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의 흑역사, 여성 차별적인 팔경법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인 인상이나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마십시오. … 이러한 것들은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인들이여, 그 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
붓다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초기에 붓다를 따르는 출가수행자들은 모두 남자들 뿐이었다. 여성은 다만 재가 신자로만 붓다와 관계를 맺었다. 아마 당시로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명상하고, 집도 절도 없이 걸식하는 길 위의 삶을 사는 여성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가족의 보호 밖에 있는 여성은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성적인 대상이자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의 설법을 듣고 구도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남자들이 나온 것처럼 출가하여 수행자로 살겠다는 용감한 여자들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붓다가 이끄는 비구 승가는 세속에서의 신분과 나이에 의한 차별을 뛰어넘어 오직 출가한 햇수에 따라 예를 표하는 평등한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승가의 현존은 여성들에게도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을 터. 과연 누가 출가한 여성 수행자로 첫발을 뗄 것인가, 오직 그것이 문제였다.
최초의 여성 출가자, 마하빠자빠띠
붓다는 오비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들에게 가서 설법했고, 숲속을 헤매는 야사를 불러 출가의 마음을 일으켰다. 붓다는 이 사람들로 승가를 조직했다. 그런데 여성의 출가는 달랐다. 먼저 여성의 출가를 원한 것은 붓다도 아니었고 비구승가도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들 자신으로부터 왔다.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최초의 여성은 붓다의 양모인 마하빠자빠띠였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한 이래 붓다의 아버지 슛도다나왕과 양모는 충실한 재가 제자이자 후원자로 살았다. 붓다의 아버지가 죽은 뒤 마하빠자빠띠는 안락한 왕궁의 삶을 버리고 출가 수행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붓다는 그녀의 출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계를 지키며 집에서 수행할 것을 권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마하빠자빠띠의 결심은 확고했다. 붓다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그녀는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길 위에 섰다. 출가의 뜻을 같이 하는 여성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하빠자빠띠는 먼 길을 걸어 발이 부르트고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붓다를 찾아왔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아난다는 붓다를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여인들이 세존의 법에 들어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흐름에 든 경지나(예류자), 한 번 돌아오는 경지(일래자)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불환자)나, 거룩한 경지(아라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율장』)
여성들은 출가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붓다는 여성도 출가하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난다는 마하빠자빠띠의 공덕과 성품을 찬탄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싯다르타를 사랑으로 키운 자애로운 양어머니였던 것이다. 아난다의 설득 덕분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하빠자빠띠의 굳은 의지 때문이었을까? 결국 붓다는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런데 그 허락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팔경법(八敬法)이라는 조건이었다. 마하빠자빠띠는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불교 역사상 첫번째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를 따라온 여성들도 팔경법에 따라 출가의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써 비구니 승가가 만들어졌다.
여성 출가의 조건, 팔경법
붓다가 제시한 팔경법은 여성 출가자와 남성 출가자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출가한 지 100년 된 비구니라 하더라도 방금 출가한 신참 비구에게 무조건 예를 표해야 한다. 2. 우기의 안거 기간에 비구니는 비구가 있는 곳에서 안거해야 한다. 3.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4. 안거를 마친 후 비구니는 비구 승가 앞에서도 참회해야 한다. 5. 팔경법을 어기면 참회해야 한다. 6. 비구니는 비구니 승가와 비구 승가 두 곳 모두에서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7. 비구니는 어떤 경우에도 비구를 비웃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8. 비구니는 비구에게 충고해서는 안 되지만 비구는 비구니에게 충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규정들을 살펴보면 가부장적 질서를 승가의 남녀관계에도 그대로 재현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조항들이 여성 출가의 조건으로 제시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승가가 흔히 생각하듯이 은둔과 피세의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출가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시했고, 승가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수행자 없이 승가가 있을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 승가는 세간의 지지 없이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조직이었다. 붓다가 처음 비구 승가를 만들 때와 달리 비구니 승가가 출범할 즈음 승가는 세간과 깊이 상호의존하고 있었다. 그만큼 세간의 평가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당시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재가자들의 불신과 의혹을 불러일으켜 승가를 위험에 빠뜨릴 지도 모르는 사태였다. 그런 까닭에 승가의 현실 지도자였던 붓다는 마하빠자빠띠의 출가 선언을 무조건 지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여성을 남성의 수행을 방해하는 유혹자로 보는 보수적인 비구들의 동요도 분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출가 수행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내면화해 온 가부장적 관점과 여성에 대한 편견을 모두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터이니 말이다. 또 대중의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다른 사문집단들의 비난도 고려해야 했다.
