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니체사용설명서] 글쓰기, 나를 키워 세상을 품다

글쓰기, 나를 키워 세상을 품다


니체의 글은 ‘승리의 기록’이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가치의 전도’이고, ‘본성의 회복’이며, ‘자기극복’이자, ‘자기고양’으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니체는 이렇게 글을 썼다. 나아가 그의 글쓰기는 결코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았고, 어느 지점에서 만족해하며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그의 글쓰기는 ‘자신에게로의 귀환’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사상과 문체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때론 친절하게 글쓰기의 기술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그러니 오늘은 글쓰기에 관한 그의 친절한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보자. 그의 가르침은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들, 특히 ‘고전-리라이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재미있다.


내게로 들어오는 글


글은 우리가 세상을 만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특히 고전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길잡이로 삼을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고, 토론한다. 일부는 ‘고전-리라이팅’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글들이 내게로 들어오고 나를 통해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활동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젊은 작가들은 좋은 표현, 좋은 사상이란 그것과 비슷한 것 가운데서만 훌륭하게 보인다는 사실과 탁월한 인용구는 면 전체뿐만 아니라 책 전체까지도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인용구는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주의하라, 나는 보석이며 나의 주위에 있는 것은 납, 즉 빛 바래고 창피한 납이니까!” 모든 단어, 모든 사상은 자신의 사회에서만 살고 싶어 한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책세상, 297쪽)

우리는 글을 쓸 때 ‘인용문’을 중요시한다. 좋은 인용문은 나의 문제를 객관적이면서도 깊게 볼 수 있는 참조틀이 된다. 인용할 문장을 잘 선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의 사유를 집중하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주로 읽는 것은 ‘고전’이니, 이 책들에는 훌륭한 사상과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써야 할 때가 다가오면 이 책 저 책, 혹은 이 페이지 저 페이지를 오가며 ‘좋은 표현’과 ‘좋은 사상’을 메모하고 끌어모은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이다. 그동안 메모하고 끌어모은 글들은 대개 나의 사유를 넓고 깊게 해 주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보다는, 마치 난공불락의 큰 산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솔직히 더 많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과 ‘표현’ 앞에서 그저 시간만 보내다 억지로 양만 채운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왜 이럴까? 예전에는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내가 인용한 문장들은 분명 ‘보석’이 맞다. 그야말로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보석 주변에 납덩이와 같이 무겁고 빛바랜 나의 사유와 글을 올려놓고 말았다. 스스로 사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해야 할 딱 그 시점에 나의 사유를 더 끌어가지 않고 인용문으로 그 노력을 대신한 것이다. 훌륭한 사상과 문체는 그 사상과 문체가 살아날 수 있는 훌륭한 지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좋은 문체와 사상을 가져오고 싶다면, 나의 사유를 거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나의 사유와 문체가 내가 인용한 사상가의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풍성한 바탕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가 니체의 사상과 문체를 받아들여 자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존재의 질을 높이지 않고서는 니체를 읽고 쓸 수 없다. 내 존재의 질이 높아지는 만큼 니체가 읽히고 또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공부의 과제는 분명해진다. 내가 니체를 읽는다는 것, 니체의 문장을 필사하고, 때론 암송한다는 것은 니체의 사상과 문체가 나에게로 와서 자랄 수 있도록 나를 만드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내가 만들어지는 만큼 나는 니체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쓸 수 있다.

 

세상으로 나가는 글

 


나는 감히, 혹은 기꺼이 말한다. ‘니체가 읽힌다!’라고. 니체의 글이 나에게로 와서 내 삶의 자양분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이제 니체의 글이 나를 통해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감히 니체의 글을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아래 니체의 말을 기억하면서, 나는 기꺼이 니체의 글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들은 이 관례를 통해 대중과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관례는 청중의 이해를 얻기 위해 개척된 예술 수단이며, 수고스럽게 습득된 공통어이다. 그것으로 예술가는 실제로 자신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이 독창적인 것은 경탄을 받고, 때로는 숭배되기도 하지만 이해되는 일은 드물다; 관례를 완고하게 회피하는 것은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니체, 위의 책, 303쪽)


