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관리’에서 ‘사유’로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야!’ 우리 시대 가장 흔한 덕담일 것이다. 건강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건강하지 않으면 당장 고통스럽고 일상이 파괴되니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한 건강 관리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며 삶의 많은 에너지를 여기에 투자한다. 매일 건강에 관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자연스레 이 정보에 눈길이 간다. 이들 중 내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골라 하나라도 더 실천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쓴다. 특히 ‘코로나 19’라는 신종 전염병이 우리의 일상을 덮치면서 다시 한번 건강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되었고, 매사를 조심하는 태도까지 덧붙여 이렇게 외친다. ‘오직 건강만이 살길이다!’ 아마도 이 외침은 더 강해질 것 같고, 어쩌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지배하는 논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철저한 건강 관리’가 최고의 삶의 기술이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건강 그 자체는 없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관심과 습관을 문제시한 철학자가 있다. 그는 스스로 ‘철학적 의사醫師’를 자임한 사상가이다. 그는 철학이란 “민족, 시대, 인종, 인류의 총체적인 건강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니체, 『즐거운 학문』 「서문」, 책세상, 27)이라 했다. 니체는 ‘철학적 의사’란 말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개인의 건강 관리가 아닌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문제로 전환한다. 그는 의료인들이 만들어 놓은 건강에 대한 외부기준에 우리의 삶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야말로 내 안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몸과 삶의 조건에서 사유되어야 하는 것임을 말한다. 건강에 관한 니체의 사유를 따라가기 위해 ‘영혼의 건강’이라는 그의 글을 한번 보자.
건강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을 그처럼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는 비참한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무수히 많은 종류의 육체적 건강이 있다.(니체, 『위의 책』, 195)
‘건강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고 행했던, 이제 기댈 곳이라고는 건강밖에 없는데, 그런 것은 애시당초 없다고? …… 생각해보면 우리도 건강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개념과 실체를 가지고 지금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건강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은 있지 않을까. 이 최소한의 것들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몸을 움직이고,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것에서 수칙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소박하게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이것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건강 검진과 같은 것을 활용해 자기 몸을 정기적으로 체크하고. 무리하게 일하지 않고, 자주 충분히 쉬어 주고,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고 등등. 또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새로 개발되어 나오는 바이오 관련 건강 보조 식품을 몇 개 먹고, 특히 비타민을 잘 챙겨 먹고. 뭔가 자꾸 늘어나고, 가끔 ‘이렇게 하면 진짜 건강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이럴 땐 언제나 ‘부자들이, 선진국들이 다들 이렇게 하잖아!’, ‘의사들이 이렇게 추천하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이렇게 우리는 언젠가부터 ‘부자 = 선진국 = 성공적인 건강 관리 = 잘사는 삶’이라는 도식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도식이 최근 약간의 틈을 보이고 있다. 이 도식이 쉽게 깨지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의심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도식의 모델이었던 유럽과 미국이 코로나 19라는 신종 전염병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물론 이 도식을 주도해왔던 세력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도식이 여전히 옳다고 믿고 ‘백신과 치료약’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백신과 치료약’이 나오면 과거의 생활 패턴은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경고하는 바로 그 믿음, 즉 ‘건강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신념이 또다시 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신념은 니체가 ‘비참한 실패’를 예고했다. 그렇다면 ‘건강 그 자체는 없다!’는 니체의 선언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불어 니체가 던져준 ‘무수히 많은 종류의 육체적 건강이 있다’는 명제는 또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건강 그 자체가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신화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있지도 않은 건강을 정의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데 삶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패턴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직 건강만을 추구하는 의지는 편견과 비겁, 일종의 세련된 야만과 후진성일지도 모르기”(니체, 『위의 책』, 196) 때문이다. 니체의 이 말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건강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살펴보자. 우리 주변에 ‘성공은 건강 관리에서 온다’는 생각을 하며 철저한 건강 관리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결국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는 건강한 삶을 제1의 가치로 추구하면서 일상의 많은 것들은 놓쳐버리고 그저 ‘정상 혈압’, ‘정상 체중’, ‘동안童顏’ 등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한 부류는 건강에 좋다면 안 해본 것이 없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질병과 늙음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한 부류는 건강 관리에 성공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건강 관리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 둘 다 자신의 일상의 가치, 나아가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기는 마찬가지이다. 건강 관리 기준을 통과하고 남은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애쓴 만큼 우리는 ‘일상이 사라진 건강’, ‘존재가 왜소해진 건강’, ‘생생生生하는 삶이 없는 건강’을 붙들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굳건하게 꾸려갈 앎(삶에 대한 지혜)가 결여된 경우가 많다. 앎(삶에 대한 지혜)를 배우고 익힐 기회와 철저한 건강 관리를 맞바꾼 경우가 많다. 이것을 일상이 건강한 삶이라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건강과 삶이 분리된 신화를 붙들고 살아온 것이다. 이것을 붙들고 무엇을 할 것인가. 오래 붙들고 있으면 망상이 되기도 하고, 더 강하게 더 오래 붙들고 있으면 ‘건강 중독’이 되기도 한다.
