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배려와 철학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저녁에 돌아와 잔다. 아마 내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 갈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별달리 덧붙일 말이 또 뭐가 있을까? 9회말 2아웃 후 뜬 볼인 양 싱거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싱거운 일도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묻고 다가가면, 그 순간 그것은 참 낯선 일로 보인다. 공중에 덩그러니 떠있는 볼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느낌이다. 저게 뭐하는 것일까 싶다. 싱거울 정도로 자명한 것이 불현듯 유령처럼 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아마도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고 잔다는 것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정체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소란들과 이해다툼들을 보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산다는 것’에 진지하게 다가갈수록, 거기에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이쯤에서 이런 자문이 나올 법하다. 혹시 그럼 ‘산다는 것’이란 ‘살아남는 것’일까? 생명을 유지하지 않고선 도대체 살 수 없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죽은 자가 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진지하게 묻진 않을 성싶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개 ‘사는 방법’을 ‘살아남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듯하다. 어떻게 공부해야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고, 어떻게 먹어야 오래 살아남고, 어떻게 일해야 승진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등등, 살아남으려는 행동 모두가 바로 ‘사는 것’이 된다. 오로지 잘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제 살아남는 방법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런 앎들은 바로 이런 살아남으려는 욕망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보관되고, 전달된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로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살아남는 기술’을 그저 쫓아갈 뿐이다. 이 기술들을 쫓아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최대 과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전이나 컴퓨터 파일처럼 이런 앎들을 머리 속에 가지고만 있으면, 자신들도 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당연히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기술’을 최대한 많이 습득하여 활용하는 것이 된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다.
소크라테스의 논박 :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 쓰기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 당신이 수많은 책을 읽고, 훌륭한 기술을 익혔고, 심지어 숱한 경험도 겪었다고 하자. 그러나 혹시 당신이 안다고 하는 그 앎, 즉 살아남는 방법들이 당신이 겪은 사태들에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고, 다른 특수한 상황에서는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살아남는 숱한 방법들은 그저 우연한 상황들에만 들어맞는 것일 뿐이지, ‘산다는 것’을 참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앎들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어떤 의견(판단, doxa)들일 뿐이라면서, 그것들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화 작업, 제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화 작업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대화편들의 논박(엘렝코스, elenkhos)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도 이런 엘렝코스를 통해서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고(‘무지’), 더군다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무지의 무지’) 있었다.
이런 엘렝코스는 등에의 침과 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침들이 사람들의 신체와 실존 내에 깊이 박혀야한다(『변론』, 30e)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살아남는 기술만을 최대 가치로 삼는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의 행위와 언어들은 “주제넘은 짓”이고 “어리석은 짓거리”로 생각될 뿐이었다(『변론』, 19b~c) 정적들은 이런 소크라테스를 적대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런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테네인들과 논박을 즐기던 소크라테스는 도시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했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세 가지 죄목으로 끝내 사형판결을 받고 만다. 하지만 이런 판결로 죽음 앞에 서서도 그는 ‘주제넘고 어리석은 짓거리’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태도 뒤에 숨어 있는 아테네인들의 기만을 통렬히 나무라고 있다.
사실 이 문장은 ‘…하니’ 또는 ‘…했으니’라는 연결어(hoti mathōn)로 계속 이어진 아주 긴, 격정적이고 숨가쁜 최후 진술 중 한 문장이다. 부지불식간에 살아남는 것만을 유일하거나 주된 가치로 삼고 있었을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오히려 살아남기를 거부하며 그들을 구원하려는 소크라테스. 살아남기를 거부하는 그 순간, 그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바로 “각자가 자신이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로워지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쓰기”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변론을 시작할 때 이미 주장한 바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 시민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신께 더욱 복종한다면서, 살아 있는 동안은 철학하는 것도, 시민들에게 충고하는 것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다시 말하면 설사 죽음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철학과 충고하는 행위를 그만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성과 재물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도, 슬기와 명예 그리고 자신의 혼(psychē)이 훌륭해지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더나가서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착각하여 자신만큼은 남들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끝까지 심문하며 나무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변론』, 29d~30a). 결국 그는 무엇이든 자기에게 붙어있는 어떤 것들(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로서 육체, 지위, 재산 등)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해서 마음 쓰기’(즉, 자기 자신을 돌보기, epimeleia heautou)를 요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죽음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하여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해방의 철학 : 죽음의 수련과 삶의 기술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남는 것에 전념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과 사물에 예속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그 말은 인간이라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사태를 넘어서서 삶 자체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참으로 난감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니 도대체 살아남지 않고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살아남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쓴다는 게 가능이나 한 말인가?
