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신간!『스토리 동의보감』 지은이 인터뷰

『스토리 동의보감』 지은이 인터뷰

 

1. ‘스토리’라는 키워드가 『동의보감』과 연결되는 것이 신선합니다. 많은 분들이 ‘『동의보감』’이라고 하면 병이나 처방전, 약재나 그 효능 같은 것들을 떠올릴 듯한데요. 『동의보감』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들이 우리가 아는 ‘옛날이야기’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동의보감』 속 스토리들은 의사가 왜 이런 병이 났는지를 진단해서 치료하는 이야기인데요. 그 치료라는 게 침이나 약보다 의사의 재치와 지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환자를 웃기고 울리는 건 기본이고요. 화나게 만들기도 하고 속이기도 합니다. 애인과 이별해서 상사병 때문에 불면증에 걸린 여인은 화나게 해서 잠들게 하구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독한 우울증에 걸린 남자에게는 웃겨서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들어요. 산에서 버섯을 잘못 먹고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병에 걸린 여인들에게는 그 산의 흙탕물 한 그릇을 먹여서 고치기도 하죠. 한겨울에 추워하는 환자에게 차가운 물을 끼얹기도 하고요 아이를 땅바닥에 굴리기도 합니다. 충(蟲)하고는 대화까지 해요. 환자가 약 이름을 부르게 해서 충이 대답을 못하면 그 약을 처방합니다. 약을 지을 때 약 이야기를 하면 충이 듣고 도망갈까 봐 말조심하며 약을 짓습니다. 


  환자 스스로가 치유의 길을 찾기도 하죠. 먹을 것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깊은 굴에 빠졌을 때는 곁에 있는 뱀을 따라 이슬을 마시며 뱀과 동거하는 게 치료입니다. 전쟁 통에 산으로 피신 같다가 소나무 잎을 먹으며 삼백 살까지 사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먹을 게 없어 하는 수 없이 굶었는데 그 덕분에 신선이 되기도 하고요. 병을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병으로 병을 치료하는 거죠. 정신병을 설사로 낫게도 합니다. 반전과 반전의 반전이 이어지고 아이러니와 역설이 가득합니다. 무엇을 병이라 해야 할지 규정하기가 힘들어요. 치료에 대한 우리의 상식도 깨 버립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옛날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아무개가 살았는데”로 시작하면서 주인공의 이름이나 시대, 장소가 정확히 나오는 경우는 드물죠. 그런데 『동의보감』 속 스토리는 시대와 나라, 환자의 이름과 의사가 누구인지 정확히 나옵니다. 역사적 사건임을 알 수 있게 하죠. 그런데도 옛날이야기처럼 실제인지 허구인지 경계가 모호한 이야기들이 많아요. 그게 또 매력이죠. 그리고 치유의 이야기들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에 병이 나자 간(肝)을 담당하는 신이 나타나서 자기를 살려 달라고 환자에게 사정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간신(肝神)은 푸른색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오행으로 볼 때 간은 목(木)이고 목의 색은 푸른색이기 때문입니다. 또 산의 독버섯을 먹고 웃음 그치지 못하는 여인들에게 그 산의 흙탕물을 먹이는 것은 웃음은 양이고 흙탕물은 음이기 때문이지요. 음양의 균형을 이루는 게 치료로 보입니다.  
  

2.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동의보감』의 스토리들을 모으게 되셨을까요? 그 계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선은 재미가 있어서였어요. 감이당에서 『동의보감』 세미나를 하면서 리뷰를 쓰게 되었는데요. 무얼로 쓸까 고민이 되었죠. 워낙 책이 두껍고 용어들이 낯설어서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찬찬히 넘겨 보았는데 짧으면서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보이는 거예요. 가뭄에 단비 같았죠. 계속해서 보니까 군데군데 드문드문 하나씩 있는 거예요. 


  그리고 현대의 치료와는 다르게 『동의보감』 속에 나온 치료의 스토리는 누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로 병이 났는지 구체적으로 나올 뿐 아니라 치유의 과정도 아주 생생하게 의사와 환자가 지지고 볶는 과정이 나와요.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요. 그런 서사가 저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일으키더라구요. 너무 우스워서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어떨 땐 한숨도 나오고 어떨 땐 오싹하기도 하고요.


