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 음의 벡터를 따르라
송혜경(감이당 대중지성)
한 남자가 머리 위 태양을 이고 걸어가고 있다. 땀은 비 오듯 하고 목은 갈증으로 쩍쩍 갈라지고 눈의 초점은 풀려간다. 피부는 시커멓게 익어버렸다. 애써 그늘을, 물을 구하려하지만, 이글거리는 태양만이 정수리 위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 이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글자가 ‘더울 서(暑)’다. ‘날 일(日)’과 ‘놈 자(者)’. 글자 안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뭔가는 없다. 그런데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들더니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아! 이 남자 살았다. 그래, 아직 큰 더위는 아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 절기 이름은 소서(小暑). 그런데 아까 그 장면을 ‘다시 보기’ 해보자. 이상하다. 이 무시무시한 더위에 예상치도 못하게 웬 비구름이 몰려온 걸까? 그리고 이제 오히려 내리는 비가 더 문제다. 천둥번개에 폭풍까지 동반한 비가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내린다. 도대체 날씨가 왜 이런 변덕을 부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 오늘은 극적으로 돌아선 소서의 날씨 변화를 집중 탐구해보자.
한 여름에 음기(陰氣) 출현?
사실 태양이 가장 높게 그리고 오래 떠있는 때는 하지다. 그래서 하지가 가장 더울 거라고 예상하기 쉽다. 그렇지만 정작 혀를 내두를 정도로 더운 달은 삼복더위가 쪼로록 몰려있는 바로 그 다음 달이다. 즉 음력으로 6월, 양력으로는 7월인 미(未)월에 들어서야 우리가 생각하는 ‘소우 핫’한 여름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이때가 클론의 ‘도시탈출’이나 쿨의 ‘해변의 여인’이 울려 퍼지는, 우리가 기억하는 뜨거운 여름이다.(노래가 너무 올드한 거 인정!ㅋ) 하루의 시간인 미(未)시로 돌려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해가 오(午)시에 가장 높이 떠오르지만, 정작 우리가 더위에 지치는 때는 그 다음 시간 즉 미시(13:30~15:30)다. 말하자면 엄청난 양의 맥주가 준비되어 컵에 따르기 시작해서 맥주가 꽉 차서 넘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 절기력에 따라 살게 되면서 느끼는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풍경과 음양의 변화에는 늘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거다. 음양의 미세한 운동이 현상으로 드러나 사람의 감각으로 와 닿는 것은 언제나 한 박자 늦다. 그래서 우리의 감각으로는 여름의 5, 6번째 절기인 소서, 대서 즉 미월에 이르러야 여름이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미월은 음(陰)이 시나브로 움트고 있는 반전의 달이다. 미월의 미(未)자에도 이와 같은 뜻이 담겨있다. 미(未)자를 낯설게 응시해보자. 나무 목(木)과 한 일(一)이 결합된 모습으로 보인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木]가 이미 정점[一]을 지나친 모습이다.『오행대의』에서는 미(未)를 ‘어두울 매(昧)’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이 달을 양기[日]가 더 이상 자라지 않고[未] 음의 기운이 자라서 만물이 쇠해 가는 어두운 시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소서에 가장 눈에 띄는 기상 변화는 바로 장마다. 이는 한여름 음기가 불쑥 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포커스가 맞춰진 카메라를 쭈우욱~ 뒤로 물러서 지구 전체를 촬영해보자. 하지부터 가열된 적도의 지표면에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가 소서 무렵에 드디어 그 열기가 넘친다. 위의 비유처럼 맥주잔이 꽉 차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복사열이라고 하는데, 이 열기는 태풍에 의해서 위쪽으로 올라가고 북쪽의 찬 공기 즉 음기와 만나 장마전선을 형성한다. 다시 한반도로 줌 인! 이 시기 장마전선이 형성되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주변이다. 즉 장마는 뜨거운 양기가 극에 달해 내달려와 음기와 불안정하게 만나고 있다는 징표인 셈. 캬~ 그래서『유경도익』「사계일전숙주야장단각수」에서는 “이즈음 하늘이 어두워지는 저녁 8시경 동쪽 하늘에 견우성과 직녀성이 떠오르기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는 머리 위에 직녀별이 뜨고 남쪽 하늘에 견우별이 뜬다.”고 했던 거다. 즉 음양의 남녀가 만나 정(情)을 나누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는 게, 정(精)이자 비(雨)인 셈이다. 우리가 지상에서 폭염의 여름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하늘에서 음과 양이 교합하고 있다는 징표로 여름 장마가 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천둥과 번개 소리를 들으면서 무서워하기 보다는 음과 양이 얼마나 짜릿하게, 화끈하게 만나고 있을까를 상상해보자.^///////^
