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 넋이 나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만히 있어도 육수가 등줄기에서 삭은 내를 풍기며 줄줄 흐르고,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하릴없이 얼굴을 디밀고 있는다. 아.. 이 바람 또한 냉풍은커녕 열풍(熱風)이 아닐 수 없구나. 문득 주변을 떠올린다. 함께 공부하던 학원의 수강생 중 몇몇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소리 소문 없이 여름의 열기에 흩어져 버린 사람들. 나 역시 더운 나머지 약속이고 모임이고 그냥 바깥나들이를 포기하고, 집에서 엎드려 있고만 싶다. 해가 져 어둑어둑해질 무렵에나 비로소 숨통이 트인 듯 기어 나와 시원한 맥주를 탐욕스레 들이킬 뿐.. 하지만 저 원망스런 따가운 태양은 하루 온종일 도무지 질 생각이 없다. 왜 이리도 해가 긴 거야? 달력을 들여다보니 하지(夏至)로다.
한 인물은 다크서클이 창궐하고 한 인물은 눈이 완전히 풀렸다. 맞다. 여름에 이렇게 되기 딱 쉽다. 아~ 음기가 절실하다.
하지, 1년 중 태양이 가장 길게 드리워져 있는 때이다. 양기(陽氣) 충천! 여름의 화(火)는 발산의 기운이다.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활동이 격렬해지고, 가만히 있기보다 움직이기 좋은 시절이다. 움직이고 싶은데, 몸이 기운이 없다면? 내리쬐는 태양열에 더위 먹기 딱 좋다. 애초에 발산할 에너지가 있어야, 발산하든 말든 할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 연료를 그득히 채워놓고 있어야 뻥 뚫린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마음껏 기어를 바꿔 질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수렴하는 음기(陰氣)를 바로 자동차 연료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연료가 거의 떨어져 있다면, 아무리 고속 기어로 바꾼다 한들 엔진에 무리만 가고 과열되어 뻥 터질지도 모르겠다. 마치 더위에 정신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것 마냥.. 요컨대 지금이 하지라는 것은, 자동차로 보면 우리가 논스톱 하이웨이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오빠~ 달려!’의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질주는커녕 탈탈거리며 멈추면 ‘아~ 아쉬워라..’
하지는 이처럼 양기가 충만한 시절이기에, 우리는 그만큼 부족한 음기를 채워야 한다. 수렴된 기운인 음이 있어야, 발산의 기운인 양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 그럼 어찌하오리까? 자동차 연료를 수시로 채워야 하는데, 고속도로에선 한참 가야 주유소가 나오잖아요!? 마찬가지로 하지에는 양기 충천이라면서요, 하루 온종일 햇볕만 뜨거운데 어디서 음기를 얻나요!? 불만 섞인 항변이 터져 나올지 모르겠다. 걱정 마라, 양기만 있어 보이는 하지에도 음기는 어디엔가 잠복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 하지는 양기가 충천하다 못해, 아주 절정을 찍은 시기이다. 그 말은 곧! 양기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으며 동시에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음을 뜻한다.
꼭짓점을 찍으면 이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하지를 보면, 이때는 5양(陽)·1음(陰)의 시기이다. 복잡하게 볼 것 없이, 양이 전반적으로 우세를 보이고 있으나 저 밑에서 1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 음기는 너무 미약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괘상이 그렇다니 그저 애매할 뿐이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날은 선선함과는 거리가 멀고 더욱 더워질 뿐이다. 이런 더위에 그저 무기력하게 스러질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의 정성과 노력 여하에 따라 기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윤리이며, 조상들의 풍속이고, 삶의 기술인 셈이다. 이 글 역시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여, 우리 인간이 그에 어울려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미약하게 있는 1음을 나는 우리 스스로 키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양기가 득시글거리는 하지에, 음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의 윤리는 무엇인가? 바로 Reloaded 시즌 2이다.