  일단 스토리 하나를 잡고 써 보았어요. 쓰기 위해 텍스트를 보니 그 내용이 그냥 읽을 때하고 다르더라구요. 환자의 아픔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고 병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어려웠던 한의학 이론도 조금은 알게 되고, 치유 과정을 통해서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돼요. 몸과 우주로 생각을 확장하게 돼요. 먼 귀양지에서 하나하나 문헌들 인용하면서 『동의보감』을 엮어 갔던 허준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왔어요. 이런 재미가 쏠쏠했어요. 또 매번 스토리가 다르다 보니 다음번엔 또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지더라구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세헤라자드가 들려주다가 남긴 이야기를 기다리는 왕처럼요.^^ 그래서 끝까지 이야기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3. 머리말에서 “치유의 스토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삶이다. 병 이전과는 다른 삶이다. 치유는 병 이전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새로운 삶의 길을 내는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동의보감』 속 이야기들의 어떤 점이 선생님께 이런 생각을 끌어내게 했을까요?


우리는 보통 병이라면 어둡고 괴롭고 침울하게 느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의보감』 속의 스토리를 대하다 보면 삶의 활력을 느끼게 돼요. 그게 아마 병으로 인해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걸 목격해서인 거 같아요. 아프면 반드시 다르게 살 궁리를 하게 되잖아요? 의사와 만나고 치유하는 것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삶이죠. 웃고 울고 속아 넘어가고 화내고 하는 삶이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삶이잖아요. 다르게 먹고 굶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하고 욕심을 줄이고 숨 쉬는 방법을 다르게 하는 것도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을 생산한 거죠. 물론 바른 방향으로 변해야 하지만요. 그래서 낫는 걸 보면 그런 새로운 삶을 몸은 요구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죠. 하지만 그 패턴에 또 안주하거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병은 또 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다시 몸은 병을 파견해서 삶을 바꾸라고 알려주는 거예요.


  의사는 삶의 방향을 트는 데 잠깐 역할을 했을 뿐이고 그것을 시작으로 환자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스토리는 암시하고 있어요. 『동의보감』을 보면 병이 너무 깊어졌거나 이전의 삶을 놓아 버리지 못하는 사람―예전처럼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거나 술을 참지 못하거나 고집이 센 사람―은 더 아프거나 죽게 되더라고요. 습관 하나 바꾸기가 너무 어려워요. 


  저만 해도 아프니까 감이당으로 오게 됐어요.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하고 의욕도 없었어요. 딱히 이유도 찾지 못했는데 여기 와서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이렇게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 가는지 조금씩 공부하면서 우울증이 없어졌어요. 그 아픔 때문에 감이당 공부라는 새로운 길을 내게 된 거죠. 


  우리는 보통 병 이전을 건강한 상태로 전제하고 치료하면 그때로 회복되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죠. 이미 몸은 변했으니까요. 우리는 건강이라는 것을 아프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병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죠. 환경은 계속 변하는데 우리 몸은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완전하다는 건 한번 적응하면 그대로 붙박이로 변하지 않는 건데 완전해 버리면 우주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죽게 되죠. 그 우주의 변화에 따라서 우리 몸도 변하려면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변할 여지를 남겨 두어야 변하는 거죠. 그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게 바로 병이에요. 병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조건인 거죠. 병이야말로 인생인 거죠. (그렇다면 우주도 완벽하지 않아서 계속 변한다고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러니까 병은 삶을 변하게 하기 위한 우주의 장치인 거 같아요. 그러니 병이 생길 때마다 치유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죠. 그 치유가 바로 다르게 사는 길을 내는 거죠. 계속 변하는 삶만 있는 거죠. 그럴 때야만 삶에 활력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됐어요. 병은 한편으론 고통이지만 한편으론 조물주가 우리에게 내린 선물 같기도 해요. 활기 있게 살게 하기 위한.
   
