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사회1
‘기계’라는 기괴하고도 찬란한 존재론
1.
“그것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들뢰즈/과타리,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23쪽)
들뢰즈와 과타리의 기계라는 개념. 그것은 하나의 기계로서 작동하는데, 무엇보다 내 머릿속의 ‘기계’라는 말의 용법을 고장 내면서 작동한다.
기계라고 하면 으레 따라붙는 이미지들이 있다. 첫째, 능력의 표상. 기계는 부침 없이, 실수 없이, 감정 없이, 흔들림 없이 일을 처리해내는 비범함을 의미한다. 최연소 나이로 최다 골 기록을 갈아치운 엘링 홀란드 같은 스트라이커에게 붙이는 ‘득점 기계’. 마이클 잭슨처럼 현란하게 춤을 추는 이를 부르는 ‘댄스 머신’. 같은 맥락에서 퀸의 프레디 머큐리는 성적 역량을 과시하며 스스로를 ‘섹스 머신’이라 부른다. “I am a sex machine ready to reload like an atom bomb.”(<Don't stop me now>) 이처럼 내 표상 속 ‘기계’는 우월하고 초인간(super-man)적인 수행능력을 지칭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기계는 딱딱한 수동성과 무능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기계는 숙고도 주저함도 없음, 융통성이나 유연성이 없음을 연상시킨다. 국어사전에는 ‘기계적’의 반의어로 ‘창의적’이 등록되어 있다. 연기자나 연주자, 작가나 디자이너에게 그들의 작품이 ‘기계적이다’라는 평가는 굉장한 수치로 여겨진다. 그것은 미세한 감각적 결을 무시한 채 그저 명령을 실행하는 무신경함을 나타낸다. 생산력 있고 정교할지언정, 감성, 지성,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서의 기계. 그 결과, 엄격한 인과주의와 역학적 계산가능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계론’(mechanism)은 늘 생명과 생성에 주목하는 철학의 샌드백이 되어왔다.
요컨대 기계라는 말은 우리에게 능력과 무능력을 동시에 의미하며 문맥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생명력’이나 ‘인간성’이나 ‘자연적인 것’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어느 누가 움트는 새싹이나 한 폭의 산수화를 기계 같다고 할 것이며, 복잡한 관념들과 다채로운 정서의 스펙트럼을 기계에 빗댈 것인가? 하지만 들뢰즈와 과타리는 말한다. 그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기계라고. ‘기계 같은’ 게 아니라 기계. 존재한다고 하든, 운동한다고 하든, 살아있다고 하든, 도처에서 시시각각 펼쳐지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기계의 반대편에 놓은 것들을 다 포함해서, 전부 기계들이라고.
2.
“모든 것이 기계를 이룬다. (...)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짝짓는 과정만이 있다.”(24쪽)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앉아서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 여기서 앞에 놓인 컴퓨터만이 기계인 게 아니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손도 기계다. 얼마 전까지는 물과 그릇들과 연결된 설거지 기계였지만 이제는 타이핑 기계가 되어 바쁘게 활자들을 조합해낸다. 동시에, 등받이에 기대 구부정해진 척추는 거북목 기계가 되고, 설거지 할 때에는 똑바로 바닥을 딛고 선 지탱 기계였던 내 두 다리는 허공에서 까딱이는 진동 기계가 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타이핑 기계, 거북목 기계, 다리떨기 기계가 작동하는 동안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상들, 마음에 일렁이는 기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산된다. 이 모든 접속, 배치, 변형의 결과, ‘나’는 ‘글쓰기 기계’로 생산된다. 매번 생산되는 기계는 특정한 방식의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해낸 양상이다. 누가 잘라냈냐고? 또 다른 기계들이. 이렇게 ‘글쓰기 기계’가 되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다. 오후의 햇빛이 쏟아지면, 타이핑 기계는 망부석 기계가 되고, 거북목 기계는 꾸벅꾸벅 자맥질 기계가 되면서 식곤증 기계인 내가 생산된다. 동시에 조명 기계이던 햇빛은 수면제 기계가, 타이핑 기계는 베개 기계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상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다. 키보드와 만나 타이핑을 시작한 손, 돌출된 목, 규칙적인 다리 떨기, 약간의 공복, 너무 따스하지 않은 햇빛이 만드는 일련의 접속들이 글을 쓰게 한다. 주체는 언제나 기계들의 그러한 작동 뒤에 남겨지는 잔여물로서 생산된다. 주체보다 먼저 있는 것은 접속을 통해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지고/만들어내고 있는 중인 기계들이다. 자아 이전에, 인간 이전에, 생명 이전에, 자연 이전에 작동하는 기계들이 있다. 내부도 외부도 모르고, 전체도 부분도 모르는 채로 짝짓기와 생산하기를 계속하며 나아가는 기계들.
