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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가 되면 돈 많이 벌 줄 알았다

by 북드라망 2019. 12. 9.

약사가 되면 돈 많이 벌 줄 알았다


 

솔까말, 돈 많이 벌고 싶었다


나는 왜 약사가 되었을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서 의사가 되었다는 말은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약사가 되었다는 말은 약사들 사이에서도 못 들어 봤다. 나라고 그런 거창한 이유가 있을 턱이 없다. 엄마가 원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미술공부는 집안 사정상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쩌면 다 핑계일지 모른다. 나는 안정적인 전문직 여성의 삶을 거부할 용기가 없었고, 미술에 대한 열정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치유’나 ‘치료’ 등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약대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첫 직장인 종합병원은 그야말로 빡셌다. 그때는 의약분업 전이라 내원하는 환자들의 처방을 모두 약제과에서 조제했다. 천 명 이상 오는 환자들의 약을 조제하느라 밥도 오분만에 먹고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야간 근무를 할라치면 끝없이 오는 응급환자들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다. 사용하는 의약품의 가짓수가 많은데다 새롭게 들어오는 약도 많았다. 그 모든 의약품 코드, 효능, 부작용 등을 외우느라 힘들었다. 처방전에는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기, 처방대로 맞게 조제되었지 검수하기, 환자들에게 복용법을 설명하며 투약하기 등 눈코 뜰 새가 없는 나날이었다. 책과 실험실에서 접했던 학문은 수많은 환자들과 의약품들로 실제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허덕이며 그 모든 것들을 습득하기 급급했다.


매일같이 아픈 사람들은 만나다 보니 나에게도 그들에 대한 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환자들에게 약 복용법 등 약에 관한 상담을 시작한 뒤부터였을까? 난 환자들이 약을 잘못 복용하여 그 효과를 반감시키고, 질병에 대한 이해가 낮아서 병에 차도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특히 종합병원에서 의사 만나는 시간은 채 5분을 못 채운다. 그러니 환자들은 약국에 와서 의사에게 못한 말을 꺼내 놓는다. 환자들과 직접적으로 만나고 얘기하면서 난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잘 낫게 도와줄까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병원약사회에서 실시하는 복약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좀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병원 내에서 처방되는 약들을 어떻게 복용 지도해야 할지에 관한 핸드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식, 당뇨, 신부전 등 약 복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질환에 대해 전문적인 복약상담을 실시하고 환자 교육에도 참여했다. 난 점점 더 전문적으로 되어 갔다. 내 머릿속에는 더 많은 지식들이 들어왔고 약사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욱더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어떤 공부든 끝이 없겠지만 그 공부는 너무 방대한 지식을 요구했고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내게 직업에 대한 사명감은 없었지만 아픈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났고 그와 동시에 전문적 지식의 습득은 어떤 책임감처럼 다가왔다. 더 많이 알아서 흔들리지 않는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서 환자들에게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그 공부 내용에 대해 추호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과학에 근간한 내 공부들은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와 그것들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를 발휘했고, 나 또한 그런 권위의식으로 채워져 갔다. 연민과 권위의식이 뒤섞인 ‘치료’ 또는 ‘의료’라는 개념이 서서히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나 스스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전문가가 되는 과정, 대상화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딴지를 걸겠는가. 전문가로서 너무도 당연하고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그 전문적 지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확립된 것일까?