  
4. 『스토리 동의보감』 중에서 선생님께서 독자 분들께 가장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또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충(蟲), 내 삶의 동반자」를 추천하고 싶군요. 우리 몸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충(미생물)들이 살고 있는데요.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를 전하는 글입니다. 왜 우리가 수행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고요. 요즘 우리는 치료가 어려운 여러 병들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이런 병이 생기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충을 우리에게 해를 주는 벌레로 여겨 박멸하자는 쪽으로 살아왔잖아요? 제가 어릴 때는 대변 검사를 해서 회충약을 먹이는 게 학교가 하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즘은 위나 장에 유익한 균이 있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래도 충을 없애야 할 적으로 보통 생각하죠.  
  

그런데 『동의보감』에선 그들을 하나의 생명체로 정중히 대하고 있어요. 그들을 신령스런 존재로 생각해요. 그들은 우리 인간보다 변신하는 능력이 더 뛰어납니다. 물질까지도 충이 될 수 있어요. 어떤 사람이 아팠는데 의사가 토하게 해서 보니 병아리가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또 머리카락을 잘못 먹었는데 뱀처럼 자라서 나오는 이야기도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긴데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우리 몸이 얼마나 생명체가 자라기 좋은 조건인가를 알게 하죠. 『동의보감』에서는 충은 생명력이 강해서 계속 새끼를 치기 때문에 절대 없앨 수 없다고 합니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그 숫자가 우리 몸 세포 수의 10배까지 되고 그 종류도 300가지나 된다고 하니 『동의보감』의 내용을 실감할 수 있죠. 
  

충은 숫자로뿐 아니라 우리 몸의 요지를 다 점령해서 정신적으로도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호령하더라구요. ‘삼시충’들인데요. 우리가 ‘도 닦는 걸 싫어하고 뜻을 굽히는 걸 좋아한다’고 나와요. 생물학 용어로 말하면 인간 숙주를 조종하는 거죠. 저는 이 지점에서 놀랐습니다. 내가 내 의지대로 사는 게 아니구나. 얘들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구나. 우리가 도 닦지 못하고 윤회하는 게 얘네들 짓이라니 어떡하나? 또 ‘노채충’은 우리가 허약한 틈을 타고 들어와서 오장육부, 골수까지 파먹고 가족에게까지 옮아갑니다. 무시무시한 충이지요. 우리가 미워서 그러겠습니까? 그저 그들에겐 삶일 뿐인데 우리에겐 병증이 되는 거죠. 숫자로도 밀리고 지능(?)으로도 인간이 밀리니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인간의 면역계는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동의보감』에선 대적하기보다는 공생하는 전략을 택합니다. 경옥고 같은 보약으로 우리 몸의 힘을 길러서 함부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고요.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음덕을 닦으면 우리를 얕보지 못해서 날뛰지 않는다고 해요. 마음을 맑게 하고 치아를 맞쪼고 음식 조절하고 욕심을 끊어야 한대요. 이건 수행을 하라는 거잖아요? 충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도 수행을 해야 한다? 그동안 수행을 도덕적 이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동의보감』은 이게 몸이 요구하는 생리적 필요임을 과학적으로 그 근거를 알려 주니 절실하게 느껴졌어요. 또 내가 이러한 충들로 구성되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내가 충인지 충이 나인지 헷갈리더라고요. 어디까지를 나라고 해야 할지, 나란 있기나 한 건지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나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나를 고집하는 건 교만이고 아집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어차피 우리가 충들로 이루어졌다면 충들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충들을 다양하게 확보해서 저희들끼리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게 곧 내가 활기 있게 사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근대를 거치면서 타자가 섞이지 않은 깔끔한 내가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충을 나와 다른 이물질로 여겨서 안으로는 항생제로 죽이고 밖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깨끗하게 씻는 데 전력을 다했죠. 그렇게 충을 없앤 결과 아토피 같은 병이 생겼다고 생물학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면역계는 수십억 년 오랜 세월 동안 충을 상대로 이런 공존의 전략을 펴며 살아왔죠. 그게 삶의 활력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충들이 없어지니 관계 맺을 대상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충이 아닌 멀쩡한 세포를 충으로 착각해서 그런 식의 병증으로 관계를 하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충을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내 삶의 동반자로 보았습니다. 충뿐 아니라 만물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할지를 충은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 코로나도 외부의 충과 적절한 관계를 하지 못해서 생기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