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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별일 없이 산다, 혁명한다

by 북드라망 2012. 6. 18.
루쉰, 혁명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루쉰은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것들과 싸운다. 그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싸움터로 변한다. 문학이 되었든, 혁명이 되었든, 그에게 싸움 아닌 것은 없었다. 식인들로 둘러싸인 광인, 푸른 검을 지니고 복수하러 가는 도공과 검은 빛의 사나이, 구경꾼들로 둘러싸여 싸우고 있는 벌거숭이 두 사람, 그리고 적들에게 결함을 던져주려는 고독한 남자. 이들은 싸움터에 서있는 루쉰의 여러 모습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항상 살아간다는 문제로부터 벗어나 본 적 또한 없었다. 도저히 출구가 없어 보이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오로지 살아가야한다’는 점을 절대 잊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이야말로 절망에 직면해있는 자가 아직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일러주는 외침 같은 것이었다. 루쉰에게 그만큼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싸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인간의 불가피하고 근본적인 존재양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 점에서 루쉰은 삶과 싸움의 이야기꾼이라고 불러야 한다. 루쉰을 말하려면 그가 여러 모습으로 보여준 싸움들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오로지 그 싸움들 속에서만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싸우지 않는 삶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것 같다. ‘싸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분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루쉰의 싸움 이야기를 해보자.

쇠철방, 길 잃은 자들의 방

3·18참사가 2년 지난 1928년 중국. Y군이라는 학생이 루쉰에게 편지(「앎은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를 보낸다. 누군가가 Y군에게 말하기를 “중국에 계급은 있어도 사상은 모두가 하나다.”라며, 그 하나의 사상이라는 것이 바로 “관리가 되어 돈을 벌려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생명의 출로’를 발견하려고 도붓장수처럼 혁명 소리에 몸을 실었지만, ‘생명의 출로’는커녕, ‘생존의 출로’조차 봉쇄되어 버린 현실에, 기원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차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앎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제 Y군은 희망을 잃은 인간은 살아봐야 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마저 든다. 길 잃은 자로서 Y군이 루쉰에게 묻는다. 출구 없는 이곳에서 이제 자신은 어떻게 살면 되겠느냐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에셔, <상대성>


이에 대해 루쉰은 Y군에게 수단을 가리지 말고 생계를 이어가고, 애인을 위로해야 한다는 담담한 말로 답변한다. 그토록 전투적이던 루쉰이 Y군에게 그저 좀 쉬면서 몸을 추스르고, 당분간 밥벌이를 하며 애인을 위로하라고 한다. 싸움터에서 휴식을 권하는 루쉰. 왜일까?

사실 루쉰은 오래전에 이런 출구 없는 곳을 두고 적막하다고 말했었다. 창문도 전혀 없고 절대로 부술 수 없는 쇠철방 안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소리를 질러본들, 소수 사람들이 깨어나서 고통을 느끼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것이다. 차라리 혼수상태에서 죽도록 내버려 둬서, 죽음의 비애를 못 느끼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하는 루쉰의 자책 앞에 우리들은 가슴이 먹먹해지며, 망연자실해진다. 이 극도의 허무주의적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더욱 전망을 잃고, 이 상황을 더욱 수동적으로 몰아간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지점에 와서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조차 무의미해지는 듯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루쉰이 Y군에게 휴식을 권하는 답변은 전혀 뜻밖이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던진 이 답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도대체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한다고 보았기에 이렇게 답변했을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이 지점, 너무나 수동적인 상태에 빠져서 더 이상 “어떻게”라고 질문조차 던지기 어려운 이 상황에서 우리는 시작해야 할 듯하다. 자, 이제부터 루쉰의 쇠철방으로 들어가 보자.

식인들 : 내부와 외부의 이중 투쟁
 
루쉰은 광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 봐야 아는 법. 예로부터 사람을 다반사로 먹어왔다는 건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 확실치는 않다. 나는 역사책을 뒤져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어차피 잠을 자긴 글렀던 터라 한밤중까지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러자 글자들 틈새로 웬 글자들이 드러났다. 책에 빼곡이 적혀 있는 두 글자는 ‘식인’이 아닌가! 책에는 이런 글자가 널려 있고 소작인 입엔 이런 말들이 발려 있는데 하나같이 수상한 눈깔을 부라리며 실실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사람이니, 저들은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외침』「광인일기」)

광인이 간파하였듯, 이 사회는 온통 식인들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용기가 있는 자들이란 사람들을 잡아먹는데 도통한 자들이다. 영웅들이 적혀 있는 역사책에 보면, ‘인의도덕’이라는 글자들 사이에 ‘식인’이라는 글자만 온통 적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잡아먹고서 영웅이 된 것이었다. ‘인의도덕’이라는 가면 뒤에 ‘식인’의 추악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도덕은 사람들을 기만하고, 배신하고, 잡아 죽이고서야 지켜질 수 있는 그런 것이었던 셈이다. 그 긴 역사 내내 사람들은 자신들이 식인이라는 것을 숨긴 채 살아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의 형님도 사람을 잡아먹는 자였다. 끔찍하게도 식인성은 내 주변, 내 일상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다.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남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워 서로를 의심하고 있다. 더러운 욕심과 감시의 시선이 뒤엉킨 이 사회의 풍경은 추악함으로 점입가경이다. 그래서 광인은 사람들에게 외친다. “너희들은 고칠 수 있어.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먹어야 해!”(「광인일기」)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너희들도 잡아먹힐 것이라는 절박한 계몽의 외침.

