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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호의 읽기-기계

[민호의 읽기-기계] 무기력이여 잘 있거라 (1화)

by 북드라망 2023. 9. 26.

무기력이여 잘 있거라 (1화)

 

뗏목을 엮으며
무기력에 대해 써야겠다는 마음이 왜 지금 불거졌는지는 모르겠다. 뾰족한 동기는 없다. 현재 나 자신이 특별히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오염수 방류나 기후붕괴, 각종 혐오범죄 등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 사회·정치 현실 때문이라기에는, 사실 좀 새삼스럽다. 언제라고 한숨 나오는 상황이 그친 적이 있었던가. 그러니까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무기력을 고민해야만 하는 뚜렷한 동기는 없다. 그런데도 왜인지 자꾸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건 당장의 극복이나 긴급한 방어 본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할 것 같아서다. 그래야 상황이 닥치면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에게든 남에게든 건넬만한 지푸라기라도 쥐고 있어야 할 테니. 휩쓸려간다면 이미 때는 늦으니까.

무기력은 마치 수해 같다. 예기치 못한 때에,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고이기 시작하면서, 우물쭈물하는 순간 턱밑까지 차오른다. 비록 지금이야 괜찮다 해도 나 역시 언제든 잠길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혹은 아래에서 계속 흐르고 있다. 배수로가 막히면, 몇 가지 계기가 겹치면, 특히 ‘막막한 현실’과 ‘빈약한 인간관계’와 ‘바닥난 체력’이라는 삼박자가 맞으면 누구라도 허우적거릴 지경에 놓인다. 이 세 상황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오늘도 도처에서 떠내려가는 친구들이 보인다. 냉소하고 혐오하고 소비하고 약을 삼키며 보내는 우리의 ‘싫은’ 나날들. 쇼핑과 여행과 게임과 드라마와 떡볶이 덕에 겨우 숨통을 틔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잠깐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다. 청년들뿐 아니라 중년들이나 청소년들에게서도 가장 지배적인 정서는 무기력이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그 사실이 또다시 무력감을 주지만, 그래도 용기를 모아 질문을 엮어가 보고 싶다. 물살에서 잠시 비껴난 틈을 타서 무기력에 대한 내 나름의 탐사/정비 작업을 시작해보려 한다.

우선. ‘무기력’이라는 상태에 대한 전제들을 점검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사실 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백 개의 무기력이 존재할 것이다. 그 경로도 양상도 다르지만, 우리는 그 심리적-생리적 상황을 허무, 공허, 무력, 무기력 같은 말들을 사용하며 표현한다.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접두사는 ‘무’(無)다. 없음, 결핍, 부재를 말하는 무. 그런데, 뭐가 없다는 걸까? 정말 기력이 없다는 걸까? 그렇다면 무기력은 체력 저하나 피로나 질병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고, 물건을 사고, 여행을 다니고,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무기력하다. 무기력이 물리적인 활동성의 결여나 고갈을 뜻한다면, 왜 이토록 많이 먹고 많이 노는 시대에도 무기력을 호소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엉뚱한 처방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름에 속지 않아야 한다. 무기력은 체력을 보충하고 기력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나아지는 결핍증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과할 정도로 칼로리와 컨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질문되어야 할 것은 이런 과잉 속에서도 왜 여전히 무기력한가다.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나 시대의 조건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작업에 앞서, 아니 그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우리에게 따라붙는 ‘무’라는 관념에 대해 질문해보고 싶다. 우리가 기력이 ‘무’라고 말할 때, 허무를 느낀다고 말할 때, 그때의 ‘무’는 무엇인가?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 조건들은 뭘까? 무기력의 무, 그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무(無), 실망의 도색 작업

 

“무나 공백과 같은 말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은 사유이기보다는 감정이거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유의 감정적 채색이다.”(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아카넷, 418쪽)