건강해서 뭐할라고
이제 우리는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삶을 왜소하게 하는 건강 관리가 아닌, 삶을 생성하고 확장할 새로운 지평의 건강이 있다. 니체는 건강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나의 삶을 갉아먹지 않기 위해서 ‘개별성’을 허락하고, ‘정상과 평등’을 잊어버릴 것을 주문한다.
개별적이고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머리를 쳐드는 것을 더 많이 허락할수록, “인간의 평등”이라는 도그마를 더 많이 잊어버릴수록, 그만큼 더 정상적 건강, 정상적 식이요법, 병의 정상적 진행 과정이라는 개념도 우리의 의료인들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니체, 『위의 책』, 195)
건강한 삶이야말로 비교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일상이라는 말, 삶이라는 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이 그렇듯이 건강이야말로 나의 내부에서 내 힘으로 풀어가야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누군가 경험한 정형화된 것이 있고,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이 아닌 것에 건강은 없다. 누구에게나 삶은 경험해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 건강 또한 경험해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고,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오늘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삶이 있듯이 오늘의 건강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건강이 지표화되고 수치로 관리가 가능하고 정상과 비정상이 있을 수 있다면, 그 건강은 삶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삶이 원래 있고, 이것을 성가시게 하는 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고, 멋진 놈인데 혈압(걱정) 때문에, 당뇨(걱정) 때문에, 비만(걱정) 등등 때문에,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미루거나 포기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시대 ‘성공적인 건강 관리’를 삶의 중심에 놓는 대부분이 이렇다. 정상적인 건강의 지표만을 붙들고 삶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건강에 비정상적인 지표를 가지고도 일상을 굳건하게 꾸려나가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건강한 삶인가? 어느 쪽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건강’, ‘위대한 건강’일까?
사실 나는 4년 전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오른손 엄지손가락 관절이 늘 아픈 상태였고 허리도 자주 아팠다. 감이당 공부는 온종일 앉아있어야 했고, 주역을 외우고 시험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엄지손가락 통증 때문에 이 일을 과연 지속할 수 있을지 몇 번이나 고민했다. 난 손가락이 아파서 못한다고 할까? 또 감이당에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허리에 좋지 않으니 공부 자체를 그만둘까? 등의 고민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건강을 철저히 관리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당장 아파서 병원갈 정도는 아니니 그냥 계속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통증은 그렇게 심해지지 않았다. 미리 알고 강도만 조정하면 견딜 만했기에 지금까지 왔다. 그렇다고 지금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질병과 통증, 그것이 무엇이든 그 자체를 나의 일상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습관은 내 몸을 더 민감하게 관찰할 수 있는 감각을 키워주었다.
내가 만약 당시 오직 건강만을 추구했다면 내 삶에서 주역과 감이당 공부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 무지했으며, 내 삶을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앎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당시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내 삶을 굳건하게 하는 데 필요한 앎을 이렇게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 어떤 건강도 삶과 맞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건강도 병도 내 삶 속에 있는 것이다. 건강도 내 몸과 내 삶에서 함께하는 것이고, 병도 내 몸에서 내 삶과 함께하는 것이다. 내 몸과 삶을 벗어난 건강과 병은 없다. 건강도 병도 내 일상의 삶 속에 품을 수 있는 것이 진정 건강한 삶이다. 그러면 우리는 예전보다 더 강하고 더 질기고 더 능란하고 더 대담한 태도로 삶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글_안상헌(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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