사용자 삽입 이미지"나는 역사책을 뒤져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광인일기』 중)


하지만 이 순간 루쉰은 한 발자국 더 나간다. 큰형님이 오래전에 누이동생을 잡아먹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급기야 그 누이동생을 반찬속에 섞어 자신에게 먹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4천 년간 사람을 잡아먹고, 잡아먹혔던 이 곳, 식인의 사회에서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 ‘식인파티’에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도와주기 조차 했다는 걸 깨닫고 만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 파티가 열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잡아먹는 자도 있고 잡아먹히는 자도 있습니다. 지금 남에게 먹히는 자도 전에 다른 사람을 먹은 적이 있으며, 지금 먹고 있는 자도 언젠가는 남에게 먹힙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제 자신이 이 파티를 돕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식인 파티를 돕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큰형님이 식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문제적이다. ‘마음을 고쳐먹어야’ 하는 사람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외침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계몽조차 식인을 돕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광인은 ‘실패한’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무너져 내린’ 인간이었다. 이 뼈저린 깨달음은 광인은 광인이기를, 다시 말하면 사람을 잡아먹지 말라고 외치는 것을 멈추게 한다.

이제 광인은 싸움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곳은 ‘나’에 대해 새로운 설정과 모색이 필요한 곳이다. 검은 빛의 사나이가 미간척을 붙잡고 속삭였던 것처럼.

총명한 아이야. 잘 들으렴. 내가 얼마나 원수를 잘 갚는지 너는 아직 모르겠지.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이기도 하단다. 내 영혼에는,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가 있단다. 나는 벌써부터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단다! (『새로 쓴 옛날이야기』「검을 벼린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이 아수라장에서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내 속에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던 그 식인성이 똑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식인성’으로 세상 사람들은 다 닮아 있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이 식인성 자체가 쇠철방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쇠철방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제 광인은 내부의 식인성과 외부의 식인성에 대해 똑같이 싸워야 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야” 한다면, 나와 너 모두의 마음을 고쳐야 식인 없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깨달음으로 광인이 취할 첫 번째 행위는 외부와 내부, 모두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따라서 쇠철방을 없애려면 나부터 무너져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서 삶은 항상 이중 투쟁 중인 셈이었다. 그 적은 항상 나와 타인의 모습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더군다나 적들은 친근하고 익숙한, 형이나 누이의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순간이 바로 루쉰이 정조준 하던 절묘한 순간이기도 하다. 처절한 모멸감 속에서 자기 자신 조차 스스로 무너뜨리는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싸움, 이것이 루쉰 식의 자기본위, ‘입인(立人)’의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루쉰이 보기에 이 싸움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바이런의 시처럼 그는 무너뜨리는 것조차도 자신 스스로 감행한다.

“너희들은 결코 나를 유혹하여 멸망시킬 수 없다. (…) 나는 스스로 무너진 자이다. 가거라, 마귀들이여! 죽음의 손은 진실로 나에게 달려 있지 너희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이는 스스로가 선과 악을 만들었다면 그에 대한 포폄과 상벌 역시 모두 스스로에 달려 있으니 신이나 마귀도 굴복시킬 수 없고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뜻이다. (『무덤』「마라시력설」)

사용자 삽입 이미지달리, <폭발하는 라파엘로의 머리>

광인이기를 멈추는 순간, 그는 이 처참한 실패에 한없는 적막에 빠졌다. 그러나 광인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 내부에 구성된 인습이라는 적과 엄청난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적들이 함께 몰락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내부로 수렴된 적을 무너뜨려야 하고, 그러려면 그 적들이 기거하고 있는 ‘나’를 우선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검을 벼린 이야기」에서 미간척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검은 빛의 사나이와 함께 가차 없이 실행된, 최초의 모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험은 검은 빛의 사나이에게도 똑같이 전염된다. 이 모험의 연대는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고서야 맺어질 수 있는 그런 연대였다.

미간척과 검은 빛의 사나이는 자기에게 들러붙어 있는 내부의 적들과 밖의 세계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외부의 적들, 양쪽 모두와 투쟁하는 광인의 다른 이름들이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기를 집어 삼키려 한다는 걸 안다. 그들은 식인이다. 그런데 자신도 그들과 뒤섞여 있다. 나도 식인이다. 그래서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적들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나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무너진 자들은 이 무너뜨림의 모험 속에서만 서로 연대할 수 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적들과 함께 암흑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결국 자기 존재를 걸고서야 이 모험은 가능하고, 그래야만 적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내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소만, 그대를 떠나 암흑 속에 가라앉으려하오. 암흑은 나를 삼킬 것이나, 광명 역시 나를 사라지게 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고 싶지 않소. 나는 차라리 암흑 속에 가라앉겠소. (『들풀』「그림자의 고별」)

그림자는 명암의 경계에 있기보다 차라리 암흑으로 잠겼으면 한다. ‘시류를 타서 성공만을 꾀하던 경영,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냉소’만 판치던 곳에서 자신을 더욱 무너뜨리고 암흑에 잠겨버리며, 모든 모독을 감내하는 것. 암흑은 나의 이 모든 것을 씻어 버릴 것이다. 광명 속에서는 모든 가치들이 제각기 다른 색깔로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오히려 그래서 적들이 그 빛깔 속에 숨어 있었으리라. 모든 빛깔은 밤이 되자 빛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밤은 나의 적들, 숨어있는 식인성을 뼛속까지 찾아내어 암흑 속으로 흩어지게 한다.
 
