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요와 불교산책

[요요와불교산책]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by 북드라망 2022. 12. 9.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쌍윳따니까야』 22:94)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깊은 산에 있는 사찰은 본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문들 중 첫 번째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기둥 하나로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고 한다. 일주문의 현판에는 보통 산 이름과 절 이름이 쓰여 있다. 그런데 역사가 오랜 절에 가보면 일주문에 앞서 사찰의 존재를 알리는 돌기둥이 있다.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본래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 높이 솟은 당간이 세워져 있었다. 당간이란 당(幢)이라고도 하고 번(幡)이라고도 하는 깃발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의 용도는 당간을 양옆에서 지지하는 것이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당간에 깃발을 걸어 행사를 알렸다고 한다.

선(禪) 수행자들을 위해 화두 48개를 모아 놓은 『무문관』 29칙에 이 깃발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인 혜능이 주인공이다. 당간지주에 매달린 깃발이 흔들리는 보고 두 스님이 다투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모든 시비가 그렇듯이 두 스님은 꽤 열을 올리며 서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요란하게 다투었던 모양이다. 그 절에 왔던 혜능이 한 마디 던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소리에 다툼이 멈추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아무리 천오백년 전 일이라지만 두 스님의 논쟁을 그저 덤앤더머 두 땡중의 어리석고 무익한 말싸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말 그렇다면 아무리 멋진 말을 했다 한들 혜능의 개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지만 내 생각에 아마도 두 사람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바람과 깃발 중 무엇이 더 근본적인지 따졌던 것 같다. 바람이 움직인다고 한 스님은 바람이 일차적이고 깃발은 부차적이라고 보았다. 바람이 능동이고 깃발은 수동인 셈이다. 다른 스님은 만일 당간에 깃발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바람이 불더라도 거기에는 흔들리는 것이 없었을 터이니 이 상황에서는 깃발이 더 근본적이라고 본 것 같다.

바람이냐 깃발이냐를 따져 묻는 것은, 물질이 근본적인가 정신이 근본적인가, 유신론인가 무신론인가, 자아는 실체인가 아닌가,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논쟁들만큼 두 스님에게는 공부로 쌓은 도력과 내공을 다투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두 스님은 자신들이 아는 온갖 지식을 인용하고 근거를 대며 논쟁하고 있지 않았을까. 주위 사람들 역시 그들의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혜능이 개입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은 그대들의 마음입니다.” 혜능은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기 바쁜 두 스님에게 그 한마디를 던졌다. 『무문관』은 혜능의 개입이 그들의 다툼을 한순간에 그치게 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그것이 좀 의심스럽다.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보야, 지금 문제는 깃발도 바람도 아니고, 집착 때문에 동요하는 네 마음”이라고 말한들 귀에나 들어오겠는가. 만일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해서 지금 흔들리고 있는 네 마음을 보라’는 그 한마디 말로 다툼이 그쳤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주인공인 혜능대사가 아니다. 오히려 논쟁의 장을 떠나 성찰의 장으로 즉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그 이름 없는 스님들이야말로 우리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위험하다
나 역시 하루하루 ‘바람이냐, 깃발이냐’와 같은 문제 앞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일상에서 내 생각과 다른 견해들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혜가 자라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더욱 유능해지거나 도통할 만도 한데 희한하게도 그게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소통의 능력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이 되는 사람도 많으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도를 넘고 있다. 최근 나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검색하다 댓글의 혐오와 조롱의 수준에 기함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표현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다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남을 이겨 먹으려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기원전 5~6세기, 붓다의 시대는 수많은 자유사상가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붓다 역시 새롭게 등장한 자유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기 경전인 『범망경』에서 붓다는 당시 그와 어깨를 겨눈 자유사상가들의 견해가 62가지라고 자세히 알려준다. 그렇게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자신이 옳다며 논쟁을 벌이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붓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니까야』의 곳곳에는 많은 도전자들이 찾아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해 봐라. 어디 한 번 진검승부를 가려 보자’는 식으로 붓다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붓다는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기보다 자신은 특정 견해에 이끌리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것은 논쟁을 피하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붓다는 모름지기 논쟁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이겨서 세상의 명예와 칭찬을 얻고자 하는, 도전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보고 말하는 수행자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고 말하는 수행자들과 이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들과 이견을 갖게 되면 논쟁이 있게 되고 논쟁이 있으면 싸움이 있게 되고, 싸움이 있게 되면 해침이 있게 됩니다. 올바른 수행자는 이견, 논쟁, 싸움, 해침을 자신 안에서 올바로 알아차려서 그러한 견해를 버리고 다른 견해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올바른 수행자는 견해를 버리고 견해를 떠납니다.(『맛지마니까야』 74 『디가나카의 경』)