이 지점에 오면 죽음에 대해서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싶어진다. 죽음 자체를 참고 견뎌내면서, 어떤 비극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태도에 대해서도 바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죽음을 견뎌내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들, 예를 들면 나쁜 평판 같은 것을 더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면서,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무서워하는데도 용감하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파이돈』, 68d) 그렇다면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은, 설사 그것이 용감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무서움과 비겁함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 용기가 아닌 게 되고, 따라서 그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단순한 절제’와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이들도 다른 쾌락들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즉 그 다른 쾌락에 지배당하고 있는데도 절제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것도 또한 참된 의미에서의 절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두려워하는 사람이 용기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나, 쾌락에 빠진 무절제한 사람이 절제를 한다고 하는 것 모두가 잘 사는 것을 참으로 말해주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사는 것에 대해 난공불락의 아포리아를 만나게 된다. ‘살자’고 해도 문제이고, ‘죽자’고 해도 문제인 어떤 막다른 골목 말이다. 무조건 살아남으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다. 때론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죽음을 숭배하는 철학'으로 비난받곤 한다. 사실 이데아 자체가 죽은 이후에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런 비난을 마냥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사유가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기계가 아니라, 어찌해서 그게 참이 되고 거짓이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라면,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중대하게 사유하고, 말해야만 했던 이유이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소크라테스가 돌파하며 제안하고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수련(meletēma)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 중에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것에만 자신을 맡기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즐거움들을 위해서 죽음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죽음의 수련’은 궁극적으로 ‘철학을 쫓아가는 삶’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삶의 기술’로서 제안된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예속 상태(즐거움과 두려움)에 빠트리는 특정 사물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수련은 자기가 자기에게 사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바로 여기서 철학은 온갖 예속상태로부터 전향하여 인생 전체에 걸쳐 존재 전반을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구성하도록 하려는 ‘삶의 기술’로서 제시된다. 이 지점에 오면 진실을 인식한다는 것, 즉 뭔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그 자체로 바뀐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삶의 기술로서, 해방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에로스 :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기
그런데 이런 해방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서, 예속상태에 있는 현재의 자기와 다르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수련’이란 바로 이 예속상태를 벗어나서,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최상의 전략이자 전투였다. 그것이 전투인 이유는 푸코의 말대로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주체의 해석학』, 59쪽)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Agathōn)의 심포지엄에서 에로스(Erōs)에 대해 말할 때, 하려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의 자기와 다르게 되려는 주체의 상징으로서 에로스.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하는 자이고, 사랑하는 자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결여되어있다고, 그것이 추함이나 나쁨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추한 것은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추한 것은 온통 추한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한 존재는 생각조차도 추하여 추한 것만을 욕망할 터이다. 따라서 일단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원하기만 한다면 그 에로스는 완전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완전히 추한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결여란 ‘완전히 없음’이 아니라 ‘완전히 없음’과 ’완전히 있음’ 사이에 있는 어떤 상태, 이를테면 중간자적 존재를 말한다.