또한 그림자는 주인인 당신들이 바로 그 적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천국도, 지옥도, 황금세계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기 싫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면서 당신이야말로 내가 싫어하는 것이고, 따라서 당신을 따라나서거나, 여기서 그냥 멈추는 것이 싫다고 외친다. 다른 사람들이 ‘뒤에서 돌멩이질을 하든 구정물을 퍼붓든 내버려 두고’, 내 갈길을 가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니체가 말했듯 ‘크나큰 모독’을 할 꿈도, 능력도 안 되는 위인들이므로 무시해도 된다. 차라리 그림자는 “무지(無地)에서 방황하려 한다.”고 외친다. 이제 그림자는 노예처럼 자신이 붙어서 따라다니던 주인의 몸에서 떠나려는 것이다. 그가 가려는 것은 다른 어떤 그림자도, 주인도 없는, 그러니까 공허뿐인 곳이다. 그 공허의 세계에서는 모든 인습이 깨끗이 지워지리라 믿는다.

그렇다고 외부와의 투쟁을 버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경계에 서서 내부로 끌어들인 외부의 적들을 내부의 적과 함께 싸워나간다. 아마도 이것을 내부와 외부에 대한 두 개의 싸움, 이중투쟁, 경계에 선 투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래서 싸움은 그 방식이 바뀐다. 자신이 식인이라는 걸 깨닫기 전에는 그저 타인들에게 잡아먹히고 말거라는 경고를 끊임없이 외치는 것뿐이었지만, 이제는 그 외침을 멈추고 이른바 ‘근본적인 투쟁’에 들어간다.

침묵의 싸움, 스스로 무너지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투쟁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를 경멸할 때, 말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경멸이 못된다. 오직 침묵만이 최고의 경멸이다.(생뜨 뵈브 「나의 독」) -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도 다 쓸모없는 것이다.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러나 글로 나타내는 독은 단지 소독(小毒)일 뿐. 최고의 경멸은 무언이다. 그것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채로의 무언.(「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그리트, <사람의 아들>

루쉰은 외부의 적들에게 침묵이라는 기묘한 창을 갈아세운다. 침묵으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눈만 부릅뜨고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싸움이 다 된단 말인가?

만일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인격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어서, 피억압자 입장에서 적으로 상정되는 억압자를 뚜렷이 지시할 수만 있다면, 적과의 싸움이란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루쉰은 적의 형상을 그런 식으로 간단히 규정하지 않았다. 외부의 적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으로, 친구와 친척의 모습으로 갖가지 친숙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 적들을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며 없애려하면 그들에게 쉽게 당하고 만다. 그래서 「자명등」에서 등불을 끄려 했던 광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방에 영원히 갇혀 버리는 장면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적들은 뚜렷이 있지 않고 사람들의 두려움으로, 체면으로 제각각 스며들어 있어서 나의 힘으로만 싸워 이기기란 도무지 어려운 노릇이다. 자칫하면 봉기하는 그 순간 오히려 상대에게 쉽게 공격당하고 없어져 버릴 위험에 처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노비의 하소연을 듣고 벽을 헐었다가 도리어 그 노비들에게 쫓겨났다는 우화(『들풀』「총명한 사람, 바보, 종」)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턱대고 벽만 허무는 태도로 안이하게 싸웠다간 동정했던 이들에게조차 역공을 당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루쉰은 그 부정적인 것들을 지니고 있는 외부의 모든 형상들을 끌어 모아, 그 힘이 작동하는 회로를 일거에 허물고자 한다. 루쉰의 복수의 형상을 보자.

이리하여, 그러하기에, 그 두 사람은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광막한 광야에 마주 섰다. 그 둘은 보듬을 것이고, 죽일 것이다...... 행인들이 사방에서 달려온다. 겹겹이, 빼곡하게, 회화나무 자벌레 떼가 담벼락을 기어오르듯, 생선 대가리를 나르는 개미 떼처럼, 차림새는 멋들어지나 손이 비었다. 그렇지만, 사방에서 달려와서, 또한, 죽자 사자 목을 세워, 이 포옹 혹은 살육을 감상하자고 한다. 그들은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있을, 제 혓바닥의 땀 또는 피의 생생한 맛을 예감한다. (『들풀』「복수」)

