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에 매인 '경금'의 공동체 밥상 입성기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2017년 말 워크샵에서 다음 해의 공동체 주방을 운영하는 매니저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같이 할 파트너를 찾던 어느 날, 공부방에서 당시 공동체 주방이었던 주술밥상 매니저와 마주쳤다. 회계 등등의 인수인계 잡무와 내년 운영 계획 등이 오가는데 분위기가 점점 예민해졌다. 결국은 언성이 높아졌다.
친구: 그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그동안 여섯이나 했다는 거야?!
나: 같이 하겠다는 사람이 없잖아! 그럼 혼자서라도 해야지!
우리 둘은 씩씩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친구가 다시 말을 걸었고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친구는 기존의 매니저 여섯 중에 할 수 있는 사람을 좀 더 물색해보자고 했다. 이미 그들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던 나는 다들 부담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그날 나와 함께 공동체 밥상을 맡을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는 상황, 그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적절한 말도 찾지 못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2016년 공동체 밥상이 파지사유로 내려오면서 ‘주술밥상’ 시대가 열렸다. 주술밥상은 공동체의 밥상과 단품요리를 만드는 찬방을 함께 운영해 보겠다고 했다. 음식을 잘 하는 친구들과 기획력 있는 친구까지 합심해서 예술작품 같은 요리로 대박을 내보자는 야심찬 밥상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2018년 봄 나는 그 주방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저런 사단이 났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잘 해보자는 마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날 우리는 제각각 마음이 좀 상했다. 나는 그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새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 혼자서라도 공동체 밥상을 책임지겠어!
일인가구인 나는 공동체 밥상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다. 그러다보니 채 소화시키지 못한 텍스트의 어려운 문장을 공동체의 밥상에서 소화시키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선물 세미나에서 ‘선물’이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선물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선물이 선물이지 도대체 뭔 소린가 싶었다. 그러다 주방으로 들어오는 선물을 기록해두는 ‘선물의 노래’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쌀은 기본적으로 선물로 해결 되었다. 여행을 다녀온 회원들은 산지 특산물을 주방 선물로 들고 왔다. 공동체에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 특식이라도 만들게 되면 그 재료는 대부분 선물로 충당되었다. 집에서 해결하기에 많은 양은 공동체 주방으로 흘러왔다. 그렇게 들어오는 선물들 덕분에 이 천 원으로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었고 주방 회계는 대부분 흑자로 마감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선물이 일 대 일로 교환되지 않고 밥상을 통해 공동체 전체 구성원들 사이로 순환되는 곳, 그 순환으로 공동체의 안녕이 지속 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 밥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내가 주방의 매니저로 나서는데 한 몫을 했다.
곡진함에 대하여
혼자라도 하겠다고 우겼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할 즈음, 주술밥상에서 매니저로 참여했던 다른 친구가 같이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둘 이름에 ‘은’자가 있다고 옛날 가수인 은방울 자매로 하라는 농담이 현실이 되어 ‘은방울 키친’으로 명명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매일 아침 주방으로 출근하면서 몸이 공간과 익숙해지도록 길을 들였다. 전날 말려둔 그릇들을 정리하고 흩어져 있는 주방집기들의 자리를 정해 수납했다. 주방 등도 LED 등으로 바꾸었다. 한층 밝아진 주방에서 밥당번들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 마디씩들 하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밥당번을 하러 온 친구에게 냉장고에 박혀 있던 탄 밥이 드문드문 섞인 찬밥의 처치곤란을 하소연했다. 그 밥이 점심 밥상에 까만 점이 맛있게 박힌 주먹밥으로 재탄생했을 때 정말 기뻤다. 매니저의 고충을 귀담아 들어준 친구의 마음도 그렇고 공동체 밥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순환의 진면목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기』를 읽을 때 칠십 편의 열전에서 느낀 감흥을 살려 홈피에 매달 ‘밥상열전’을 썼다. 한 친구가 주방에서 쓰는 무쇠 압력솥이 너무 무겁다고 적당한 새 압력솥을 선물했다. 