니체를 읽다보면, 나아가 니체로 인해 변화하는 나의 생각을 쓰다보면,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이미 남들이 다 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고민인 것이 ‘남들이 하지 않는 뭔가 특별한 것이 하나만 있으면 나의 니체 공부와 글쓰기가 멋지게 잘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만의 독창적인 무엇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 훈련과정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이라며 가져오는 경우들이 있다. 정말 가끔 신기하다고 칭찬받고,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부러움의 대상이 잠시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글의 형식도 설득력이 없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 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이해 불가’, ‘소통 불가’인 글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니체의 글이 독창적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해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는 독창성이 아니다. 니체는 글쓰기에서 독창성보다 소통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그리스 고전문헌학에서 배운 호메로스의 글을 탐구하면서 호메로스의 글은 자신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4분의 3이 관례를 따른 것(니체, 『위의 책』, 302)임을 강조한다. 그 관례는 당시 대중들과 소통을 위해 고안되고 개발된 예술 수단이자 공통어였다는 이유에서다. 글을 쓸 때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소중한 소통의 수단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대중과의 소통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담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을 고안해내야 한다. 니체의 글쓰기가 그랬다. 그가 강조하는 글쓰기의 기술은 경탄과 숭배보다 대중들의 이해가 더욱 중요했다. 니체의 대표적인 문체인 아포리즘은 그 자체의 독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에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니체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초반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니체가 자신의 문체를 바꾸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민한 것은 어떤 글쓰기가 현대인들을 ‘자기 극복이 가능한 사유’를 하게 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니체는 자신의 글을 통해 현대인들의 사유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우리의 사유가 시대에 너무나 갇혀있기에 또 우리의 사유가 형이상학적 희망에 너무나 갇혀있기에 니체가 읽히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유를 바꾸고, 나아가 삶을 바꾸려는 의지만 있다면 니체는 정말로 어려운 사상가가 아니다. 읽기가 ‘나’라는 존재의 깊이와 크기가 문제이듯, 글쓰기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나를 키워야 쓸 수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키우는 좋은 방법은 ‘생활 철학 에세이’이다. 다시 말해 니체를 통해 변화하는 자신의 생각과 일상을 진솔하게 기록하는 것! 일명 ‘내 삶의 철학자-되기’이다. 물론 이것을 니체를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다시 읽고 토론하면 가장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과의 소통은 우리가 자유롭게 사유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구속일 수 있다.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부담감은 분명 구속이지만, 니체가 가르치는 글쓰기는 이러한 구속 속에서 자유롭게 서고, 걷고, 뛰고, 날고, 춤추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내가 존재하는 만큼, 또 그 방식에 따라 나는 니체를 쓸 수 있다. 니체는 이를 중력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심지어는 얼음판 위에서도 춤추고 물구나무서서도 춤출 수 있는 가볍고 유쾌한 존재가 될 것을 주문한다. 중력을 회피한다면 내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어렵듯이 나의 글쓰기가 세상과의 소통을 회피한다면 그 글은 나와 세상을 키우는 자양분이 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중력 속에서 중력과 더불어 그 질이 높아지고 깊어질 수 있듯이 나의 글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꽃피고 자유로울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나와 세상


읽고, 필사하고, 토론하고, 암송하면서 니체의 글은 쉬지 않고 나에게 들어온다.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니체를 세상으로 내보낸다. 이 과정에서 나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지고 있을까? 또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또 내 글을 보는 사람들, 또 보게 될 사람들은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바뀔까? 물론 당장 무언가를 기대하는 질문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니체가 들어오고, 나를 통해 니체가 다시 세상에 나가는 것을 지속할 뿐이다. 그만큼 니체를 통해 나를 보는 힘이 커질 것이고, 세상을 보는 힘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 속에 나와 세상에 대한 지향점이 하나 생겼다. 니체는 사유와 글쓰기를 통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책세상, 392; 번역 일부 수정)는 차원으로 나아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 니체를 읽고 쓰면서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도 분명하다. 나의 글쓰기는 니체가 열어놓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대하게 긍정’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여, 글쓰기는 나를 키워 세상을 품는 활동이다.

 

글_안상헌(감이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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