벌거숭이 두 사람이 포옹과 살육을 하려한다. 이 포옹과 살육은 미구에 맛보게 될 땀과 피의 생생한 맛을 예감케 하여 관객들을 개미떼처럼 몰려들게 한다. 행인들은 식인성으로 가득한 적들의 갖가지 형상들을 상징한다. 이제 두 사람이 칼로 서로를 내리쳐서 새빨갛고 더운 피를 내뿜게 되면 행인들은 황홀하여 대환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식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벌거숭이 두 사람은 영원히 그대로 서있다. 포옹과 살육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은 채, 행인들을 지겹게 만들어, 그들의 목과 혀에 갈증이 일게 한다. 이제 그들은 참을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식인의 욕망을 채울 수 없어서 하나둘씩 사라진다. 모두 사라지고 급기야 식인의 회로가 닫힌다. 이로써 벌거숭이는 행인들에게 복수를 완료하게 되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식인성이 일거에 스스로 허물어진 것이다. 아무리 헉헉거리며 피맛을 보려 해도 벌거숭이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 주질 않는다. 온갖 부정적인 것들의 회로를 아예 처음부터 차단하여 끈질기게 호응하지 않는 것, 그래서 부정적인 것들이 힘을 쓸래야 쓸 수 없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침묵으로 싸우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인 것들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그것에 넘어가지 않고, 홀로 ‘별일 없이 사는 것’이다. 오로지 ‘별일 없이 사는 것’, 그것이 루쉰의 진정한 복수다.

이런 점에서 침묵의 투쟁이야 말로 ‘진짜 분노’가 된다. 아무리 외친다고 한들, 상대에게는 신음하고 탄식하고 통곡하고 애걸하는 소리로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적들의 회로 자체를 무너뜨리는 침묵의 투쟁은 무서운 침묵으로 그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들의 진짜 분노이며, 진짜 싸움인 것이다.

허무, 그리고 새로운 인간
 
이 싸움 끝에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뜻밖에도 우리가 출발했던 그 ‘허무’다.

나는 앞으로 다른 사람의 보시를 받지 못할 것이며 보시할 마음도 사지 못할 것이다. 나는 보시의 윗자리에 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성가셔함, 의심, 미움을 살 것이다. 나는, 무위와 침묵으로 동냥하리라!…… 나는 적어도, 허무(虛無)는 얻을 것이다. (『들풀』「동냥치」)

나를 무너뜨리고, 적의 회로를 차단해버리고 나서 남는 것은 결국 ‘허무’의 세계다. 그것은 무위와 침묵으로써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 허무의 세계에 도달하여야만, 나도 너도 기존의 인습들을 전부 털어버리고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위와 침묵으로 잠겨 들어간 무의 세계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애초에 출발했던 그 허무와는 어떻게 다른가?

복수가 끝난 곳을 들여다보자. 미간척의 복수가 끝나자 솥 안에는 미간척과 검은 빛의 사나이, 그리고 왕의 머리가 물 밑으로 같이 가라앉아 있다. 세 개의 두개골을 들어 올리자 왕비가 묻는다. “우리 상감마마는 머리가 하나뿐인데 어느 것이 우리 상감마마의 것이오?”(「검을 벼린 이야기」) 그러나 두개골들을 살펴보니, 색깔이나 크기에서 구별이 없어져 버렸다. 가죽이나 살이 문드러져버려 더 이상 그들 사이에는 다른 점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태자 때 난 이마의 상처도, 생시에 높았던 콧대도, 튀어나온 후두부도 왕을 식별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뿐인 왕’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섞여버려 ‘어느 것’이 왕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복수한 자들과 복수당한 자가 뒤섞여서 한 덩이가 되어 버린 상태. 그리고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린 장례 행렬. 이 머리들과 행렬처럼 혼돈 속에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 허무의 상태가 아닐까? 더 이상 왕을 알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더 이상 ‘하나 뿐인 것’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바로 허무의 상태가 아닐까? 그곳에서는 어느 두개골에게도 왕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를 숭배할 필요도, 대상도 없다. 더군다나 도통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장례 행렬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마구 뒤섞여서 심히 혼탁하고 뒤죽박죽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수가 끝난 그곳은 어떤 허위도, 어떤 장식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허무 밖에서 이 허무 안을 바라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허무 안에서 허무 밖을 바라보는 것은 새로움으로 가득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모든 가치와 모든 언어가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사소한 것들이 나의 행로를 즉각적으로 결정지울 수 있으므로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우발성 덕분에 허무 밖의 세상 어떤 것과도 만날 수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허무의 세계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인간은 탄생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허무는 수동적인 허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지점이 아니라,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창발적인 지점이 된다. 무너져야 새로워진다.

루쉰이 보기에 이것은 당시 중국 상황에서 반드시 성취해야할 당면과제이기도 했다. 열강의 위협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확립하는 일(立人)’이었다. 입인이 되야만 그 위에서 이후에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확립하는 방법은 개성을 존중하고 정신을 발양하는 것이라야 하는데, 외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는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루쉰의 진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인이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너도 인습에 갇혀 있음을 알고, 내가 스스로 무너지고, 너를 침묵으로 무너뜨리며 서로 같이 허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서로가 자신의 존재를 내걸어야만 가능한 일종의 모험의 세계였다. 과거로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오던 인습과 외발적으로 주어진 사상의 강압을 모두 무화시킨 그 자리가 필요하다. 이 허무의 세계는 관념과 은유 속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곳에서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곳은 「고독자」에서 렌수에게 퍼부었던 모독처럼 온갖 모독이 난무하지만, 오히려 그 모독 덕분에 온갖 가능성이 뒤섞여 있어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그 뒤섞임 때문에 밖에서 볼 때 혼란스러워 보일 뿐이다. 나에게 달려드는 온갖 것들을 불확실한 것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한한 우연의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찬란하다. 이제 니체가 말하였듯 이 혼란의 심연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미래의 샘물이 솟아오른다. 그곳에서야 새로운 인간이 세워진다(立人).