대학교 1학년 때 마우스를 대상으로 쇠뜨기의 진통효과에 대해 실험한 적이 있었다. 모든 마우스들에게는 통증 유발 물질이 먼저 주사되어 있었고, 쇠뜨기 추출물을 주사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뉘어 있었다. 내가 한 일은, 마우스 등에 쓰인 번호를 보며 해당 마우스들이 통증을 느낄 때 하는 행동의 횟수를 세서 기록하는 것이었다. 한 번 실험에 사용된 마우스들은 다른 실험에는 절대 쓰일 수 없다. 이미 주사한 물질들이 다른 실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선배는 사용된 마우스들을 한꺼번에 커다란 플라스크 속에 넣고 에테르를 부어 질식시킨 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교수는 선배가 비닐봉지를 두 개 사용하려는 것에 한 장만 쓰라고 나무라기까지 했다. 난 이 실험을 한 후 약리학 실험실에서 나왔다. 마우스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더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은 이런 과정 없이 개발될 수 없다. 처음엔 동물들의 대상화, 그다음엔 사람들의 대상화 과정이 필요하다. 신약의 개발은 이들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하는 과정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독성이나 부작용을 연구하는 전임상 시험,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 1상,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 2, 3상을 거쳐 발매가 결정된다. 그런데 신약은 발매 이후에도 임상 4상이라는 시험 중에 있다. 시판 후의 안전성과 유효성 검사인데, 쉽게 얘기해 부작용을 모니터링한다. 이 모니터링 기간 중에 부작용이 커서 발매 중지된 약도 많다.


내가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동안에 판매 중지된 약들이 있었는데 특히 두 가지 약이 기억에 남는다. ‘프레팔시드’라는 위장약과 ‘아반디아’라는 당뇨약은 각각 부정맥과 심장마비 위험이 증가된다는 모니터링 결과로 판매 중지되었다. 두 약 모두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개발 판매된 약으로 그 처방량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프레팔시드는 위장운동을 촉진시켜 구토를 예방하기 위해 소아과에서 시럽 형태로 많이 처방되었다.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그 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약 복용 당시 부작용이 없다고 이후에도 괜찮은 걸까? 그 많은 사람들의 평생을 어떻게 모니터링할 수 있을까?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애초 약 개발 과정에 들어 있다. 각각의 몸의 특이성을 삭제하고 동질화하여야 약의 작용 메커니즘이 학문적으로 정립될 수 있고 상업적으로 그 약을 판매할 수 있다. 시판 후에 임상시험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약을 복용하다 보면 당연히 그들 각각의 특이성으로 인해 부작용이 더 나올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학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계적인 약의 작동에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의 아픔도 기계적으로 대하게 된다. 심플하다. 아프면 약으로 그것을 제거하면 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심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내가 가진 지식의 권위가 강한만큼 내가 몸을 기계처럼 여긴 강도도 컸다. 신출내기 약사일 때 일이다. 감기가 걸렸는데 빨리 낫고 싶어서 고용량 항생제를 먹었다. 얼마 후 온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난 그제사 그 항생제가 내 몸무게에 비해 함량이 높았음을 깨달았다. 그때 내 몸은 약이 들어와 작동하는 기계였을 뿐이다.


내가 습득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는 철저한 대상화로 얻어진 것이고 그것들의 적용에 있어서도 환자들을 심지어 나 자신마저도 대상화하게 된다. 그런 대상화 결과를 완전무결한 지식으로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지식으로 구축된 전문영역에서 사람들은 대상화되고 대상화하며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어버린다.

    

 

상품과 윤리 사이에서


전문화가 품고 있는 문제만큼이나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또 있다. 사람들은 의사나 약사라 등 의료관련 종사자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니까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해서 보건의료 부문에서 일한다는 것은 늘 윤리적 고뇌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병원이든 약국이든 당연히 이윤을 추구한다. 최근 영리 병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보건의료 부분에서만큼은 이 이윤추구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마냥 돈 없으면 치료도 못 받고 죽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난 종합병원, 의약품 도매상, 제약회사 그리고 약국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해 왔다. 특히 제약회사의 사업팀에서 일할 때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매해 매출 예산을 짜고 그것을 달성하도록 용을 쓰며 악바리로 일했다. 그러나 내 일은 어디까지나 ‘B to B’ 그러니까 제약회사들을 고객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내가 장사꾼이라고 한들 크게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아픈 사람들을 직접 보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판 상품도 결국 약이고 환자들이 최종 고객임을 가릴 순 없다.

