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의 물질성을 탐사하기, 디지털 의존성에서 벗어나기
디지털을 실감하기 : 앎의 번개와 회의의 피뢰침
대체 어떤 사물이나 사태나 습관을 문제로 실감하는 일, 나아가 감수성이 달라지게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육식이나 흡연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환경과 건강에 해롭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대부분의 경우 고기도 담배도 쉽게 끊지 못한다. 반대로 상식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는데도, 심지어 주변 사람들이 즐기고 권하는데도 육식과 담배가 불편하고 싫어지는 케이스도 있다. 타고난 체질이나 성향을 논외로 한다면, 이러한 ‘느끼는 방식’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제는 떼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해진 디지털 기술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지하고, 질문하고, 바꿔볼 수 있을까가 고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있어서, 한 권의 책을 책이 전해주는 ‘디지털’에 대한 신선하고 놀라운 정보들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확실히 읽고 보고 듣는 경험만으로는 그 자체로 구체적인 느낌과 행위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앎들은 우리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적인 맥락을 건드릴 수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알게 모르게 품어온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회의의 불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때 앎은 문제의식의 싹 자체는 아니어도 그것을 키우고 자라게 할 양분으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윤리적 전환에 있어서 앎은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질문하기를 시작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런 생성적 사건은 그 정보들이 진중한 문제의식 속에서 꼼꼼하게 다듬어진 것일수록, 나름의 피뢰침이 마련되어 있을수록, 더 강렬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의 저자 기욤 피트롱은 디지털 산업과 우리 사이에 바로 이런 스파크의 체험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책은 고맙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수많은 장소들과 건물들을 발로 뛰어 방문하고 현장관계자들과 전문가들과 시민들을 만나 남긴 생생하고 충격적인 기록들로 가득하다. 문제를 문제로 실감하게 되는 그런 순간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어떻게든 디지털이라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온갖 정보들과 수치들을 세심히 가다듬어 전해주고 있다. 기욤 피트롱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 그리고 편리함에 대한 갈망에 의해 은폐되고 주변화된 장면들을 번개처럼 내리꽂는데, 다행히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런 번개에 반응할 수 있는 공통의 피뢰침 두 개를 이미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매우 분명하고 예리하며, 다른 하나는 희미하고 약하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첫 번째 피뢰침은 바로 기후 위기에 대한 우려다. 사실 생태 문제는 이제 생존의 문제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뭐라도 행동해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디지털 산업은 그 무엇보다 무거운 생태발자국을 남기며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은 기업의 그린워싱과 우리의 감각 속에서 교묘하게, 지능적으로, 체계적으로 비가시화되어 있는데, 이 책은 디지털의 경악스러운 물질적 흔적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을 쏟는다. 이러한 앎들 앞에서 우리의 민감한 생태 감수성은 과연 디지털이라는 친숙하고도 불분명한 영역과의 관계를 문제화하고 싸워낼 충분한 무기가 될 수 있을까?
두 번째 피뢰침은 덜 뾰족하며 보다 안쪽에 숨겨져 있지만 어쩌면 더 생생하고 강력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이러고 싶지 않다’, ‘무능해지고 싶지 않다’는 미세한 몸부림이다. 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유튜브와 SNS 같은 플랫폼들이 쏟아내는 컨텐츠와 서비스에 허우적거리다가, ‘아, 내가 뭐하는 거지’ 하는 느낌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 즐겼다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를 불쾌함이 남아 있는 경험. 이용했다기보다 왠지 이용당한 것 같은 찝찝함. 디지털이라는 문제를 실감하기 위해 우리가 출발해야 할 두 번째 지점은 여기다.
디지털의 하부구조를 지각하기
앎이 삶을 바꾸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앎이 자신의 발생 조건을 묻는 데까지 가야 한다. 해방은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왜 그러한 방식으로 무지한지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어떤 조건들 속에서 이런 방식의 앎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묻고 이해할 수 있을 때 감각의 방식과 행위의 패턴은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기욤 피트롱은, 단지 디지털이 생태에 파괴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무해하고 순수한 디지털의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왜 그렇게 환경 문제라는 우리의 긴급성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생각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디지털 산업의 성장은 아닌 게 아니라 세쿼이아 숲의 성장 혹은 대양의 산성화에 비견할 만하다. 분명 실제로 존재하지만 육안을 통해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으니까. 지각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해하기도 어렵다.”(기욤 피트롱,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17쪽)
사실 디지털이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사안들보다 문제화하기가 어려운 영역이다. 대체 ‘디지털’이 뭘까? 우리는 곧바로 온라인, 웹사이트, 가상공간, 서버, 네트워크, 클라우드 등의 모호한 말들과 함께 무형적이고 무한한 허공과도 같은 영역을 떠올린다. 손에 만져지지도 않고 이런저런 부산물도 남기지 않는 탈물질화된 순수 정보의 공간. 하지만 과연 ‘비물질’이라는 것이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정보나 데이터라고 불리는 그 어떤 코드도 그것을 담아내는 물리적 구조물 없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탈물질화된 영역이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따져보면 근거가 없다. 우리가 한 번도 ‘온라인’을 가능케 하는 ‘오프라인’, ‘클라우드’를 가능케 하는 ‘데이터센터’, ‘서버’를 가동시키는 막대한 물, 가스, 광물, 대기인력에 대해 질문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그런 질문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조건들 때문에 생겨난 환상이다.