좋다. 어떤 것도 다른 것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으니까. 그런데 왜 그런 짝짓기의 양상들을 굳이 ‘기계’라고 불러야 했을까? 운동과 변화의 기본 단위를 사유하기 위해서라면 질료나 원자, 모나드, 에너지 같은 기존 개념들도 있잖은가. 게다가 기계 개념을 말하려면 ‘기계’라는 일상적 용어가 연상시키는 여러 표상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들뢰즈와 과타리가 기계를 존재론의 기반으로 가져오는 것은 왜일까? 그 이유는 명료하다. 존재는 곧 그것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변형시키고 변형되는 상호침투 과정의 연속으로서 존재를 사유하려는 시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동하고, 작동하는 한 기계이다. 이때 작동은 ‘정상작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작동을 명령의 수행이나 알고리즘의 반복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작동은 매뉴얼을 모른다. 고장도 작동이고 멈춤도 작동이며, 부식도 파괴도 우연도 돌연변이도 전부 작동이다. 작동은 오작동을 포함하며, 어떤 점에서는 오작동을 본질로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그 기계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이미 자신과 이질적인 것들과의 마주침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의 흐름에서의 이탈, 반복되던 것에서의 차이가 발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기계들은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 나며, 고장 난 채로만 작동한다.”(67쪽) 그런 의미에서 작동은 정해진 작업의 수행이기보다는 정해지지 않은 만남들 속에서의 부단한 되어감이다. 기계는 작동하면서 늘 자신을 벗어난다. 벗어나면서 매번 다르게 생산된다, 혹은 생산한다.
3.
“모든 기계는 자신이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의 절단이지만, 자신에 연결되는 기계와 관련해서는 흐름 자체 또는 흐름의 생산이다.”(75쪽)
그렇다면 무엇이 기계를 작동시키는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다시금 우리 상식 속 기계로 돌아가서 그것의 외부 동력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작동의 원인이 되는 연료나 힘이나 원인 같은 것. 사실 이것은 철학과 과학이 오래전부터 거듭해온 사고의 습관이다. 질료의 동인으로서의 형상, 물체의 동력으로서의 에너지, 육체의 통솔자로서의 영혼. 우리는 언제나 현상 뒤에 그 현상과는 구분되는 초월적 혹은 근원적인 힘을 전제한다. 그럴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져왔는가? 작동하는 것과 작동시키는 것이 분리되고, 작동과 작동된 산물이 분리된다. 이런 구분 하에서는 위계가 설정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작동의 동인이 우월하고 결과물은 열등한 것으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계인 들뢰즈와 과타리의 존재론에서는 기계의 외부, 기계의 동력, 기계의 원인 역시 기계들이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지어 있다.”(28쪽) 기계들 옆에는 기계들이 있을 뿐이다. 기계들은 서로를 생산하는 동시에 서로에 의해 생산된다. 기계들의 모든 작동은 생산이며, 결합도, 해체도, 소비도, 낭비도 생산이다. “언제나 생산하기는 생산물에 접붙으며”(67쪽) 둘은 분리불가능한 동시적 수행이다. 모든 것은 패치워크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고로, 기계는 늘 “기계들의 기계들”(23쪽)이다. 중첩된 기계들의 중첩된 생산. 빼곡하게 연결된 기계들의 세계에는 방향도 없고 위계도 없다. 그렇기에 정해진 기능도, 선험적 목적도, 고정적 주체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기계는 그 자체로 다른 기계들과의 접속, 연결, 배치를 전제하며, 이렇게 작동하는 기계들의 평면이 바로 자연이다. 자연 자체가 기계다!
중단된 적 없는, 매 순간 새로워지는 작동의 흐름들은 우리가 기계에 붙여온 ‘융통성 없음’이나 ‘수동성’의 이미지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계들은 반복할 때조차 창조하고, 고장 날 때조차 시도한다. 우리의 입을 보라. 그것은 다른 입과 만나 키스 기계로, 토사물과 만나 항문 기계로, 붓과 만나 그리기 기계로 끊임없이 생산된다. 심지어 ‘입 다물고’ 있을 때조차 그것은 침묵 기계로 생산된다. 그 모든 기계적 생성은 동시에 거기에 연결된 입, 토사물, 붓, 침묵의 분위기 등을 전혀 다른 작동을 갖는 기계로 생산한다. 규정성을 빠져나가는 우발적인 생산들! 이것이 창의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창의적이란 말인가?