새로고침, 시즌 2
Reloaded, 갱신 혹은 새로고침. 일 년 24절기 중, 이분이지(二分二至)라 불리는 4절기가 있다. 바로 춘분·추분의 이분(二分), 하지·동지의 이지(二至)이다. 특별히 이 4절기만 이렇게 묶는 까닭은, 해당하는 각각의 시절이 음양이 서로 교차하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춘분·추분은 밤낮이 같아지나 엄밀히 보면 춘분은 양기가, 추분은 음기가 더 우위를 점하는 시점이다. 또 하지·동지는 하지에는 양기가, 동지에는 음기가 절정을 찍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내리막을 걷는 시기이다. 주목할 점은 이분이지의 시절에는 음양의 양상이 다른 절기보다 현저히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도 그때를 중심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함을 알 수 있다. 양기가 도래할 때는 그에 맞는 일상을, 또 음기가 도래할 때는 그에 적절한 삶의 배치를 일궈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지의 4절기를 가리켜 총 4번의 Season으로 이뤄진 ‘절드(절기드라마)’ 라고 부른다. 이 ‘절드’의 타이틀은 Reloaded 혹은 갱신이다. 각 시즌마다 다른 양상으로 일상의 기승전결이 구성된다. 절기드라마의 감독·배우·작가는 바로 당신이다. 이미 당신은 시즌 1, 춘분을 연출하고 상영한바 있다. 기억이 나시는지?
하지, 여름의 4번째 절기이다. 봄의 4번째 절기는 춘분이었다. 그때 우리는 봄의 새로고침, 즉 주변 청소로 일상을 갱신했다. 춘분은 음양이 교차하는 시기로, 음기를 떠나보내고 양기를 맞이했다. 봄의 양기를 맞이하는 방법으로 내 주변에 들러붙은 묵은 것들을 깨끗이 청소했다. 하지인 지금은 어떤가? 양기는 더 맞이할 수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청소는 매일 하는 것이지만, 요즘처럼 날도 더운데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대청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일을 하나라도 늘리기보다, 하던 일을 무사히 지속하는 게 중요한 때다. 날도 덥고 지쳐가는 요즈음, 더위라도 안 먹으면 다행이다. 피로하고 만사가 귀찮은 나머지, 입춘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하던 일에 차질이 생기기 쉽다. 정신을 못 차리니 하던 공부와 일 혹은 세웠던 계획이 고비를 맞는다. 마치 자동차 연료가 고갈되어 탈탈거리는 것 마냥 지속력이 약해진 것이다. 지속하는 힘은 음기에서 비롯한다. 음기는 기운을 모아서 수렴한다. 하지는 겉으로 보기에 양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으나, 실제로는 절정에서 내려올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음기는 여전히 매우 약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음기를 북돋는 행동을 실천해야만 그 기운이 힘을 받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단순하게 봤을 때, 바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 양기를 쓰는 것이라면 음기의 수렴은 실내에서 차분히 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음기 기르기는 108배이다. 108배라고 하면 종교적인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혹여 거부감을 가질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종교적 색채와 무관하게, 일상에서 절을 올리는 행위는 예를 표하는 일이다. 108배는 자기 스스로에게 올리는 절이다. 절을 올릴 때 자기 신념에 따라 하면 그만이다. 다만 그것을 하지에 하는 이유를 아는 게 중요하다. 108배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음기를 기르는 운동이다. 바른 자세로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는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하체에 자극이 가해진다. 인체에 양기가 쏠리는 곳은 상체, 특히 머리 부분이다. 더울 때 더위를 먹는 것은, 머리 부위에 열을 너무 많이 받아 양기가 몰려 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양기의 태과(太過)인 게다. 게다가 거리에는 여자들이 훌훌 몸매를 내놓고 다녀, 남자들 눈이 돌아간다. 이 또한 화기(火氣)를 북돋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눈알은 충혈되고 심신을 피로하게 한다. 이래저래 여름에는 찐하게 자극하는 요소가 곳곳에 널려 있다. 음기를 기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체단련! 게다가 활활 타오르는 마음 또한 차분히 하는데 108배만한 것이 없다. 앞서 하지는 5양(陽)·1음(陰)의 시기라고 했다. 절정을 찍은 양기의 한복판에 음기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음기는 바로 하체단련에 숨어 있었다.