사용자 삽입 이미지"분명 나는 종종 남을 해부한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더 사정없이 나 자신을 해부한다. … 만약 내 피와 살을 전부 드러낸다면 그 말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루쉰, 『무덤』 중)


입인, 정신승리를 넘어 살아가는 것

그러나 여기서 입인으로 세워진 인간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혹시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아큐의 정신승리법처럼 자기 정신세계에서만 일어나고 소멸해버리는 추상적인 관념은 아닐까? 아큐는 ‘우리 집도 그전에는 너보다 훨씬 더 잘 살았어!’라며 거짓으로 자기를 위안하고, 헛된 자존심으로 ‘글방 도련님’이나 다른 성안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 이유는 ‘긴 걸상’을 ‘긴 의자’라고 부르기 때문이며, ‘내 아들이라면 더 훌륭했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을 놀리고 때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벌레야’라며 그 상황을 모면하고서는 아무 데나 머리를 찧고 만족해한다. 도무지 대책 없고 어이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경멸하고 낮춘다는 점에서 아Q는 자신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미간척과 뤤수와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똑같다. 그렇다면 아큐도 ‘스스로 무너지는 자로서 입인을 실천하는 자’란 말인가? 자칫 자아에 붙어 있는 비열한 정신승리를 털어낸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몰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자기위안으로 마음속으로만 ‘나는 입인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입인과 정신승리법이 어떻게 다른가?

이를 따지기 위해 우선 렌수로 돌아가 보자. 렌수는 타락한 자다. 하지만 그는 승리하였다. 그는 실직과 궁핍 속에서 자신이 살아남기를 바라던 사람이 모살 당하자,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가 살지 않았으면 하는 자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살아가는 것”이기에 복수를 위해 이전에 존경하고 주장했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이전에 증오하던 것, 반대하던 것을 몸소 실행하며 타락조차 받아들였다. 세상의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더라도 복수 그 자체에 자신을 투신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다음과 같은 적들에 대한 태도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술을 끓고 어간유를 먹는 것은 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도리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대부분은 바로 나의 적—그들에게 좀 점잖게 말한다 해도 적일 뿐이다—을 위해 그들의 좋은 세상에다 얼마간 결함을 남겨 주려는 것이다. (『무덤』「제기」)

이것은 「죽음을 슬퍼하며」에서 쯔쥔을 장송하며, 가슴속으로 망각과 거짓말을 길잡이로 반드시 살아남아, 묵묵히 전진하겠다는 줸성의 그 다짐과 유사하다. 그것은 삶의 허위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삶의 허위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거짓말과 망각에 기꺼이 발을 내딛겠다는 도저한 의식이다. 그래서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더라도 그 길을 간다. 그 길이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기꺼이 간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것들을 감내해서라도 가야할 만큼 절박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입인의 길은 온 존재를 스스로 내걸고 허위를 돌파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반면, 정신승리법은 허위의 돌파는커녕, 오히려 허위에 의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만다. 정신승리법 자체가 허위이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아큐는 자오씨 댁이 약탈당하는 곳에 구경 갔다가 체포되었지만, 심문당하는 순간까지도 ‘반란하려 했다’는 허위를 드러낸다. 혁명하는 것이 멋져보였던 것이다. 결국 아무런 죄도 없이, 오로지 허위 때문에 처형당하고 만다. 그러나 아Q에게는 “눈이 캄캄해지고 귀가 윙윙거려 전신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느낌”(「아Q정전」)이 죽음을 이해하는 전부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고 갈채를 보내던 구경꾼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헛걸음이었다고 불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 또한 아Q의 죽음이 말해주는 모든 것이다. 정신승리는 ‘입인’과 달리 허허로운 죽음을 만들뿐이다. 죽음조차도 정신승리와 입인 앞에서 다르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회귀, 항상 성공하지 못하는 혁명

그런데 이 세계는 마치 벌이나 파리가 무엇에 놀라서 날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이 항상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비틀거리는 개 ‘아쉐이’처럼 회피하고 싶은 대상들이 자꾸 되돌아오기도 하고, 쯔쥔을 사랑하였다가 다시 돌아간 적막한 방처럼 공허한 것들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혁명 이전에 나는 노예였지만 혁명 이후에도 얼마 안 되어 다시 노예에게 속아 그들의 노예로 바뀐 듯한 기분이 든다.”(「생각나는대로」) 다시 말하면 생각한대로 단번에 그 부정적인 것들을 깨부수고 없애버릴 수 없다. 이 부정적인 것들은 항상 모양을 달리하며 되돌아오기 때문에 파도를 맞이하듯 계속 물살을 가르며 버텨내고 넘어서야 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입인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아쉐이’가 되돌아오듯,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되돌아와서 변주된 형태로 우리를 식인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스스로를 무너뜨려서 새로이 입인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매번 그것들과 싸우며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끊임없이 넘어서고 있는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인간의 모습,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에셔, <만남>


문명이라는 거시의 차원도 똑같다. 루쉰의 「문화편향론」에 따르면 예수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시대마다 그 이치가 편향되어 진행되어 왔다. 로마시대에는 교황 권력에 편향되어 사람의 마음을 속박하였으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그 편향을 해소하였다. 그러나 교황을 전복할 때 군주의 권력을 빌렸으므로 군주에 편향되어,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도 또한 다 같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으로 여기고, 혼자서 옳다고 하면 그른 것으로 여기는 다수의 편향 때문에 지금의 폐해에 이르렀다. 즉, 문명은 반드시 지난 일을 교정함으로써 편향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마치 편향 그 자체가 목표라도 되는 듯이.