그러므로 큰 틀에서 보면 팔경법은 비구니가 비구의 지도하에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함으로써 비구니의 출현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내외의 혼란과 의혹을 미연에 예방하는 조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비구니는 비구가 있는 곳에서 안거해야 한다는 규정은 세속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면서 여성 출가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일 수도 있다. 또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여성 지도자의 역량이 쌓이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고려한 조항일 수 있다. 비구니 승가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용인되고 또 여성 지도자들의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 이런 조항들은 의미를 잃게 될, 그야말로 한시적 조항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팔경법 중에는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는 납득하기 곤란한 조항도 있다. 법랍 100년된 비구니라 하더라도 새내기 비구에게 예를 표해야 한다는 조항과 비구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비구니는 꾸짖거나 충고할 수 없다는 조항이 그러하다. 물론 2,500년 전의 상황을 지금 우리의 관점에 대입하여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때의 맥락과 조건이 있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여성에게 목사안수나 사제서품, 성직자의 역할이 허락되지 않는 전통과 관습이 건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 점에서 보통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통찰지를 갖춘 붓다라 할지라도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고자 할 때 그 일이 얼마나 고심에 찬 결정이었을지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중도적 지혜인가, 절충적 타협인가
그런데 만일 팔경법이 여성의 안전을 위한 배려고 대중의 불신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한시적 규정이었다면 비구니 승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는 없애거나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구니들의 지도자였던 마하빠자빠띠가 팔경법의 첫 번째 조항의 개정을 요구한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비구니 승가 출범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마하빠자빠띠는 이 규정을 남자와 여자에 상관없이 법랍의 순서대로 예를 표하는 것으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경전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이나교와 같은 다른 사문집단에서도 남성이 여성에게 예를 표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거절의 근거였다. 평소 붓다와 달리 당대의 통념에 입각한 답변이어서 솔직히 구차하고 옹색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붓다는 여성들의 영적 진보를 응원했고 뛰어난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역량을 찬탄했다. 재가자들에 대한 설법에서도 여성들이 월경, 임신, 출산으로 겪는 고통에 깊이 공감했고, 남아선호를 비판했으며,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의 책임을 높이 샀고, 부부 사이의 상호존중을 강조했다. 그런 만큼 비구 승가의 운영에서는 당시 사회에서 당연시하던 출생 신분과 나이의 차별을 철폐한 붓다가 남녀 승가 사이의 젠더 차별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온존시켰다는 사실은 우리를 매우 곤혹스럽게 한다.
팔경법은 여성의 출가와 비구니 승가를 현실화하기 위해 세속의 가부장적 질서나 편견과의 불필요한 정면충돌을 피하고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으려는 붓다의 지혜로운 중도적 대안이었을 까? 아니면 젠더의 문제가 카스트 차별보다 더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었기 때문에 한 발 후퇴하여 팔경법으로 당대의 습속과 타협하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어쩌면 팔경법에 대해 오롯이 붓다의 선택이라고 보기보다 여성 출가를 둘러싼 당대의 복합적인 입장과 견해들의 절충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팔경법의 기원과 책임을 오직 붓다에게서 찾는 것 자체가 과도한 책임 전가일 수 있다. 붓다 역시 시대의 아들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 팔경법 역시 인연과 조건의 산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금 남아 있는 팔경법의 조항 모두를 붓다가 만들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붓다 입멸 이후 비구 승가의 주류였던 보수적 비구들의 입장과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해석이다. 붓다는 아난다에게 자신이 제정한 계율 중 사소한 것들은 폐지해도 좋다는 유훈을 남겼다. 승가의 운영 규칙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만들어지고 계속 추가되고 개변되었다. 그러므로 붓다 입멸 후 이러한 소소계(小小戒)에 대한 대처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경전과 율장이 구두로 전수되다 문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가필과 삽입이 있었든 없었든 팔경법은 살아 남았다. 비구승가 내에는 아난다처럼 여성 출가에 우호적인 비구도 있었고 비판적인 입장의 비구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붓다 재세시에도 입멸 후에도 아난다의 입장이 주류였던 적은 없는 듯하다. 붓다도 그 힘 관계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여성은 아라한이 될 수 없다’거나 ‘비구니승가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승가의 수명이 500년 단축될 것이다’ 등과 같은 이야기들이 붓다가 한 말로 경전에 남게 되었다.
『니까야』에 남겨진 여성과 관련한 붓다의 말은 대체적으로는 ‘깨달음에 남녀는 없다’는 원리에 충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란스럽고 착종된 구절이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경향의 반증이 아닐까. 또 붓다 입멸 후 경전결집을 위한 아라한들의 1차 회의에 여성 아라한이 참가했다는 어떤 흔적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승가내의 여성의 위상이 미미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역시 팔경법이 미친 부정적 효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이렇게 승가 내의 주요한 활동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배제되어 가는 흐름 속에서 여성 아라한들의 자취는 점점 희미해지고 지워져 갔음에 분명하다.
흑역사를 대하는 법
오늘날 팔경법은 한 마디로 시대착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팔경법은 존재의 평등을 설한 붓다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날카롭게 비판하고 치워버리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여성의 출가와 관련된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 비구 승가의 경우에도 존재 자체로 출가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출가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 모두 포함된다. 어쩌면 여성의 출가를 문제 삼는 관점은 장애의 문제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여성이 깨달을 수 없는 존재라 거부된 것이 아니었듯이 남성 장애인의 출가가 거부된 것 역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탁발, 유행 등과 같은 출가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고 특별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실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과 장애로부터 우리는 더 도발적인 문제로 나아갈 수도 있다. 출가와 재가의 구별은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일까? 이미 대승불교는 출가자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거나 혹은 깨달은 자는 출가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보살사상을 발전시켰다. 나아가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도 펼쳤다. 그러니 설령 그 기원이 붓다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성역은 없다. 여자와 남자, 장애와 비장애만이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 젊은이와 늙은이, 건강과 질병, 인간과 비인간 등 우리 삶에 기준과 척도가 되는 수많은 구분들 역시 실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러했듯이 불교는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게 하는 사유이면서 실천이 아니던가. 나는 팔경법이 불교의 흑역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올바른 법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치워버리거나 쉬운 반성으로 끝내지 않는 방식으로 흑역사를 성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깔라마인들이 붓다에게 진리와 거짓의 판별기준을 물었을 때 붓다는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스승이라는 생각에도 끄달리지 말라.”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들을 버리라”고 말했다. 그게 참 어렵다.
글_요요(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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