여름의 양기는 예(禮)로 다스리자
나는 올해 초부터 108배를 꾸준히 하고 있다. 덕분에 하체 부실에 열이 머리 꼭대기로 치솟아 두통과 안구건조증에 시달리고 무엇보다 울컥 버럭하던 성격이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다. 그것 모두 온전히 108배 때문이라고 하긴 어려우나, 거의 매일 지속하며 스스로 근기가 생겼다. 실제로 하루에 108배 한 번 하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으나 꽤 어렵다. 귀찮은 나머지 오늘은 넘겨? 하는 유혹에 솔깃하기도 한다. 보통 저녁 즈음에 하곤 했으나, 무슨 회식이다 저녁 약속이다 있으면 그냥 빼먹기 쉽다. 그래서 아예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다. 그러면 스스로 아~ 오늘도 약속을 지켰어! 라는 뿌듯함이 생긴다. 그것이 바로 지속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뿌듯함이다. 그런데 요즘엔 이마저도 쉽지 않다. 더위 핑계로 하루 이틀 거르는 날이 생기고 있다. 지속력에 고비가 발생한 것이다.
더우면 피로해서 그저 쉬고 싶거나 딴 생각이 든다. 문득 더위를 피해 멀리 바닷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떠나려면 일상을 내팽개쳐야 하는 무리수가 따르는 법. 정 그러면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으나, 양기가 충만한 하지에 음기를 보충할 수 있는 108배로 집안에서 피서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108배 후 샤워 한판! 108배 후 시원한 드링크 한 잔! 춘분에는 청소로, 하지에는 하체단련_108배로 각각 일상을 새로고침, 즉 갱신한다. 봄과 여름의 양상이 다르듯이, 두 행동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춘분에 청소로써 일상을 새로고침, 갱신한 것은 봄의 정신인 인(仁)과 부합한다. 인(仁)은 사랑의 마음이다. 봄에는 만물이 싹을 틔워 올라오니, 사랑의 마음으로 보듬고 키워야 어린 새싹은 탈 없이 자란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니 일상은 가지런해지고 마음은 상쾌해졌다. 여름은 무덥고 모든 것이 쑥쑥 잘 자란다. 잘 자라는 만큼 부실공사가 되기도 쉽다. 겉은 멀쩡히 팍팍 자라는 것 같으나, 내실이 없으면 소용없다. 이럴수록 내실, 즉 음기를 길러야 한다. 그 내실은 바로 예(禮)의 실천으로 쌓인다.
여름의 정신은 예이다. 예는 상황을 명확히 분별하는 마음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마음은 절도(節度)가 있어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해도, 내 맘대로 사랑하면 그건 스토킹 혹은 폭력일 뿐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상황에 걸맞은 언행으로 담아내야, 비로소 서로 소통할 수 있다. 상황에 적합한 언행이 바로 예인 것이다. 여름은 양기가 극에 이르는 시기이니, 이것을 마구 풀어놓기보다 적절히 담아내야 한다. 뻗치는 양기를 그저 내버려두면, 어느새 더위 먹어 흐느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덥다고 주변 사람에게 괜한 짜증과 심술을 부리는 민폐 캐릭터가 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양기를 다스릴 수 있는 예의 행동이 필요하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절을 올리는 108배는 그런 면에서 일석이조가 아닐까? 꼭 108배가 아니더라도 명상이든 뭐든 스스로 음기를 기를 수 있는 행동을 모색함으로써, 하지를 새로고침 해보자.
※ 임진년 하지의 절입시각은 6월 21일 오전 08시 09분 입니다.
※ 계사년 하지의 절입시각은 6월 21일 오후 02시 04분 입니다.
※ 갑오년 하지의 절입시각은 6월 21일 오후 07시 51분 입니다.
※ 을미년 하지의 절입시각은 6월 22일 오전 01시 38분 입니다.
※ 병신년 하지의 절입시각은 6월 21일 오전 07시 34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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