그 솥으로 당시 주역을 공부하던 이문서당 2분기 쫑특식에서 사십인 분의 밥을 해내었다. 그 날의 사십인 분의 비빔밥을 먹은 이문서당 동학들은 어려운 주역 공부의 시름을 위로받았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이 여름에 인문학 캠프를 열었다. 그 때 공동체 밥상에서 다섯 끼를 차려냈다. 닭볶음, 바지락스파게티, 도토리묵밥, 야채비빔밥, 닭가슴살너겟, 떡볶이 등등이었다. 밥당번으로 나선 친구들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활약으로 가능해진 밥상이었다. 김영민이 쓴 『동무론』에 공동체를 꾸려가는데 필요한 요소로 구성원들의 ‘곡진한 노동’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공동체 밥상에서 펼쳐지는 이런 순간이야말로 곡진한 노동이 만든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일들은 밥상열전을 통해 이야기가 되어 ‘별일 없이’ 공동체 밥상이 차려지는 안부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 안부가 늘 평안할 수는 없었다. 주방으로 들어오는 선물들은 여전히 풍성했지만, 달마다 조직하는 밥당번은 늘 구멍이 생겼다. 나는 점점 회원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어떤 타이밍에 밥당번표를 내밀 것인가. 어떤 세미나에 가서 단품을 생산하자 제안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슬슬 나를 피하고 있다는 기운마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월초에 있는 운영회의에서 다음 달의 밥당번표를 돌리면서 밥당번이 부족하다고 내내 하소연했다. 그러면 늘 있는 일이 아니냐는 심드렁한 반응부터 빠진 회원 명단을 작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다보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여기가 함께 공부하고 밥도 먹는 공동체라면 ‘당연히’ 공부도 하고 밥도 해야지! 이런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동체를 꾸려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경금이 고수했던 원리원칙의 시간
작년에 양생 프로젝트에서 사주명리를 공부했다. 사주 명리에 의하면 나의 일간은 ‘경금’이다. 경금은 “원리원칙적이고 구조화를 잘 시키고 정의감을 가지고 호전적으로 세상과 맞서려” 하는 기질을 지닌다고 한다. 공동체에 와서 동양고전을 공부하면서 원리원칙을 좋아하는 나의 기질이 더 기승을 부렸다. 고전의 문장은 사유로 벼리지기도 전에 원칙으로 읽히기 일쑤였다. 공동체 밥상을 보살피는 자리에서는 차질 없이 끼니마다 밥상이 차려지는 것도 나의 원칙이 되었다. 밥당번표가 한 곳도 빠짐없이 꽉 채워지는 것도 당연하게 포함되었다.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니 시도 때도 없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에 의하면 경금은 원칙을 강하게 내세우다보니, 그것이 현실화되지는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더 세차게 내세우려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혼자서라도 밥상매니저를 하겠다고 우기는 나와 딱 겹쳐진다.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고 싶은 정의감으로 공동체 밥상에 입성해서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원칙을 내세우는 경금의 활약, 고백하자면 내가 제일 힘들었다. 밥상을 못 차리는 사태가 일어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이 피곤했다. 어느 순간부터 밥상의 안녕보다 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몸에 힘 좀 빼라는 친구의 충고라도 들으면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그럼 니가 해보든지!’ 라고 응수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2020년 1월,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적인 모임을 금지하는 조치가 속속 실행되면서 공동체에서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는 일상이 사적인 모임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 와중에 코로나 상황은 빠른 속도로 심각해져서 세미나들이 줌으로 대체되고 공동체의 밥상도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시쳇말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색은 못했지만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세웠던 원칙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바이러스의 번성이 밥상을 닫게 할 수도 있는 경험은 지난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막상 밥상 문을 닫아보니 나의 원칙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 원칙 때문에 내내 밥상을 차려졌다고 여겼던 내가 보였다. 사람과 선물이 순환되면서 지속되는 공동체의 안녕은 한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때를 맞춰준 결과였을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날뛰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나의 꼴이 참 한심했다.
