. 그것은 실패도, 배신도, 우연도 아니다. 하나의 국면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일 뿐이다. 독립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의지의 결과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과 관계, 사유와 몸의 변화가 하나의 방향으로 터져 나온 결과이자 과정 중 한 부분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건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사건을 통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의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결과를 만드는 힘이 아니라, 흐름의 방향을 잡는 힘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소금 인형의 비유는 낯설지 않다. 인간과 자연의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동의보감과 명리학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통찰은 동양 사유와 만날 때 더 선명해진다. 난 『간지서당』을 쓰며 10개와 12개의 생명의 리듬을 확인했었다. 이제, 운명의 해상도를 더욱 높일 때가 온 것이다. 

 


3. 60갑자와 12운성, 운명의 심층 파동 구조
나는 과거 시간을 숫자로 이해했다. 몇 살에 무엇을 했는지, 몇 년을 어디에서 보냈는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언제 전환이 일어났는지. 시간은 균등하게 흐르는 직선이라고 믿었다. 어제와 오늘은 하루 차이이고, 올해와 내년은 1년 차이일 뿐이라 생각했다. 나는 내 삶을 숫자로 계산했다. 예컨대, 공동체에서 19년, 하심당에서 2년, 첫 직장에서 몇 년. 그러나 시간은 균질하지 않았다. 어떤 1년은 숨 막히게 길었고, 어떤 10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어떤 하루는 인생을 바꿨고, 어떤 몇 해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흘러갔다. 시간은 동일한 단위처럼 보였지만, 그 밀도는 전혀 같지 않았다. 


동아시아 자연철학에서 시간은 동등하지 않다. 육십갑자는 60개의 시간 단위를 통해 시간에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연도 표기가 아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천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지지가 만나 하나의 시공간을 형성한다. 그 만남은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기운의 결합이다. 예를 들어 ‘병오년’은 2026년이라는 숫자를 대체하는 표기가 아니다. 두 개의 불기운이 만나 시절을 팽창시키는 파동이다. 확장, 노출, 분출의 시절. 숫자로 보면 모든 해는 동일하게 1년이지만, 60갑자의 관점에서 보면 해마다 전혀 다른 진동을 지닌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숫자의 시간 속에서는 우리는 비교한다. “왜 나는 이 나이에 이것밖에 못했지?” “왜 저 사람은 나보다 앞서 있지?” 그러나 파동의 시간을 타면 질문이 달라진다. “지금은 확장의 시절인가, 응축의 시절인가?” “지금은 드러나는 파동인가, 잠복하는 파동인가?” 그때 우리는 때에 맞게 활동하고, 때에 맞게 멈춘다. 60갑자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말한 ‘세 번의 삶’은 확장과 응집, 정점과 흔들림이 교차한 복합적 파동의 연속이었다. <하심당> 독립 역시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동해온 파동이 한 지점에서 분출된 결과였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파도처럼 오르고 내린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듯 확장과 수축이 반복된다. 어떤 시절은 봄과 여름처럼 밖으로 팽창하고, 어떤 시절은 가을과 겨울처럼 안으로 수축한다.


근대적 교육을 받은 우리는 수축을 퇴보로 해석한다. 그러나 자연의 시간에서 수축은 다음 확장을 준비하는 리듬이다. 이 원리를 체감하게 되면서 내 안의 두려움은 조금씩 옅어졌다. 시간은 나를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나를 통과하는 진동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60갑자는 그 진동을 읽는 언어다. 숫자의 시간에서 벗어나 파동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그 파동은 단지 한 해의 시공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한 인간의 생애 주기, 우주의 확장과 수축, 자연의 시작과 해체, 사건의 기승전결까지 포함한다.