이처럼 기계들은 종횡으로, 안팎으로, 전후로 얽히고 분기되며 ‘본체와 부품’, ‘유기체와 기관’이라는 전제를 비웃는다. 기계는 시작도 끝도 모르며 전체, 일자, 섭리라는 통합적 원인을 고장 내며 나아간다. 기계의 세계에서는 부분이라 불리는 그 무엇도 전체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부분들의 상호 변형이 매번 전체를 새롭게 생산해낸다. 두 손이 물과 접속하는가 아니면 키보드와 접속하는가에 따라 작동이 변하고, 동시에 우리의 신체가 설거지 기계에서 글쓰기 기계로 생산되었던 걸 생각해보자. 우리 몸의 부분들은 도구, 음식, 날씨, 주변의 사람들과 만나고 변형되면서 신체 전체의 활기, 온도, 건강, 정서를 계속해서 바꿔낸다. 자연 기계에서는 부분과 전체는 언제나 동시 생성이다.
4.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핍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주체이다.”(61쪽)
이렇게 기계가 부단한 접합과 생성을 본질로 한다면, 또 어떤 수동성이나 총체화와도 무관하게 예정되지 않은 흐름들을 그려나간다면, 그것은 기존의 기계라는 이미지와는 한참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개념과 연결된다. 도처에서 뻗어가는 만물의 생장력, 바로 ‘욕망’이다. 물론 이번에도 상식적 표상들을 주의해야 한다. 욕망은 욕심이나 집착이 아니며 결핍이나 불만족의 상태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보다 욕망은 기계들에 내재된 모든 힘이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욕망하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기계의 작동 자체다. 기계들의 작동이 욕망이요, 욕망은 기계들로서 현실화된다. 그렇기에 모든 존재는 ‘욕망 기계’(desiring machine)다.
굳이 프로이트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욕망에 대한 편견 두 가지는 뿌리 깊다. 하나,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 둘, 내가 욕망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 우리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무언가에 끌리고 어떤 것을 원하지만 왜 그렇게 끌리고 원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팠던 익숙한 경험을 참조해서, ‘물이 없으므로 물을 원한다’는 식의 인과를 설정한다. 하지만 물이라는 대상의 부재 때문에 물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걸까? 욕망 기계의 개념으로 보면 ‘물에 대한 욕구’ 이전에 특정한 배열로 결합된 기계들이 있다. 수분의 비율이 변한 세포 기계들이 신경 기계, 혈관 기계, 기억 기계와 연결되면 물을 떠올리는 신체, 물을 보면 반응하는 갈증 기계가 생산된다. 욕망은 무언가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생겨났기 때문에 생겨난다. 즉 욕망을 낳는 건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다.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기계이듯, 욕망이 흐르게 하는 것은 욕망이다. 우리가 충분치 않아서, 있어야 할 것들이 없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결핍되었기에 욕망한다’는 집요한 통념을 반복하고 있을까?
욕망 기계는 주인을 모른다. 우리는 욕망의 주체로 ‘나’를 지목하지만, ‘이것이 내 욕구야’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 욕망은 이미 다른 욕망 기계들과 접속하며 달려나간다. 욕망은 나를 구성하는 장기들의 신진대사, 보고 들은 기억들, 습도와 온도, 계절, 사회적 코드, 테크놀로지 및 규범들과 더불어서 일어난다. 즉 내가 욕망하는 게 아니라 기계들의 배치 안에서 욕망이 발생하고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과 의지를 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저 복잡성을 들여다보기 힘들어서 편하게 판단하고 결론 내려는 지성의 술책이다. 물론 그것 또한 지성 기계의 욕망적 생산이겠지만.
“기계론에 욕망을 도입하기, 욕망에 생산을 도입하기.”(55쪽)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은 이렇게 요약된다. 욕망 기계의 존재론은 기계와 욕망이라는 기존 개념을 동시에 고장 내면서, 생명/물질, 내부/외부, 능동/수동, 정상/비정상, 결핍/충만, 주체/객체, 완전/불완전, 전체/부분 등의 이분법을 훌쩍 넘어간다. 욕망 기계가 작동하는 세계.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나는 이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가 라는 진부한 질문 대신, 어떤 기계가 어떤 기계와 만나 어떤 기계를 생산하는가, 어떤 욕망이 어떤 욕망을 만나 어떤 욕망으로 펼쳐지는가, 라고 물을 때, 세계는 훨씬 더 환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니체가 말한 ‘정오’의 시간처럼, 그 어떤 부정도 결핍도 없이. 없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지금 있는 것들과 함께 변형되고 고장나고 또 욕망하면서,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되어가면서. 아, 이 기괴하고도 찬란한 기계여!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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