하지만 디지털은 자신의 비물질적 차원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하는 무시무시한 물질적 하부구조를 필요로 한다. 사실 우리로서는 디지털이 뿌리내린 인프라를 한 번에 지각할 방법이 없는데, 그것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전 지구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는 것은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기기들의 스크린이다. 그 뒤로는 만져지지 않는 무형의 영역이 클라우드처럼 펼쳐져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스마트기기들은 어딘가에서 만들어져야 하고 충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벌써 디지털은 매체는 거대한 제조 산업체와 닿아 있고 수많은 광산과 발전소들에 기반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 데이터는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한다. 데이터들이 광활한 허공에 어떤 물질적 제약도 없이 구름처럼 퍼져나간다면 좋으련만, 그것들은 땅위에, 그것도 무겁고 단단한 금속 기계장치들에 꼭꼭 저장되어 복잡하게 꼬이고 뻗은 전선을 통해 이동한다. 우리는 종종 카카오 서비스가 잠시 정지되어 관련 서비스 전부가 먹통이 되는 상황을 겪는데, 이는 데이터센터에 불이 나거나 전기 및 냉각 자원이 조달되지 않아서다. 우리의 스마트기기에 쏟아지는 모든 이미지, 영상, 웹페이지 등의 데이터는 모두 저 데이터센터에서 온다. 그곳엔 희토류 광물들로 만들어진 서버들이 도서관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데, 이 저장장치들은 상상할 수 없는 양의 전기를 먹고 뜨거운 열을 내뿜는다. “데이터센터를 구성하는 몇몇 부품들의 온도는 섭씨 60도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최적화된 작업 환경에서라면 데이터 농장은 상온 20도에서 27도 사이로 유지되어야 한다.”(163쪽)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건물을 식히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냉각수와 가스와 화석연료가 투입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디지털의 비물질성은 허구임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환상을 부추기는 강력한 오해 하나가 남아 있다. 그것은 데이터의 ‘전송’이 허공에서, 무선으로, 통로 없이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우리 중 압도적 다수는 우리가 하는 통화며 우리가 주고받는 사진, 동영상 등이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닌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 오늘날 전 세계 트래픽의 거의 99퍼센트가 공중이 아닌 지하, 그리고 바닷속에 펼쳐진 벨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245쪽)
우리는 ‘모바일’ 기기를 들고 다닌다. 그래서 쏟아지는 데이터와 우리가 쏘아 보내는 데이터가 마치 인공위성이라도 향하듯 하늘로 뻗어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무선 통신은 데이터의 여정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무선 신호는 지하철 한 정거장도 가지 못하고 안테나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안테나는 모두 ‘유선’으로 이어져 있다. 어디서든 초고속 인터넷이 터지는 한국은 셀 수 없이 많은 거대한 안테나가 심어져 있는데, 5G 네트워크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거의 100미터마다,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이며 가로등 혹은 광고판 등마다 하나씩 설치되어야 한다.”(200쪽)
그런데 데이터가 유선을 타고 이동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외에 있는 친구의 인스타그램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걸까? 바다를 건너려면 무선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아니다. 벨이 최초의 전화를 발명한 이후부터 지금의 광대한 인터넷 네트워크까지, 대륙을 오가는 모든 통신은 99퍼센트가 유선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바닷속에는, 심지어 북극 빙하 아래에 까지 해저케이블이 깔려 있다. 우리가 누르는 ‘좋아요’는 후 그 수륙양용 고속도로를 따라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해안에 도착하고, 육로를 따라 페이스북의 데이터센터에 저장되었다가 전 세계의 유저들에게 전달된다. 물론 그 사이사이 전산망을 갈아타며 일종의 톨게이트들을 거친다. 여기에 비물질적인 것은 없다. 그 모든 통로는 광섬유와 구리와 알루미늄과 폴리에틸렌과 고무로 만들어진 ‘전선’이며, 워낙 넓은 범위에 퍼져 있기에 모든 곳에서 파손과 노후화가 일어난다. 가장 튼튼한 전선인 해저케이블조차 수명이 25년 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심해 속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케이블이 노후화되어 방치되고 또 설치되고 있다. 이것이 디지털의 혈관이자 신경이다.