60갑자가 시공간의 파동이라면, 12운성은 그 파동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보여주는 구조다. 우리는 흔히 삶을 ‘생노병사’ 네 단계로 말한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는 단순한 도식. 그러나 삶은 그렇게 평면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을 보라. 싹이 트는 순간이 있고, 줄기가 뻗는 시간이 있고, 꽃이 피는 시절이 있고, 열매를 맺는 국면이 있으며, 기운이 기울고, 응축되고, 사라지는 시절이 있다. 이 복합적 과정을 인간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12단계로 세분화한 것이 12운성이다. 장생, 목욕, 관대, 건록, 제왕, 쇠, 병, 사, 묘, 절, 태, 양. 그것은 인간 생명의 에너지 변화 과정을 해상도 높게 보여주는 구조다. 삶의 시간표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시간표이고, 각자의 기질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까지 드러내는 지도다.  예컨대 장생은 태어남의 문이다. 아직 미약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관대와 건록은 사회로 나아가는 시절이다. 자리를 잡고, 역할을 얻고, 자신을 확장한다. 제왕은 정점이다. 내가 선택했고, 내가 이루었고, 내가 주도한다고 느끼는 시절. 현대인은 특히 이 구간을 삶의 전부처럼 여긴다. 성취와 상승이 곧 성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제왕 이후에는 쇠가 온다. 병이 오고, 사가 오고, 절이 온다. 관계는 줄어들고, 역할은 바뀌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이때 우리는 흔들린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자책한다. 그러나 12운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국면의 이동이다. 파동의 구조에서 확장과 수축은 한 쌍이다. 생성과 소멸은 서로를 준비한다. 가을이 있어야 겨울이 오고, 겨울이 있어야 다시 싹이 튼다. 그래서 모든 것이 끊어진 듯 보이는 절의 시절은 끝이 아니라 응축이다. 


 나는 공동체를 떠날 때 그것을 실패로 여겼다. 관계의 파탄, 나의 한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절’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절은 끊어짐의 자리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기운이 응축되는 흐름이다. 겉으로는 멈춘 듯 보이지만, 안에서는 다음 생을 준비하는 힘이 모인다. 그 시간을 통과하지 않았다면 하심당이라는 새로운 국면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12운성은 모든 과정을 긍정한다. 성공도 리듬이고, 무너짐도 과정이다. 생과 사를 직선으로 보지 않는다. 탄생은 죽음에서 다시 시작되고, 죽음은 또 다른 응축의 문이 된다. 우리는 사회적 죽음도 경험한다. 관계가 끊기고, 역할이 사라지고, 정체성이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리듬의 전환점이다. 그 안에는 확장의 환희도, 수축의 고요도, 해체의 두려움도, 다시 태어나는 설렘도 함께 들어 있다. 이렇듯 12운성은 그 파동이 인간 생애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각자의 기질 속에 그 기운이 어떻게 새겨져 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한 이후, 나는 내 기질을 다르게 보게 되었고 삶의 전환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구성하게 되었다. 60갑자와 12운성은 운명이 움직이는 방식을 보여주는 정교한 지도다. 보물 지도가 따로 없다. 이 지도를 손에 쥐는 순간, 자신을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책과 남 탓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질문이 바뀐다.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의 선택을 믿자.”그리고 “지금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4.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
나는 그동안 운명을, 변화를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독립의 과정에서 크게 흔들렸다. 자책했고, 원망했고, 끊임없이 설명하려 했다. 그때 깨달았다.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과 태도라는 것을. 이것은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앎이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실천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실천은 내가 내 삶을 사랑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내가 소중하듯 모든 존재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자책과 남 탓을 멈출 때. 그때 마다 그 문턱을 넘게 해준 언어가 나에게는 12운성과 60갑자였다.


그것은 나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고, 운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해상도가 매우 높은 지도였다. 확장도 과정이고, 수축도 과정이며, 해체조차 다음을 준비하는 리듬이라는 관점. 그리고 매 순간을 수용하는 태도의 전환. 이제 나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지금은 어떤 국면일까?”라고 질문한다. 그 질문의 변화는 나에게 자유를 주었다. 자책은 줄어들었고, 원망은 사라졌으며, 시절을 읽는 감각이 생겼다. 요즘 우리는 끊임없는 비교 속에 놓여 있다. 속도, 성취, 지위, 관계, 확장. 조금만 흔들려도 뒤처진 듯 느끼고, 잠시 멈추기만 해도 실패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지금이 쇠의 시간인지, 절의 시간인지, 혹은 장생의 문턱인지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삶의 흔들림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될 것이다. 어떤 전제도 없이, 삶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12운성과 60갑자를 이해할 때, 운명을 사랑하는 길이 열린다고.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내가 누린 자유를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또 한 걸음 내딛기 위해. 문득 제인 버킨의 말이 떠오른다. “누가 순탄한 인생을 원하겠어요. 그건 의미가 없어요. 저는 오히려 굴곡진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조금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나는 기꺼이 굴곡진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12운성과 60갑자를 쓴다. 다가올 나와 너의 환갑을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맞이할 우리의 삶을 위하여. 영원히 지속될 자연과 우주의 바다를 유영할 소금 인형들을 위하여.
 


● 다음 달부터 장생을 시작으로 12운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재를 12달 동안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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