‘무’의 관념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지성, 무질서, 무감각, 무색무취 등. 이때의 무는 어떤 대상의 부재를 나타내는 부정의 수식어로 쓰인다. 지성의 부재, 질서의 부재, 감각의 부재, 색깔과 냄새의 부재. 그러나 이때의 부재란 정확히 뭘까? ‘없다’는 비존재나 공백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무기력이 기력의 고갈이 아님을 확인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지성 역시 결코 앎 자체의 공백 상태가 아니다. 자기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다. 이 천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깨달았듯, 무지는 앎으로 꽉 차 있는 상태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 아니라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 했던가. 반지성주의는 언제나 편협한, 고집불통의 지성주의다. 무질서도 마찬가지다. 무질서는 카오스가 아니라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에서의 질서다. 머리 아플 정도로 어질러진 방구석도 방 주인에게는 나름의 역사와 균형을 갖는 체계다. 아수라장인 정권도 자기들끼리의 판단 논리와 원칙은 있다. 그러니까 무질서는 질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질서, 알지 못하는 질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질서다.

그렇다면 ‘무’를 단순한 텅 빔, 공백, 부재와 동일시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비-존재라는 것은 현존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파르메니데스는 ‘없음’은 존재할 수도 성립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있다. 있어야만 존재다. 이 선언을 약간 틀어서 원자론자들은 ‘비어 있음’조차 있는 것으로 사유했다. 아무리 휑하게 뚫린 공간이라 해도, 그것은 모든 운동이 펼쳐지는 생생한 장(場)으로서 실재한다. 허공은 有다. 원자 못지않게 충만한 ‘있음’이다. 자연은 그 어느 구석에서도 충만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떠올리는 무라는 판단은 무엇이란 말인가?

베르그손에 따르면, 그것은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의 의식 활동이다. “자연 속에는 절대 공백은 없다.”(418쪽) 공백은 언제나 ‘무언가의’ 공백이다. 모든 부재는 대상을 전제한다. 여기 있었다가 이제는 사라진 무언가, 여기 있어야 한다고 예상되거나 희망되는 무언가로부터 남겨지는 흔적이 공백이나 부재의 본모습이다. 사실상 ‘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나간 순간을 상기하며 달라진 대상을 찾으려는 시도가 시행됐어야 한다. 기억이나 예측하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도 무언가가 부재한다거나 어딘가가 비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재는 기억과 기대가 가능한 존재에게만 있다. 이 존재는 대상을 기억하고 있었고 아마 그것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대상을 만나면 자신의 기대에 대한 실망을 표현한다. (...) 그때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무와 마주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419쪽)


토끼를 쫓던 사냥꾼은 숲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 동료에게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네!”라고 외친다. 물론 그들은 숲이 온갖 수풀과 곤충들로 가득함을 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시장에 내다 팔 고기와 모피를 줄 수는 없으므로, 그 숲은 사냥꾼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곳이다. 가구 없는 방 앞에서 집주인이 손님에게 “이 방은 텅 비어 있어요”라고 알려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방이 공기로 가득 차 있음을 알지만 우리가 공기 위에 앉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나 공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상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실망과 당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충만 속에 있다. 다른 사물의 현존이 계속해서 거기에 있고 또 지각되며,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결코 ‘부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있는 것과 있을 수 있거나 있어야만 할 것 사이의 비교, 즉 충만과 충만 사이의 비교에 불과하다.”(420쪽)

요컨대, ‘무’라는 것은 하나의 표상이며, 더 정확히는 표상처럼 보이는 감정이다. 베르그손의 표현으로는 ‘사유의 감정적 채색’이다. 지각되는 세계에 선택된 기억이 중첩되고, 예상했던 그림에 아쉬운 감정이 중첩된다. 우리는 텅 빈 곳에 있어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곳을 텅 빈 곳으로 만드는 건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 열의다.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어디도 비어 있지 않다. 비 냄새, 시계 소리, 후덥지근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그렇게 감각되는 것들을 기억으로 고정시키고 선형적 인과를 배열한 후, 거기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걸러내는 편집 작업과 더불어서야 ‘없음’이 가능해진다. 즉 기억하고 비교하고 계산하는 능력인 ‘지성’이 그곳을 ‘무’로 덮어버린 것이다. 지성은 유용성의 선을 따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공백이라는 말을 사물의 부재가 아니라 유용성의 부재로 이해”(441쪽)해야 한다. 그래서 사냥꾼에게 숲은 비어 있고, 아이들에게 돈다발은 ‘무’가치하다. 무는 특정한 요구 속에서 특정한 기억이 재생되고 특정한 욕망이 일렁일 때 떠오른다.