아마도 이 계속적인 편향이란 것이 바로 부정적인 것들의 끊임없는 회귀일 것이다. 문명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편향을 통해 구성을 달리해온 것으로 봐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편향 그 자체가 문명변동의 동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를 동여매는 편향, 즉, 부정적인 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삶의 동력으로서의 편향의 변주, 그 자체에서 우리는 쇠철방의 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관점이라면 쇠철방은 우리를 구속하는 억압의 기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쇠철방이 없으면 삶도 없고, 더욱이 새로운 인간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루쉰은 쑨원의 혁명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했다. 1925년 쑨원이 객사하면서 남겼다는 유촉, “혁명은 성공하지 않았다.”는 바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쇠철방들, 그것들에 대해 부단히 투쟁하는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혁명, 혁명의 혁명, 혁명의 혁명의 혁명, 혁명의 혁명의 혁명의 혁명...”(「느낌의 단편들」)처럼 비아냥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혁명으로서, 부단히 계속될 영원한 혁명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로소 우리는 모든 문제가 항상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한다. 항상 되돌아오는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또다시 돌아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도 세계는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세계가 진일보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도, 세계가 잘못되어 우리를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공포나 절망도, 미간척이나 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오로지 세계가 회귀하여 돌아온다는 사실만을 긍정하고 내 몸을 바퀴 삼아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오히려 쇠철방 그 자체는 우리 삶에게 던지는 누군가의 선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스스로 그 쇠철방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눠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라의 길, 일상적 혁명

그렇다면 부단히 걸어가야 할 이 영원한 혁명의 길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하지 않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습니다.(『무덤』「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밥, 이성, 조국, 민족, 인류...무엇을 사랑하든 독사처럼 칭칭 감겨들어라. 원귀처럼 매달려라.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줄기차게 달라 붙어라. 이런 사람이어야 희망이 있다. 지쳤을 때는 잠시 쉬어도 좋다. 그러나 쉰 다음에는 또다시 계속해야 한다. 한 번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이라도 계속해야 한다. (「독사처럼 칭칭」)

루쉰은 집나간 노라의 길이 실제로는 두 가지가 가능하다며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것은 타락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루쉰이 보기에 노라는 남편으로부터 나왔기에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경제적으로 아직 자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전하다. 그래서 루쉰은 경제적 자립에 의한 생활의 확립을 삶의 기본으로 내세운다.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먼저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영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끈질기게 달라붙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특히, 자기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밥벌이의 일상생활에 대해 좀 더 치밀하게 살펴봐야겠다. 왜냐하면 그 일상생활이라는 것을 어떻게 전유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르카, <방> _ "새로운 삶의 길은 많다. 나는 그 길로 나아가야 했다, 나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어떻게 첫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몰랐다." (루쉰, 「죽음을 슬퍼하며」 중)


국가, 혁명 이런 것들은 어떻게 일상에 나타나는가? 그것들이 신문 쪼가리의 글로서만 존재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봉급명세서 한 귀퉁이에 주민세로 자리 잡아, 도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침마다 뛰어가는 건널목의 빨간 신호등으로 노려보기도 하고, 더벅머리 청년에게는 입영통지서라는 막막한 비수로 날아오기도 한다. 결국 저 대의라는 것들도 어떤 형태로든 나의 일상의 다양한 형태들로 표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의들이 ‘일상’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를 강박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아마도 우리 관념 속에서 그 대의들이 어떤 “전체”의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신들처럼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고, 우리들의 행위들은 그것들의 구성요소로서만 달라붙어 있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는 뭔가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되어 버린다. 여기의 ‘일상’은 사회적인 부분이 거세된 오로지 먹고 사는, 그야말로 협소한 의미의 삶만을 상정한 일상이 된다. 여기에는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부분으로서의 ‘일상’은 완전한 삶을 구성하지 못하여 좀 더 탁월한 그 무엇, 좀 더 완성된 그 무엇에 막연히 종속되도록 만들어, 자신을 그 위계 아래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런 상태여야만 ‘일상’ 속의 사람들을 조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일상을 떠난 대의의 강조는 우리를 국가의 인형, 민족의 인형, 혁명의 인형으로 만들어 버릴 터이다. 그래서 루쉰은 그 대의라는 것이 “원통형인지 타원형인지조차 모른다”며.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내걸’ 수 있겠는가?“(「대의는 딱 질색」)라고 반문한다. 사실 대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서 억압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반면, ‘일상’에만 충실 하라는 구호— “나는 혁명이니, 복수니, 투쟁이니 하는 대의는 몰라요. 오로지 소박하게 먹고 사는데 충실할 뿐이에요”—는 또 어떤가? 이때 ‘일상’에 충실하다는 것은 생활을 이롭고 윤택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그 ‘일상’은 나쁜 습관은 고치고 좋은 습관을 잘 만들어서 생활을 튼실하게 만들어가는 모든 실리적 기획만으로 구성될 것이다. 따라서 “어쨌든 살아가야한다”는 절대명제 아래에서는 이제 생활인이기만 하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여기에 무슨 고민과 분투가 필요한가? 오직 실리와 효율 아래에 자기를 단련시키기만 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백주대낮을 둘러보자. 사람들은 규범을 깍듯이 지켜, 고분고분 바른길로 걸으며 ‘어쨌든 살아가고’, 불만사항이 나올 때면 남에게 신세타령을 해서 동정과 위로를 받아가며 ‘어쨌든 살아가고’, 남의 참혹함과 고통을 구경거리로 ‘운 좋게 걸려들지 않은 것‘을 기뻐하며 ‘어쨌든 살아가고’, 모기나 파리처럼 사람 피가 자기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있다고 웽웽거리듯 밥그릇 앞에서 고래고래 다투며 ‘어쨌든 살아’간다. 그들은 윤리도, 이념도 없는, ‘일상’의 인형일 뿐이다.