다시 물어보자. 디지털은 무엇인가? 디지털은 그 인터페이스들의 물리적 제조 산업뿐 아니라 통신망을 가동시키기 위한 유선 연결망과 서버, 전기, 물, 희토류, 전문인력, 전부를 포괄한다. 우리가 ‘클라우드’로만 묘사했던 디지털 세계는 “데이터센터, 수력발전용 댐, 화력발전소, 전략 금속 광산 등으로 형성된 ‘인프라 월드’”이며, 그 시설들을 작동시키기 위한 “사업가들과 어부, 광부, 컴퓨터 과학자, 석공, 전기기술자, 청소부, 수차 운송업자들을 태운 해저케이블 부설선과 초대형 유조선들”(19쪽) 모두가 ‘직접적인’ 디지털 왕국의 역군들이다. 디지털 산업이 생태 문제에 있어서 가장 묵직한 무게를 차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각되지 않는 것과는 싸우기가 어렵다. 기업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웹에서는 도처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오프라인, 즉 현실 세계에서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171쪽)으려고 온갖 전략을 사용한다. 디지털 기업들은 “물리적 실체를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전략들”을 감행하는데, 데이터센터를 지을 때는 병풍 회사를 세워두고 시공사나 지자체 공무원들에게는 기밀 유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들의 물질적 흔적을 지워내는 거다. “그래야만 데이터 사업 기업들의 물이며 전기 소비량 등이 공개되는 일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172쪽) 반생태적이라는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산업시설의 가동에 조금의 제동도 없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데이터센터의 에너지를 대기 위한 수력 발전소로 인해 지역의 강이 말라버려도 주민들이 기업에 항의하거나 센터를 공격하는 마찰이 빚어져서 “생산 리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반대 움직임이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172쪽)이다.
이 책은 좀처럼 지각되지 않는 디지털의 물질성을, 그것도 막대한 생태발자국을 남기는 치명적 물질 소모적 성격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어떤 조건들과 전략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을 지각하기 어렵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물론 지각의 어려움이 단지 기업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빨리빨리’의 욕망, 예쁘고 편리한 것에 대한 추구, 새 기기에 소비 충동, 자극적 컨텐츠에 대한 끌림 등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산업을 만들어 낸 것도 결국 우리의 욕망 아니겠는가,
실천은 도처에 있다, 감염시키자!
사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한 번은 깊은 무력감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 파괴적인 시스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그것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생활과 일, 공부, 여가, 쇼핑, 금융, 소통 등 모든 일상이 디지털 산업 없이는 아예 운영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까?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메일함을 비우고 어플 몇 개를 지워본다 해도, 다시 다른 어플을 깔아서 이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자기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인 걸까? 디지털 산업의 막강한 파괴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개개인의 욕망을 자제하고 가책하며 인내심을 키우는 방법밖에는 없을까?
물론 무분별한 접속과 소비 습관을 문제 삼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책임이 온전히 개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의 욕망 역시 배치 속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모든 자본력을 동원해 공학, 예술, 디자인, 심리학 분야의 엘리트들을 데려다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접속하고 클릭하고 소비하게 만들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휴대폰을 150회 들여다보게 하려는 목적에서 개발자들이 다듬어 놓은 ‘조작의 틀’”(210쪽)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디테일하고 집요하다. 우리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미세한 색깔과 편안한 캘리그래피를 연구하고, 미적인 디자인을 만들고, 매년 새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도록 ‘계획적 구식화’를 일삼고, 일체형으로 만들어 고쳐 쓰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우리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5G를 설치해놓고 필요 이상의 속도 감각에 중독되게 한다. ‘수요 없는 공급’을 쏟아 부으며, 어떻게든 새로운(디자인과 카메라 성능만이 달라진) 스마트폰과 스마트 기기를 구매하게 하고 새로운 어플을 깔도록 한다(그놈의 ‘혁신’!). 그러면서도 기업대표들은 뻔뻔하게도 각자의 ‘자유의지’ 운운하며 소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을 단도리하기에 앞서, 디지털 산업의 메커니즘과 비겁합, 자본의 생리와 뻔뻔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어떤 조건에서 부추겨지고 있는지를 알고 나누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한 스텝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책을 혼자서 열심히 읽는다 해도, 현실로 돌아오면 유튜브 알고리즘을 채운 따끈따끈한 컨텐츠들과 울려대는 SNS의 메시지들, OTT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디지털 산업이 뿜어내는 가공할 탄소량과 물질 소비를 알고 있는 채로 이러한 현실을 혼자 맞이한다는 것은 쓰라린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함께 하는 공부가 실천일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문제화를 같이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습관, 경험, 충격, 걸려 넘어지는 지점을 공유할 수 있다. 우리의 데이터 소비량, 우리가 활용 중인 기기들과 그것을 구매하게 된 계기, 사용하는 웹페이지, 클라우드와 원드라이브에 저장된 파일들의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지금 누리는 매끈한 서비스들과 기기들에 생략된 하부구조나 투입된 물질량(MIPS)을 함께 상상할 수 있다. 원치도 않는 소비의 경험과 기쁘지 않은 컨텐츠 시청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다. 우리의 욕망과 속도 감각이 생산되고 부추겨지는 배치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바로 거기서부터 다른 감각을, 느림을 견디는 것이 더 멋있고, 데이터를 덜 소비하는 삶이 더 생태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롭다는 감수성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감각과 주의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을 훈련은, 그 폭풍들을 혼자 맞이하지 않는 데에서 시작할 될 것이다. 읽고 듣고 나눈 이야기들을 퍼뜨리기. 공부의 실천, 실천으로서의 공부는 그렇게 서로를 ‘감염’시키는 것이리라.