“공백의 개념화는 (...) 다른 상태가 이미 현존하는데도 이전 상태의 기억에 집착하고 있을 때 생겨난다.”(420쪽) 무의 관념은 지성과 욕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놀라운 건, 무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욕망한다는 사실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무에 앞서 욕망이 있다. 일상에서 무를 느끼거나, 사유에서 무를 전제할 때, 심지어 무가 되기를 원할 때조차도, 어떤 의욕이 스치고 있거나 적어도 스쳐갔었다. 물론 그것은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형체가 흐릿한 욕망, 뭔지 모를 욕망이지만, 그 욕망 역시 생산한다. 이곳을 무로 만드는 감정과 관념을 생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라는 판단-감각은 뭔가를 원한다는 것의 부정적 표현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바라고 기대하고 예상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이중의 부정이 있다. 첫째는 현존의 부정이다. 무와 함께 우리의 안팎에서 이뤄지는 미소한 진동, 변형, 조화, 부조화가 무시된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잿빛으로 칠하고 소리 내는 것들에 등을 돌린다. ‘여기’는 실망감으로 물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두 번째는 욕망의 흐름의 부정이다. 욕망의 대상과 방향은 명시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래서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문제가 주목받지 못한다. 찾고 있는 것을 규정하고 거기로 나아갈 동력이 상실된다. 그것은 저만치 멀리 물러나 있는 두루뭉술한 무언가, 단지 ‘여기보다 나은 무언가’일 뿐이다. 물론 일상 속 무의 표현은 구체적 대상을 떠올리게 하고 다음 순간의 행위를 견인하게 만들기도 하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네!”라는 외침이 토끼 사냥꾼을 다른 숲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토끼 같은 것이 아니라 막연한 꿈, 완벽한 환상이다. 그러므로 사냥꾼처럼 다른 숲으로 이동할 수도 없다.

요컨대 무의 정서는 두 가지 부정을 수반한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의 부정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의 부정. 실존의 부정과 욕망의 부정. 현재의 부정과 미래의 부정. 이러한 이중 운동이 주변 세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뤄지기 시작할 때,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에까지 확대 적용될 때, 우리는 확실히 무기력 속에 잠기게 된다. 이건 내가 찾던 세상이 아닌데, 이건 내가 바라는 기분이 아닌데, 이건 내가 원하던 내가 아닌데...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달라지지 않겠지…….

무는 절대 공백이 아니라 아직 명시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한 기대의 미충족 상태다. 무기력은 그것의 시간적 공간적 확장이다.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생각을 뻗치는 곳마다 그런 실망감이 발견되는 상황이다. 저 앞날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위험한 짐작. 이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모른다. 모르지만,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늪의 물살이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지라도 더듬어봐야 할 것이다. 실망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내 앞의 현실을 ‘찾는 것이 없는 세계’이자 ‘볼품없는 것’으로 떨어뜨리게 될 때, 우리 위에서 일렁이고 있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을까?

 

 


욕망의 공회전 : ‘뷰잉viewing’과 ‘잡 하핑job hopping’

 

“내일이 올 걸 아는데 / 난 핸드폰을 놓지 못해 / 잠은 올 생각이 없대, yeah / 다시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 하네 / 잘난 사람 많고 많지 / 누군 어디를 놀러 갔다지 / 좋아요는 안 눌렀어 / 나만 이런 것 같아서” (DEAN, <인스타그램> 중)