‘일상’을 뛰어넘는 대의를 강조하거나, ‘일상’ 그 자체를 강조하거나,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있다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칼을 잡아당겨 지구를 떠나려 시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초월한 것인 양 하기 때문이다. 대의를 강조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 노예가 되든, ‘일상’만을 강조하여 이념 없는 노예가 되든, 모두다 정신승리의 못된 습성이다. 그럼 어떤 일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진기한 꽃에만 마음이 팔려 가지나 잎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가지나 잎을 따는 사람은 절대로 꽃이나 열매를 가질 수가 없다....도대체 전사가 수박을 먹을 때 먹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의식을 치러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마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목이 말라서 먹고 맛있다고 생각할 뿐이지, 듣기에 그럴듯한 고상한 이치를 생각하면서 먹을 리가 없으리라. 먹은 다음에 기운을 챙기고 그런 다음에 싸운다면 목이 마른 채 싸우는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이것도 생활……」)

밥벌이를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그 즉시 인형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밥벌이를 스스로 할 수 있어야만 인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 조그만 힘, 즉 밥벌이할 수 있는 이 조그만 힘이야말로 앞으로 부단히 펼쳐질 영원한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은 이처럼 혁명의 절대적 조건이면서 출발로서의 일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혁명은 다시 되돌아 와서 일상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생활 그 자체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어떤 혁명도 루쉰에게는 부정되어야할 것들이다. 따라서 루쉰은 혁명의 최후의 결론이면서 종착지로서의 일상을 말한다. 루쉰에게 일상은 혁명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인 셈이다.

이로써 루쉰이 이 지옥 같은 싸움터에서 Y군에게 밥벌이와 휴식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가지나 잎이 꽃을 받치고 서 있듯, 일상의 단단함이 혁명을 이루어낸다. 꽃 속의 씨앗이 새로운 가지와 잎을 만들 수 있듯, 혁명은 일상을 새롭게 일구어낸다. 일상과 혁명의 무한한 연속은 가지와 꽃의 영원한 연속과 닮았다. 이제 혁명은 일상적인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모든 혁명은 일상적 혁명이 된다. 아니, 모든 삶의 모습, 일상 자체가 혁명이 된다. 그렇다면 바로 밥벌이 그 자체가 혁명일 것이다.

삶, 죽음을 끌어안고 가다

그런데, 루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혁명만 부단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생명의 길은 진보의 길이다. 언제나 정신이라는 삼각형의 빗변을 따라 무한히 올라간다. 어떤 것도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 생명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웃고 춤추며 사망한 인간을 뛰어넘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무엇이 길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서 생겨난 것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을 개척하여 생겨난 것이다. (『열풍』「생명의 길」)

진화하기 위해 생명은 끊임없는 연속 과정을 거친다. 장년이나 낡은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소년에서 장년으로, 노년으로, 죽음으로 기쁘고도 용감하게” 나아간다.(「청년아, 나를 딛고 나아가라」) 생명은 마치 죽음 그 자체가 삶의 한 사태에 불과하다는 듯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사실 삶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혁명도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혁명은 삶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삶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면 혁명도 죽음이 가로막지 못한다.

이렇게 루쉰은 부단히 진화하는 생명을 상정함으로써, 매우 장구한 시간의 삶과 혁명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루쉰은 행인의 입을 빌어 “묘지를 지난 그 다음”을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쉰의 의지를 읽지 못하고, “가 본 적이 없다”고만 되풀이하여 대답할 뿐이다.(『들풀』 「길손」) 하지만 루쉰은 자신의 사후를 형상화함으로써 끊임없이 지속될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 혁명에 대한 의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사후에도 적들이 타격을 입는 것을 상상하며 유쾌해 한다.

