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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쿠바와 의생활』지은이 김해완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3. 3. 27.

『쿠바와 의생활』 지은이 김해완 선생님 인터뷰


1. 단도직입으로 묻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인데요, ‘의醫생활’이 무엇인가요? 

 

‘의생활’은 말 그대로 일상생활 속의 ‘의’(醫)를 뜻합니다. ‘의’(醫)라는 한자는 병을 고치다, 치료하다, 치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글자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는 병을 고치는데 필요한 분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병을 치료하는 학문을 ‘의학’이라고 부르고, 치료의 기술은 ‘의술’이라고 합니다. 또 치료를 위한 관계 및 물자를 총괄하는 제도를 일컬어 ‘의료’라고 합니다.

 

한데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거면 충분할까요? 의학, 의술, 의료만 있으면 우리 몸은 치유되는 걸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병은 근본적으로 신체의 사건입니다. 병의 최종적인 운명은 환자의 몸이 이 병과 조우하는 방식(싸우거나, 달래거나, 동행하거나)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환자들의 회복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생활이 건강해야 합니다. 한데 이때 ‘건강하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합니다. 병을 제거하고 죽음을 기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 또한 건강을 ‘병의 부재’가 아닌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차원이 맞물리는 총체적인 안녕(wellbeing)으로 정의한 겁니다. 각기 다른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총체적인 건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조건이 공통으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의술, 의학, 의료가 만인이 접근할 수 있는 자원으로 활용될 것. 둘째, 병과 죽음이 불가피한 생명활동임을 인정하고, 병자의 일상유지를 지원하는 데까지 치료 범위를 넓힐 것. 셋째, 몸이 변화를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공감과 조언을 나눌 수 있는 인간관계가 일상생활에 존재할 것.

 

 

세번째 조건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플 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일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볼 수도 있습니다. 아픈 순간 일상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게 당연한 걸까요? ‘어른, 비장애인, 노동인구’로 대표되는 ‘정상인’만이 ‘정상적인 일상’을 꾸릴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그런 삶은 이미 아픈 삶입니다. 누구든지 장애인으로 정의될 수 있고, 노동할 수 없는 순간을 언젠가 맞닥뜨릴 테니까요. 

 

총체적인 건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신체의 사건이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전면적으로 지지받아야 합니다. 새 생명의 탄생, 아이들의 성장,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신체 스펙트럼, 병구완과 돌봄 노동, 죽음 이후의 상실감. 이런 현장은 ‘비정상’이나 ‘예외상황’이 아니라 우리 삶의 본질인 신체가 보여 주는 여러 얼굴들입니다. 따라서 몸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갈 때마다 이를 기준으로 일상도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상에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촘촘하게 협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복입니다. 

 

요약하자면 의생활이란 생로병사를 함께 감당하는 일상 속 관계의 총체입니다. 내 몸이 달라지더라도 여전히 내가 속할 수 있는 관계망이 존재한다는 안도감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됩니다. 이처럼 치유과정에서 생활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醫)라는 글자를 붙여 ‘의생활’이라는 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2. 쿠바의 의료 현실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양극단의 시각(공공의료로 보장된 건강 평등 對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이 존재합니다. 선생님은 쿠바의 의대를 다니며 그 현실을 직접 경험하셨는데요, 선생님께서 쿠바의 의대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쿠바 의료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을 꼽자면 치유와 일상의 상관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의생활이 가진 파워를 경험해 본 것이죠. 국제적으로 고립된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자국민들의 의생활을 튼튼하게 보호하는지, 그렇게 함양된 의생활이 치료과정에서 얼마나 값진 자원이 되는지를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쿠바 의료는 최신 기술을 뒤따라가지 못하는 투박한 의료입니다. 그러나 쿠바 의료의 목표는 주민들 생활에 최대한 밀착하여 실용적인 의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최신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기본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와 환자가 관계 맺는 기술이자, 주민들끼리 관계를 맺어주는 기술입니다. 쿠바 가족주치의는 의사로서 환자를 밀착하여 돌볼 뿐만 아니라, 같은 동네 주민이라는 동등한 위치에서 환자에게 자기 삶을 돌볼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환자가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묻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함께 모색합니다. 일상의 관계가 의료적 맥락에서 의논될 수 있는 무대가 열리는 거죠. 의료와 일상이 섞이는 ‘사이 공간’을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꾸려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이 네트워크가 두터워질수록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스스로 건강을 지켜내는 주민들의 역량도 커집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라포를 강조하는 것은 전 세계 의료 현장의 추세입니다. 그러나 쿠바처럼 의료가 주민들의 일상 깊숙이 파고든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저는 쿠바 의학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쿠바 의료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뉘는데, 제가 보기에 양쪽 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쿠바 혁명을 통해 공공의료가 제도적으로 정비되지 않았다면 쿠바 의생활이 이만큼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요. 동시에 현재 쿠바 사회가 처해 있는 여러 문제들(경제봉쇄, 의약품 부족, 관료주의 등)은 의생활을 근간부터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나 그렇듯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쿠바 의생활도 이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쿠바가 의료선진국으로서 명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자국민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개개인이 생활에서 실천하는 공생의 지혜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의생활은 쿠바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의생활의 중요성이 얼마나 뚜렷하게 인식되는지, 또 얼마나 튼튼하게 관리되는지는 각 공동체마다 다릅니다. 만약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도움을 주는 네트워크가 부재하다면 청년들은 부모가 되기를 망설일 겁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사회에서 고립된다는 두려움 때문에요. 병환과 사망의 경우 두려움의 정도가 훨씬 더 크겠지요. 그렇다면 조금 더 행복한 생로병사에 한 발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할까요? 쿠바의 케이스가 우리에게 의미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일 겁니다.