최근에 읽었던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한 시간씩 스스로를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 학대란 바로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보는 행위(일명 ‘SNS 뷰잉’)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아이들의 정신건강과 자존감을 걱정한 시애틀의 어떤 공립학교는 메타(구 페이스북)와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인터넷 뉴스는 온통 셀럽들의 가십으로 가득하다. 자본에 잡아먹힌 기자들은 그들의 결혼 및 불륜, ‘여신 미모’, ‘놀라운 활약’, ‘무결점 자태’, ‘아름다운 선행’, ‘충격적 이별’ 따위의 행보를 눈앞에 들이대며 우리의 호기심과 짜증을 유발한다. 인스타그램은 그보다 한결 부드러운 방법으로 작업하지만 유독성은 더하다. 연예인들의 빛나는 모습들 사이로, 지인들 혹은 지인의 지인들의 크고 작은 이벤트와 열심히 사는 일상(갓생)이 전시되어 있다. 하나같이 예쁘고 밝고 능력 있는 모습, 자랑할 만한 순간들이다. 콘서트, 맛집, 전시회, 랜드마크, 레저, 새 차, 바디프로필, 파티. 이런 이미지들로 가득 찬 피드를 아무리 뒤적여 봐도 거기에선 지금 나와 내 주변에서 윙윙대는 변변찮고 소박한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꼬여버린 관계, 숨막히는 퇴근길 지하철, 실없이 웃는 순간들, 말 안 듣는 피부 상태, 또 찾아온 불면증, 산책과 리프레시, OTT를 헤매는 새벽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지러운 침대에 널브러져 인스타그램을 본다. 그리고 다시 이곳의 나를 본다. 여긴 별 볼일 ‘없다’. “난 지금 가라앉는 중인 걸 / 네모난 바다 속에서 (...) no way no way / 이 피드 속엔 / 나완 다른 세상뿐인데”

무엇이 무기력의 원인인지 답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무기력이 증폭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보기’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는 이쪽과 저쪽을 겹쳐보는 일과 관련이 있다. ‘SNS 뷰잉’과 ‘셀프 뷰잉’을 오가는 동안 욕망은 헛돈다. 욕망은 피드 속 이미지로 날아가 매력적인 그림을 물어오지만, 이 현실을 거기로 데려갈 방법도 여력도 없음을 발견한다. 화려한 저곳에서 달궈진 욕망은 초라한 이곳에서 식는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네”라고 외쳤지만, 토끼가 많아 보이는 저 옆의 숲들은 가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 픽셀로 되어 있다. 피드에서는 나를 찾을 수 없고 내게서는 피드 속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욕망이 공회전하는 그 자리에는 은근한 실망감과 묘한 패배감이 떠밀려온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지만 눈보다 부지런하지는 않다. 우리가 무력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그 저녁에도, 스크린을 훑으며 보고 비교하고 찾고 실망하는 안구운동은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가 인스타그램 안에서 ‘가라앉는 중’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표면적이다. SNS 뷰잉은 강력한 기폭제지만, 그것 자체가 무기력의 원천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역시 하나의 징후다. 보기 때문에 부정적이게 되는 건지 부정적이므로 보게 되는 건지 선후를 확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훨씬 건강한 SNS 접속과 정서 생산도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조금 더 시선을 확장시켜야 한다. 우리의 나날을 변변찮게 느껴지게 하는 보다 넓은 차원의 배치를 물어야 한다. 욕망이 발붙일 곳을 잃게 되는 우리 시대의 독특한 미로가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우리 시대의 무기력에 대해서 질문하며 시작했다. 그것은 외적인 금지나 탄압 혹은 급작스러운 상실이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나름 열심히 산다. 돈도 벌고, 영어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비타민도 챙겨 먹고, 주식투자도 한다. 그중 일부는 전시되고 과시된다. 하지만 돌아서면 언제나 거기에는,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는 묘한 공허감이 있다. 특별히 어려운 사건이 벌어져서가 아니라 일상을 사는 중에, 부족함 없이 할 거 다 하는 중에, 마음 언저리를 적시고 있는 헛헛함. 그런데 여기서 놓친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가볍게 스케치하고 넘어간 ‘할 걸 다 한다’는 저 일상이다. 언뜻 멀쩡해 보이는 여러 활동들은 왜 그리고 어떤 분위기 속에서 추구되는 걸까? 거기에 반영되고 있는 이 시대의 독특한 가치, 경향성, 좋은 삶과 안 좋은 삶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그런 배치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자리매김하고 있는가?