뭐?! 천둥과 번개, 장맛비가 모두 연인들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이런 젠장! 솔로들은 비 오는 날에도 우울해진다. 빈대떡에 막걸리를 퍼붓고만 싶어진다.^^
미토(未土), 양에서 음으로 우주의 벡터를 돌리다
재밌는 것은 지지(地支)에도 의식과 무의식 같은 층위가 존재한다는 거다. 의식의 층위로 드러나 보이는 미(未)의 속성은 뜨거운 사막 같은 흙의 속성이다. 그런데 미(未)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지장간을 살펴보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미의 지장간은 오행 중에서 음화[촛불;丁火], 음목[덩굴;乙木], 음토[텃밭;己土]로 음기 일색이다. 하! 뿌리까지 들춰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다. 겉은 열기로 폭주하고 있지만 안은 조그만 밭에 덩굴식물이 달빛을 받고 조용히 자라고 있는 정적인 분위기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미(未)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것. 응? 이건 무슨 소리?
일 년을 크게 보면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순으로 흘러간다. 자, 여기서 퀴즈! 다음 중에서 가장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관계는? ①목→화 ②화→금 ③금→수 ④수→목. 정답풀이를 해보자. ①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힘인 목기운이 불처럼 번져나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다. ③금의 수렴하는 기운이 응축의 기운인 수의 스텝으로 가는 것도 내리막에서 내달리는 것처럼 쉽다. ④스프링을 꾸욱 누르면 튀어 오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수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분도 매끄럽다. 그렇다. 정답은 ②번이다. 방을 어지럽히며 신나게 노는 어린애에게 방을 정리하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눈물 찔끔 나게 혼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맛난 것을 쥐어주며 달래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름[火]에서 가을[金]로 넘어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기운의 벡터를 확 돌려줄 수 있도록 어르고 달래줄 중재의 기운(土)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미토(未土)는 뿌리에 숨겨져 있는 음기의 조정을 받고 있는 지지로서 양에서 음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는 거다.
소서에는 폭염으로 한껏 뜨거워진 한편 장마와 홍수로 초토화가 되어버린 현장이 만들어진다. 왜냐? 우주의 흐름 중 여름[火]에서 가을[金]로 넘어가는 것, 즉 금화교역(金火交易)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진되기 때문이다. 까막까치가 자기 머리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듯 말이다. 그래서 미토를 ‘토중의 토’라 부른다. 우주의 벡터를 바꾸기 위해 끙끙거리며 치열한 현장을 견뎌내는 기운인 것! 이제는 궁금하다. 보이는 세상과 달리 우주의 흐름이 양에서 음으로 바뀌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포즈로 소서의 폭염과 장마를 견뎌야 하는 걸까?
미토의 미덕, 무심한 듯 시크하게!
고온다습한 소서의 기온은 몸의 활동에 많은 지장을 준다. 단전 즉 매일 양기가 드나드는 태양문은 이 시기에 고온으로 문턱이 좁아지고 다습으로 문간이 막혀서 순차적으로 들어가야 할 양기들이 경쟁을 일으켜 다투다가 오히려 들어갈 시기를 놓치고 만다. 당연히 몸의 바깥쪽은 뜨거워지고 안쪽은 찬 상태가 된다. 그래서 겉과 속의 온도가 현격히 차이가 나는 소서의 삼복더위에 삼계탕과 같이 뜨거운 음식을 챙겨먹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몸까지 도와주지 않으니 마음도 하나로 모아지기 힘들다.