3. ‘쿠바에서 만난 생활의 치유력’이 이 책의 부제인데요, 책 내용을 보면 현대화되기 이전 사회, 그러니까 마을공동체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쿠바 치유력의 중요한 배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제 1세계에 속하며 기술발달의 앞자리에 위치한 한국에 사는 우리가 이런 치유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1세계의 ‘생활의 치유력’은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까요?


쿠바 마을공동체가 가진 힘을 ‘현대화되기 이전 사회’의 저력이라고 이해하는 시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오늘날 쿠바 마을공동체가 보여 주는 연대는 교육과 의료이라는 제도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힘입니다. 이 제도는 쿠바의 현대화를 꾀한 쿠바 혁명이 남긴 유산입니다. 혁명 이전의 쿠바 사회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파편화되어 있었고,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청산되어야 했죠.

 

그렇다고 해서 쿠바의 현대식 제도가 공동체를 완성했다고 결론 짓기도 어렵습니다. 쿠바의 사회주의 실험은 그간 수많은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일상에는 제도의 공백이 생겨났고, 공백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채우는 과정에서 연대의 힘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런 점은 현대화되지 않은 사회의 면모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제도와 비(非)-제도의 기묘한 협력. 쿠바의 독특한 배경 속에는 제1세계에서도 베낄 수 있는 생활의 치유력의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생활의 치유력은 생로병사를 함께 감당하는 관계가 만들어냅니다. 피상적인 관계나 규격화된 관계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깊은 관계’가 가능할까요? 국가 제도나 교환 경제보다 한 발 먼저 작동하는 자율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이런 관계는 이념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생활로서 체득되는 구체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관계를 맺고 사는 게 일상 유지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안에서 삶이 더 안전하고 재미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계를 함양하려면 안정적인 공간 확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제1세계에서 이동이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되었고, 그 여파로 마을이 해체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제도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쉽게 정착할 수 있는 마을 후보지를 여럿 확보해두어야 합니다. 정착은 지속가능한 생활 조건이 준비될 때만 이루어집니다. 지속가능성의 조건은 거주, 일자리, 의료, 교육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집세와 양질의 일자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청년들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또한 마을에 머무는 시간이 긴 편인 노인과 아이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인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병원 인프라와, 아이들이 굳이 수도권을 찾아갈 필요가 없는 교육 인프라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제1세계에는 이런 조건을 마련할 만한 자금력이 있습니다.

 

생로병사에 대한 정보 및 지혜를 순환시키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과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쿠바에서 가족주치의들은 의학 지식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마을 진료소는 주민들이 생로병사에 대한 고민과 감정을 격의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랑방 구실을 합니다. 쿠바의 가족주치의 제도를 그대로 베껴올 수 없다 하더라도 이와 대등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성의 네트워크는 꼭 필요합니다. 이 네트워크를 활발하게 움직이는 ‘촉매제’를 누가 맡을지는 창의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생사의 지혜를 전하는 철학자,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유도하는 상담사, 건강한 일상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활동가, 혹은 이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도 있겠지요.

 


4. 쿠바에서 의대를 다니셨는데, 어째서 지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의대를 옮겨서 다니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학업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 것은 저도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제가 아바나의과대학에서 2학년을 다니던 시기, 코로나발 팬데믹이 벌어졌습니다. 팬데믹의 여파로 저희 학교는 8개월 동안 수업을 중지했습니다. 쿠바에서는 인터넷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온라인 수업을 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죠. 의대생들은 공부를 하는 대신 길거리로 나가 방역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페스키사’라고 불리는 쿠바식 방역은 책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관광업 수입이 크게 줄자 쿠바 안에서 물자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쿠바 상황이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의대가 다시 시작된다고 해도 학업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학업을 마치는 데 우선순위를 두기로 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의대로 편입을 했습니다. 스페인은 쿠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다가 의료계 사이의 교류도 활발해서 가장 용이한 선택지였습니다.

 

저는 쿠바에 오기 전까지 의학 공부에 대해 전혀 뜻을 두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만큼 쿠바 의학은 제게 매력적인 탐험지였습니다. 쿠바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의학을 공부한다면 많은 것이 변하리라는 예감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경험한 사제관계나 의사-환자 관계는 제가 쿠바에서 배웠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거든요.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는 기분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시야가 넓어지고 쿠바 의료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도 생기게 되었어요.

 

현재 제가 경험하는 의료가 유럽을 비롯하여 제1세계에서 통용되는 ‘표준 의료’라면, 쿠바 의료는 철저하게 쿠바가 처한 현실의 맥락에 맞춰 구성된 ‘맞춤형 의료’입니다. 그럼에도 쿠바 의생활의 주인공들인 주민들의 저력은 지금도 제게 영감을 줍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태어날 때나 죽어갈 때나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고 행복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은 국경을 넘어도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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