당연하지만, 돈을 벌고 쓰는 방식, 일을 하고 쉬는 방식, 시간을 보내는 장소 및 만나는 사람들과 무관하게 우리의 신체나 마음이 형성될 리가 없다. 물론 이런 삶의 양상은 모두에게 다르게 펼쳐질 것이다. 이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시대의 경향성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보는 세대불문의 전반적 무기력이 오늘날의 독특한 경향이라면 그것은 분명 이전 시대와 다르게 이 시대에 두드러진 시스템 혹은 관계망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일례로, 좋든 싫든 우리의 하루 중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노동, 돈벌이, 직업 등)의 형태에서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SNL>에서도 풍자되듯 MZ세대는 언제든 ‘퇴사각’을 노린다. 아무도 평생직장을 원하지 않는데, 이는 젊은이들의 근기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해서다. ‘고용 유연화’, ‘비정규직화’, ‘플랫폼 경제’ 등의 단어가 유행한지는 꽤 되었고, 시장의 불안정성은 이미 너무 당연해서 우리에겐 그 사실이 분노할만한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그건 우리 삶의 기본값이다. 하여, 극소수를 제외하면 누구도 자기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 일이 쉽든 어렵든 한 자리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겠다는 생각은 희박해졌다. 이는 결혼이든 내집마련이든 일을 계속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사라진 상황과 궤를 같이 한다. 승진을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괜찮고, 집을 사고 싶지만 없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갈등 없고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일 수 있는 일을 찾는다. 탄탄해진 이직 플랫폼과 컨설팅 업체와 더불어 점프하듯 이직을 이어가는 일명 ‘잡 하핑(job hopping)’이 당연해졌다. 그런 현실을 잘 수용하든 아니든, 이직을 계속하든 오래 머물든 간에, 분명한 건 점점 더 하는 일 혹은 일터와 자기가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거점은 없다. 우리는 채용플랫폼에 놓인 하나의 포트폴리오다. 푸코 말대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어버린 우리는 저마다의 스펙과 커리어를 움켜쥐고 모두가 모두를 비교하는 시장을 떠돌며 ‘수지맞는 일’을 찾는다. 그러면 오랜 딜레마 하나가 반복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자니 벌어 먹고 살 만큼 재능이 없고, 돈 되는 일을 하자니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다!’ 그 결과 돈은 덜 되고 아주 싫지도 않은 일을 하게 되는데, 이 차선/차악은 잠깐의 안정과 항상적 불만족을 남긴다. 어딜 봐도 더 잘난 사람, 더 조건 좋은 친구,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잘 버는 누군가, 조금만 일하고도 ‘갓생’을 사는 누군가, 혹은 이미 건물주여서 일을 할 필요조차 없는 누군가. 매혹적인 이런 성공사례들은, 퇴근 후 운동을 다녀도, 휴가철마다 여행을 떠나도, 조금 더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해도 머릿속을 잘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배운 적이 없다. 굳이 대안 교육이 아니어도, 학교는 항상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귀가 따갑게 물어봤었다. 모른다고 말해도, 적성 검사, 진로상담, 행복한 꿈찾기 프로그램 등에 집어넣어 취미와 특기를 짜깁기해 ‘좋아하는 일’을 알려주려 애썼다. 마치 그런 직업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원하는 일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있고, 우리는 그나마 괜찮은 일을 찾으려 할 뿐이다. 우리는 수입과 스트레스 사이를 저울질하며 이 일 저 일을 오간다. 요령이 생긴다 해도, 워라밸이 맞춰져도, 보상적 소비를 해도 어떤 부족함은 늘 남는다. 인스타그램은 오늘도 반짝반짝한다. 찾는 것의 미발견. 겹겹의 실망. 무의 느낌. 무기력한 저녁.

거칠게나마 무기력이 찰랑이는 늪을 더듬어 보았다. 뗏목을 만들기 위해서 디테일한 진단은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무’라는 것이 지성의 실망감이고 무기력은 그러한 실망이 연속되는 상태라는 사실로부터, 우리 일상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일단은 뷰잉과 호핑이 반복되는 배치 속에서 우리의 욕망이 헛돌고 있다고 말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이 역시 욕망이다. 정말로 무기력의 문제와 대면하고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무기력 속에서의 욕망이 어떤 욕망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 욕망이 함축하는 방향성, 색채, 뉘앙스를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흐름의 방향을 비틀여지도록, 그리하여 다른 건강과 다른 명랑함을 발명할 여지도 만들 수 있을 테니! 투 비 컨티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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