소서를 즈음해서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다. 몸의 기운은 다 빠져버린 것 같이 피곤해 퇴근 후 쓰러지기 바쁘고, 회식이나 약속이 생겨 ‘치맥’이라도 먹고 마신 다음 날은 몸이 쉬이 회복되지 않는다. 봄에 샘솟았던 생기는 어디로 자취를 감춘 건지, 그때 야심차게 마음먹고 벌여놨던 일들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으나 밀도는 떨어지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사서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생각이란 걸 하고 있기나 한 건지 그저 하루 해 넘기기에 바쁠 뿐이다. 지금은 마음에 가을을 그릴 여유가 없다. 앞서 보았듯 화에서 금으로 넘어가는 상상력은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내일도, 그 다음 절기도, 그 다음 해도 살아가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참고가 될 수 있는 것이 농사다. 농사란 쉼 없이, 자연의 타이밍에 맞춰, 적절히 움직여 주는 것. 그러므로 농부의 시선에는 가을이 있고 내년이 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땐, 고개 들어 그들의 시선을 빌리자. 농사짓는 사람에게 소서는 가혹한 절기다. 신이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처럼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가물게도 했다가 장마로 물이 넘치게도 했다가 한다. 농부는 신의 장난 같은 그 기간을 미토처럼 묵묵히 버틴다. 잡초가 무성하면 잡초를 제거하고, 가뭄이 들면 갈라진 논에 물을 대준다. 장마로 논에 물이 넘치면 물을 빼준다. 그저 모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상황에 충실하다.
잡을 것인가 놓칠 것인가. 인생은 찰라, 인생은 타이밍~!^^ 맞다. 이 타이밍이 예술의 경지에 오르면 어디 가서도 밥 굶는 일이 없다. 소서에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이 예술의 경지에 오르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낚아채듯이!
그래, 요거다! 모는 양의 기운이 차고 넘치는 시기라 이제 알아서 잘 큰다. 우리가 벌여놓은 일들도 일단은 알아서 굴러가고 있다. 이게 목기에서 화기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는 화에서 금으로의 이동. 농부들은 이때 아무리 상황에 굴곡이 있어도, 즉 엄청난 비가 내려도 엄청난 폭염이 쏟아져도 수확의 중심이 되는 모는 그냥 둔다. 모를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하지 않는다. 대신 모가 잘 자랄 수 있는 주변 여건을 묵묵히, 꾸역꾸역 지켜간다. 물이 넘치면 빼주고, 가물면 물을 대주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이게 바로 결이 거친 금화교역을 통과하는 미토의 정신이다. 잘 생각해보면, 봄에 마음을 다잡고 벌여놓은 일들, 여름의 입구에서 무성한 잡초를 호미로 캐버리고 남긴 것들이 있었다. 火기 넘치는 늦여름 정신이 혼몽하겠지만, 차고 맑은 음의 기운을 끌어 떠올려보자. “당신이 올해 벌여놓았던 일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리고 질척함과 건조함을 오가는 현장을 농부처럼, 미토처럼 견뎌내자. 다가오는 어려움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넘기자.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음의 기운으로 지켜내면서!
* 독자 여러분께
하지를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덕에 밤잠도 없어지고 아침에도 눈이 번쩍번쩍 떠졌습니다. 저는 하지 동안에 드디어 이사를 했어요. 밤잠 미루고 부지런히 짐을 싸기엔 제격인 절기였죠.ㅋ 그러나 결국, 양기를 과도하게 쓰는 바람에 앓아누웠답니다. 그럼 음기는 괜찮은가? 아닙니다. 양기의 짝인 음기 또한 손상됩니다. 음양의 균형이 흐트러지니 몸이 성할 리가 없겠지요. 게다가 밤에 잠을 못자 음기가 쌓일 틈도 주지 않았으니 낮에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지 뭐예요. 참으로 비양생적인 하지를 보내고 말았네요. (언제부턴가 절기 후기가 반성문이 되어가고 있는 듯^^;;) 동철이 추천한 108배를 하든 등산을 하든지 다시 음기를 차곡차곡 쌓아놓아야겠어요. 그래야 남은 여름도 무더위에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지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자자자! 다들 더운 여름 잘 넘깁시다!
※ 병신년 소서의 절입시각은 7월 7일 오전 1시 03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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