반면 약국에서 근무하다 보면 직접적으로 환자들을 만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괴로울 때가 많다. 내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생각보다 장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요사이 약국의 매출이 주로 처방 조제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일반의약품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의약품- 매출도 중요하다. 그러니 근무 약사 입장에서는 일반의약품을 좀 팔아야 밥값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필요도 없는데 권할 수는 없다. 꼭 필요한 약을 권했는데도 나의 선의를 장사꾼의 영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약국에 들어오면 마치 슈퍼에서 상품을 고르듯 쇼핑을 한다. 약국 자체도 매출을 올리기 위해 다른 상점들처럼 상품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다. 그러니 내게는 약국이 약사만이 개설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라기보다는 상점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또 처방전 조제에 있어서도 늘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다. 처방전을 검토해서 용량이라든가 약물 상호작용 상 문제 등 처방이 잘 못된 경우는 의사에게 전화를 해서 고치지만 처방 내용까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것이 현재 의료 실정이다. 처방 내역을 보고 있노라면 습관적으로 처방하는 위장약에 한숨이 나오기도 하고, 누가 오든 똑같은 감기처방에 가끔 헛웃음도 나오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조제하는 기계 같은 기분이 든다. 전문직은 철옹성처럼 남의 간섭을 받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자기 분야에 머문다.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솔까말, 돈 많이 벌지 못했다


약대 1학년 때 교수님한테서 들은 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희들은 기득권자가 될 것이다. 약대 보낸 부모님들 대부분은 가난하다. 그들은 너희가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고 있다.” 난 이 말을 들었을 때 가난한 내 부모가 생각났고 큰 반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졸업하고 약사가 되면 돈을 잘 벌 수 있겠구나 기대됐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전문직이라 해도 오차없는 기계가 되거나 장사꾼이 되지 않는다면 돈을 벌기 힘들다. 이 사이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진 게임이다. 철저히 기계가 되고 장사꾼이 되지 못해서인지 난 어느 장소에 있던지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난 약사가 되어서 돈 많이 벌겠다는 목표와는 한 참 먼 지점에 서 있다. 뭐든 열심히 했고 그렇다고 돈과 무관하게 산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문제는 나의 흔들림의 진폭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졌다는 데에 있다. 이 흔들림 속에서 나는 뭔가 잘못되었구나 생각했고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문탁 네트워크라는 인문학 공동체에 와서 전혀 해보지 않았던 공부를 했다. 루쉰도 노신도 들어본 적 없는 내가 그의 전집을 읽었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었고, 스피노자를 공부했다. 이전에 진리처럼 여겼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체험이었다. 예전처럼은 살 수 없겠구나. 조금 벌고 덜 쓰며 살아보자 마음 먹었다.


주 1회만 일하면서 세미나하고, 공동체 카페 매니저로 활동할 수 있는게 좋았다. 일상은 바쁘게 돌아갔고 그러는 동안 내 통장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제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통장 잔고가 0이 되면 난 어떤 마음일까? 공부한 만큼 조금은 의연하지 않을까? 실제 통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난 초라함과 불안함에 직면했다. 백화점에 발길을 끊은지 오랜데 갑자기 백화점 옷을 사기 힘든 사황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조금 벌어 덜 쓰며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삶으로 실천되지 못하는 내 비천한 앎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괴리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원래 바람과는 다르게 난 점점 더 삐딱선을 타며 살아왔다. 그만큼 멀리 와버린 지금 나의 체질은 변했다. 원하는 만큼 앎이 삶으로 되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앎이 흔들어 깨운 삶은 이미 다른 지반 위에 서 있다. 조금 벌어서 잘 살아 보고 싶은 마음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극단으로 치닫던 교만한 내 생각들을 조정하고, 모순을 품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며 일상에 임하려 한다. 의료 시스템에 이의가 있지만 여전히 약국 알바로 먹고사는 약사로 말이다.


글_둥글레(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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