출발의 지점은 기쁨/슬픔의 정서
디지털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지구와 우리의 감각에 파괴적인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상상 이상의 해방과 복지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디지털이라는 문제를 실감하고 함께 공부하는 일 조차도 이 세미나를 통해서 이뤄졌으며, <‘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라는 이 책 자체도 인터넷과 서비스들을 경유하지 않고는 우리 손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도 하고 부자유하게도 하는 이 디지털 서비스에 대해 어느 수준에서 저항하고, 어느 포인트에서 제동을 걸어야 할까?
저항의 출발점은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앞에서 두 번째 피뢰침이라고 말했던 그 ‘불쾌감’, 그것이 임계점이다. 모르는 개념을 검색하러 인터넷을 켰다가 엉뚱하게 그릇을 주문하고 나오는 경험, 10초짜리 유튜브 쇼츠 영상들을 넘기며 두 시간을 훌쩍 보내는 경험은 결코 기쁘지 않다. 그것은 불쾌감을 준다. 이것은 마음먹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때는 느껴지지 않는 기분 나쁨이다. 대체 이 느낌의 정체는 뭘까? 그것은 이용을 한 게 아니라 이용을 당했다는 느낌, 자신이 바보 같고 한심하다는 느낌이다. 수동성이 능동성을 압도하는 이 느낌이 임계점이요, 저항의 지점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슬픔의 정서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온갖 기술적 조작에 의해 오직 우리의 시선을 뺏으려는 목적 하나만 있는 컨텐츠에 그저 반응을 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숨도 편안히 쉬지 못할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눈동자)만을 취했고, 다른 공간이나 신체와의 새로운 만남을 조금도 생산하지 못했다. 바로 이 미세한 정서적, 신체적 경험에 주목할 때, 이 디지털 도구들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관계 맺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한계’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데이터 무제한, 초스피드, 광속 등의 용어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자 자유로운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신체는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 앞에서 훨씬 더 활발하고 유연하게 깨어난다. 데이터가 충분치 않을 때, 우리의 ‘온라인’ 접속은 줄어들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오프라인’ 접속이 활성화된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게 되고, 사람들을 보게 되고, 찾아오는 생각들에 빠져들게 된다. 핸드폰을 끌 때, 셋톱박스를 뽑을 때, 디지털 생활이 정지할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색다르고 풍성한 관계들이 있다. 점점 더 데이터의 양과 접속의 속도에 있어서 한계를 둔다는 것이 주는 긍정적 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자유나 능동의 느낌은 ‘무한’이나 ‘무제한’보다도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이런 실천을 해봅시다!
1) 디지털 발자국을 줄여봅시다! 쓰지 않는 앱, 있어서 쓰게 되는 앱, 클라우드에 저장된 영상들, 모두 지워봅시다.
2) 하루의 시작과 끝을 스마트폰으로 하지 말아봅시다. 낭송을 하건, 기도를 하건, 다른 방식으로 잠들고 일어나봅시다!(알람 때문이라면 손닿지 않는 곳에 두고 자 봅시다~)
3) 기기를 오래 씁시다! 쏟아지는 신제품을 내세우는 가소로운 상술에 휘둘리지 말고, 고쳐 쓰고, 오래 쓰는 ‘멋’을 알아가 표출해봅시다.
4) 그리고 ‘데이터 다이어트’를 시도해봅시다! 무제한이 아니라 제한이 사실상 우리에게 더 기쁨을 준다는 점을 곰곰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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