앎은 사후약방문이다
공동체 밥상이 차려지지 않는 내내 옛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공동체 밥상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집안에서도 살림을 하던 터라 자신만의 레시피가 두둑한 이들이 꽤 있었다. 다 아는 맛도 그들이 만들면 풍미가 깊었고, 새로운 맛은 오감을 자극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밥당번은 두 사람이 함께 했는데, 세미나를 함께 하는 동학일 수도 있고 주방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간은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느낀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뒷담화로 양념을 하는 시간, 이 공부 공동체에 대해 서로서로 알게 된 정보를 나누면서 밥을 익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밥당번을 몇 번쯤 거치면서 주방의 집기가 눈에 익고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다보면 공동체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 붙었다. 나 역시 이런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점점 세미나를 하러 오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은방울 키친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동안 세 명의 매니저와 함께 일했다. 첫 번 짝은 주술밥상에서도 활동했던 친구로 공동체 밥상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 조목들을 전수해 주었다. 당시 그 친구의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나 혼자 밥상을 꾸려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내줘서 참 고마웠다. 결국 그 친구는 취직을 하게 되면서 매니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다음은 세미나를 같이 해본 적은 없는 친구와 함께 일했다. 그러다보니 밥상 운영 회의보다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시간이 더 길어지곤 했다. 그래도 음식 잘 하는 그 친구 덕분에 식재료 장보기 등이 훨씬 수월해졌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오래 함께 하지는 못했다. 다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함께한 짝은 서당 교사를 할 때 학부모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텃밭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던 친구라 텃밭활동을 함께 한 이력도 있었다. 우리 둘은 죽이 척척 맞아서(그 친구가 나에게 맞춰 줬을 수도 ㅋ) 텃밭에서 바지런히 키운 열무로 김치를 담궈서 밥상에 내는 뿌듯함도 누렸다. 요리 솜씨까지 특출 나서 공동체에 소문난 밥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집에서는 가족들을 건사해야 하고 공동체에 나와서는 공동체의 밥상까지 챙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고단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밥상을 받은 친구들이 보이는 무한한 감동을 보며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서 노고의 기쁨도 느끼는, 그래서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일이기도 했다.
코로나는 여전히 맹렬하고 열 명,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은 요원해 보인다. 그 사이 공동체도 더 작은 규모로 나뉘어졌다. 공동체 밥상인 은방울 키친도 문을 닫았고 나의 공동체 밥상 매니저 활동도 종료되었다. 그리고 파지사유에 ‘공식당’을 열었다. 파지사유에서 활동하는 상근자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하고 소수의 인원들이 뚝뚝 떨어져 앉아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한다. 그동안 공동체 밥상에서 익은 버릇 때문에 묵묵히 밥만 먹지는 않지만, 예전처럼 공동체의 온갖 안부가 뒤섞이는 동네 우물가 같은 수다의 공간은 사라졌다. 그제야 우리가 지나 온 시간들이 실감되었다. 달마다 행사를 기획하고 해마다 인문학 축제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함께 모여서 웃고 떠들었던 시간, 사람이 뒤섞이고 온갖 음식이 흘러 다녔던 분위기, 그 때가 참 좋은 삶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앎은 지나고 나서야 온다고 했던가. 사후약방문격이다. 어느 날이었다. 사십인 분도 거뜬히 해내는 뻑적지근한 점심과 달리 공부방에서 공부하는 운영회원 대 여섯이 저녁을 먹은 날이었다. 주술밥상 매니저 일을 인계하면서 나와 언성까지 높였던 친구가 밥당번을 했다. 다들 언제 이렇게 솜씨가 좋아졌냐 신기해했다.
친구: 나의 음식 솜씨는 주술밥상 전과 이후로 나뉜다. 이제 집 식구들도 인정해. 공동체 밥상이야말로 노력 대비 만족도 높은 가성비 짱인 곳이야~
맞다. 밥상의 안녕 때문에 제풀에 지쳤다가도 그 한 끼를 먹고 나면 마음도 한껏 느긋해져서 다시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무쇠 같다는 경금이 연마되기에 이만한 가성비를 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나에게 공동체 밥상은 그런 곳이었다.
글_기린(에코n양생실험실 인문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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