이 말을 수행자는 어떤 견해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우리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느낌과 견해와 의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견해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살아온 경험과 사회적 배경, 맥락과 조건에 의지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생겨난 견해는 없다. 그러니 견해는 조건적이고 변화하는 것이며 고정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다. 견해도 우리의 몸이나 자아와 마찬가지로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처럼 무상한 것이다. 그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자신의 견해에 탐착하고 다른 견해를 가진 상대방에 대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다고 비난한다면 그는 스스로 만든 견해의 그물-아집과 독단에 사로잡힌 것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참으로 뛰어넘기 어려우니, 생각을 깊이 하더라도 독단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러한 집착 안에서 독단을 취하기도 하고 또한 버리기도 한다.(『숫타니파타』785)


자신의 견해로 완결되어 있는 사람은 나만 옳다는 교만으로 미쳐있고 자만이 넘친다. 붓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번뇌-집착, 승부욕, 분노, 원한, 억울함, 복수심, 후회-를 올바르게 알아차리라고 요청한다. 알아차림 없이 분별 망상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런 망상들에 붙들려서 산다면 남을 해치고 자신도 해치게 된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붓다는 우리를 괴로움으로 이끄는 것이 갈애와 집착이라고 말한다. 집착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인 욕취(欲取),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인 계금취(戒禁取), 견해에 대한 집착인 견취(見取), 자아에 대한 집착인 아어취(我語取)가 그것이다. 그런데 견해에 대한 집착은 다른 세 가지 집착에 밀접하게 의지하고 있다.

내가 어떤 견해를 갖는가는 우리의 경험과 느낌에 강하게 의존한다. 나의 경험과 느낌이야말로 욕망의 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내가 집착하는 욕망은 내 견해를 좌우하는 힘을 행사한다. 견해에 대한 시비 판단은 욕망만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계율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란 우리가 은연중에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내면화한 도덕적인 잣대에 대한 집착이다. 그 또한 견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 우리는 자신의 견해나 생각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내 생각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그가 나의 존재를 부정이나 한 듯이 쉽게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네 가지 집착 중 견해에 대한 집착은 나머지 세 가지 즉 욕망에 대한 집착, 도덕적 판단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수행자는 이런 집착들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고, 붓다는 이런 집착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붓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해탈된 수행승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누구와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쓰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에서 쓰는 말을 사용합니다.(『맛지마니까야』 74 『디가나카의 경』)

 
붓다는 싸우지 않는 사람이다. 그것은 붓다가 세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존재라거나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홀로 자신의 평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상 실존한 고따마 붓다 역시 깨달은 이후 45년의 생을 길 위에서 풍찬노숙하며 대중을 만나는데 헌신했다. 그의 삶은 곧 그가 남긴 말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의 말을 사용하되, 그 말에 집착하지 않았다. 누구와 말하느냐에 따라 붓다의 말은 천변만화한다. 모든 말이 방편이고 각 사람의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이었다.


무릇 모든 개념과 견해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자연과 욕망과 사유의 흐름을 언어의 틀 안에 고정시키고 가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 갇히지 않고 그것이 설해진 배경과 맥락, 말 너머의 현실까지 폭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들리지 않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야 한다. 말로 표현되는 개념과 견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것이다. 지혜의 눈으로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끝내 견해에 대한 집착으로 끝없는 논쟁의 세계에 갇히고 말 것이다.

논쟁의 능력이 찬탄의 대상이 되고 스펙이 되는 세상에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견해를 떠나라는 붓다의 생각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른다. 붓다는 견해의 유혹과 위험을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 철저함으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설한 가르침조차 뗏목처럼 여기라고 한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듯이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 역시 말과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쌓아간다. 설령 대부분의 시간을 ‘바람이냐 깃발이냐’를 따지는 논쟁의 세계에서 좌충우돌 헤매더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의 동요를 잘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오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다.

 

글_요요(문탁네트워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