털끝만큼도 생각 못 했다. 사람 생각이 죽은 뒤에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문득, 어떤 힘이 내 마음의 평안을 깨뜨렸다. 동시에, 수많은 꿈들이 눈앞에서 꾸어졌다. 몇몇 벗들은 나의 안락을 빌었고, 몇몇 원수는 나의 멸망을 빌었다. 나는 그러나 안락하지도 멸망하지도 않고, 그작그작 살아왔다. 어느 한쪽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림자처럼 죽었다. 원수들이 알지 못하게. 그들에게 공짜 기쁨은 조금치도 선사하고 싶지 않다.... 나는 통쾌한 중에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죽은 뒤 첫 번째 울음이었다. (『들풀』「죽은 뒤」)

렌수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로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죽더라도 적에게 조그마한 기쁨조차 넘겨주지 않아 적들이 당황할 걸 생각하니 너무나 유쾌하다. 이 태도에는 죽음을 넘어서서 진행되는 삶, 그 지대에서 바라본 유머가 서려 있다. 영원히 사는 자의 유머. 죽음조차 이 유쾌함을 가로막지 못한다. 또한 자신을 원망하는 적들에게, 루쉰 자신은 죽더라도 끝까지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웃어버린다. 영원히 싸우는 자의 웃음. 죽음 이후에도 루쉰의 투쟁심은 적들에게 끊임없이 타격을 입힌다. 산다는 문제, 혁명의 문제는 죽느냐 안 죽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 사안인 것이다. 루쉰에게 생명은 영원하다. 그래서 생명은 정신의 비탈길을 따라 위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것이다. 삶의 문제는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살고, 살기 싫으면 안살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삶은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삶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살아가게 된다.”는 자명함과 “반드시 살아가야한다”는 의지가 동시에 작용한다. 살아가게 되는 것이 자명하므로, 내가 의지를 갖지 않아도 살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삶의 자명함에만 기대어 사는 사람은 이 삶의 온갖 비루함을 돌파할 수 없다. 동일한 쇠철방에 영원히 갇혀버릴 뿐이다. 그들은 똑같은 쇠철방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반드시 살아 남아야한다”는 의지가 있어야 이 비루함을 뚫고, 언제나 되돌아오는 쇠철방들을 새롭게 맞이하고 끊임없이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삶의 자명함과 삶에의 의지라는 모순이 서로 꼬리를 물며 삶을 이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쿠쉬, <시지프스> _ "한 점의 열이 있으면 한 점의 빛을 발하라. 반딧불이처럼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발할 수 있다면 꼭 횃불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루쉰, 『열풍』 중)


이처럼 삶에 대한 자명함과 의지가 꼬리를 물며 삶의 구성을 계속 반복한다. 쇠철방이 찾아오고, 그것과 부단히 분투하고, 또 새로운 쇠철방이 찾아오고, 다시 분투하며, 자기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반복은 계속된다. 어쩌면 이 반복이 계속 됨으로써만 삶이 완성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결국 이 반복은 죽음을 삶의 한 사태로서 끌어안고 장엄하게 넘어선다.

그러나 이 의지는 이상화된 삶의 모습을 상정하고서 그 모습을 위해 나아가는 의지가 아니다. 오로지 현재적인 것, 즉 현재의 쇠철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투신하려는,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를 긍정하려는 의지이다. 어쨌든 다시 돌아올 것들이므로 단번에 승부를 걸지 않는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올 것들이므로 그냥 팔짱끼고 있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 없이는 삶을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상화 된 미래의 삶도 없고, 후회하는 과거의 삶도 없다면, 그리고 실패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기꺼이 실패와 죽음을 끌어안고 갈수만 있다면, 오로지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만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떻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오는 후차적인 것이다. 어쩌면 “어떻게”는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자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사후적으로 분석되는 것일 뿐일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어떻게”는 항상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했는가?”로서만 인식될 뿐이지 않던가. 따라서 “어떻게 할 것인가?” 가 아니라 “도대체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이다. 오직 할 수 있는 그것만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돌아오는 쇠철방으로부터 자신을 강하게 키워가려는 의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열렬히 기대하는 것, 오로지 이것만 있을 뿐이다. 이 강력한 의지는 영원한 삶, 이 자체를 현재화해버린다. 이것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들을 선물로서 맞이하고, 그것들이 몰고 온 편향 그 자체에서 출발하려는 것, 그래서 새로운 편향을 향해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루쉰은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뿌려 놓은 헛된 희망과 절망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루쉰은 이 세상 속에서 삶을 장식하는 모든 말들과 허위들을 걷어 버린다. 루쉰은 죽음으로 몰아가며 두려움을 안겨주는 적들을 비웃어 버린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하나, 그것은 삶을 구하고, 분투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구고 가꾸어가는 현재의 삶, 이것만큼은 뽑아 버리거나, 걷어 버리거나, 비웃어 버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이 지점에 와서야 루쉰이 Y군에게 대답한 말들을 이해하게 된다. 수단을 가리지 말고 생계를 이어가고, 애인을 위로해야 한다는 그 담담한 말을. 그리고 “영원히 몰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어서 덧붙이는 염려를. 그것은 삶과 혁명은 당신의 몰락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리라. 영원한 삶과 영원한 혁명과 영원한 당신, 그리고 영원한 현재.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라. 그것이 바로 너의 혁명이다. 이것이 루쉰이 청년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의 전부다. 그것은 렌수가 살아갈 자격이 없더라도 복수를 하기위해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 이유이다. 살아갈 자격이 없으므로 완전히 실패했지만, 어쨌든 살아가는 것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래서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어서 승리하였다. 그러니 오늘 실패한 당신들, 슬퍼하지 마라. 별일 없이 살아남아서 승리하여라. 당신들의 삶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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