이렇게 중간자로서 규정되자마자 에로스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이해될 기반을 갖게 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중간자로서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기를 바란다. 따라서 에로스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자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 것(oikeion)을 넘어서 좋은 것(agathon)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에로스를 말한다. 사실 중간자는 추한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결여하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에로스는 자기 것(oikeion)을 항상 뛰어넘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것을 뛰어넘어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 소크라테스 말대로라면 자기에게 결여한 것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늘 있게 하려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디오티마(Diotima)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으로 가는 사다리’라는 비유를 통해 아주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저 아름다운 것을 목표로 늘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이끌려 간다. 이 과정에서 에로스는 기존의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결여된 어떤 것을 찾아내고 그 결여된 것을 다른 이들로부터 얻어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끊임없이 중간자인 채로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아마도 이 넘어섬이 계속되면 궁극에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auto ho esti kalon)를 알게"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궁극의 상태로서 상정한 것이지, 에로스 자체가 그런 상태에 도달하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자기를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상태, 과정 그 자체, 다시 말하면 넘어섬이라는 동사 그 자체가 에로스일 것이다. 이처럼 에로스는 매번 자기 존재의 변형에 내기를 거는, 매순간 전위적인 존재인 셈이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야말로 이런 에로스적 존재이지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이미 살려고 항상 넘어서 왔다고 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란 이렇게 ‘항상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밤의 잠을 넘어서고, 밥을 먹는 것도 배고픔을 넘어서고, 일터에 가는 것도 내 집 문지방을 넘어서고, 돌아와 자는 것도 낮의 분주함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전위적인 에로스야말로 삶의 본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삶은 결코 상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이미 전위적이었고, 앞으로도 항상 전위적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에로스적 운명은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저녁에 잠이 드는 바로 그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서야만 하는 운명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삶은 상투적이 되고, 예속상태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항상 ‘삶의 기술(technê tou biou)로서의 철학’이 불가피하게 거주할 필요가 생긴다. 항상 예속상태에서 해방하려는 의지를 도발시키고, 현재의 자기 것을 넘어서 본래의 자기 자신─전위적인 에로스─에게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 자명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아마도 ‘산다는 것’은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며 항상 전위적으로 ‘살아지는 것’일 터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매번 9회말 2아웃 후에 뜬 볼을 친 안타까운 마지막 타자일지 모른다. 그래서 머리 처박고 1루를 향해 냅다 달려가고 있는지도. 하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저 볼을 '매번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서, 누구나 다 싱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참다운 ‘삶의 기술’이 눈뜨고, 그 기술은 매순간 에로스를 깨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차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살아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저녁에 돌아와 잔다. 아마 내일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 갈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 별달리 덧붙일 말이 또 뭐가 있을까? 9회말 2아웃 후 뜬 볼인 양 싱거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싱거운 일도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묻고 다가가면, 그 순간 그것은 참 낯선 일로 보인다. 공중에 덩그러니 떠있는 볼을 사진으로 찍어 놓은 느낌이다. 저게 뭐하는 것일까 싶다. 싱거울 정도로 자명한 것이 불현듯 유령처럼 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아마도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아침, 저녁으로 일어나고 잔다는 것만으로는 ‘산다는 것’의 정체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소란들과 이해다툼들을 보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산다는 것’에 진지하게 다가갈수록, 거기에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이쯤에서 이런 자문이 나올 법하다. 혹시 그럼 ‘산다는 것’이란 ‘살아남는 것’일까? 생명을 유지하지 않고선 도대체 살 수 없으니, 그리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죽은 자가 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을 진지하게 묻진 않을 성싶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개 ‘사는 방법’을 ‘살아남는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듯하다. 어떻게 공부해야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고, 어떻게 먹어야 오래 살아남고, 어떻게 일해야 승진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등등, 살아남으려는 행동 모두가 바로 ‘사는 것’이 된다. 오로지 잘 살아남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제 살아남는 방법들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런 앎들은 바로 이런 살아남으려는 욕망에 맞추어 만들어지고, 보관되고, 전달된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우리로선 남들이 만들어 놓은 ‘살아남는 기술’을 그저 쫓아갈 뿐이다. 이 기술들을 쫓아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최대 과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전이나 컴퓨터 파일처럼 이런 앎들을 머리 속에 가지고만 있으면, 자신들도 사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당연히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은 ‘살아남는 기술’을 최대한 많이 습득하여 활용하는 것이 된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하다.
소크라테스의 논박 :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 쓰기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당신은 정말 알고 있는가?” 당신이 수많은 책을 읽고, 훌륭한 기술을 익혔고, 심지어 숱한 경험도 겪었다고 하자. 그러나 혹시 당신이 안다고 하는 그 앎, 즉 살아남는 방법들이 당신이 겪은 사태들에 우연히 들어맞았을 뿐이고, 다른 특수한 상황에서는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살아남는 숱한 방법들은 그저 우연한 상황들에만 들어맞는 것일 뿐이지, ‘산다는 것’을 참으로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_ "오늘날의 우리의 학문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가 감각의 증거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정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니체, 『우상의 황혼』, <니체전집>, 책세상, 98쪽)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앎들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어떤 의견(판단, doxa)들일 뿐이라면서, 그것들을 폐기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화 작업, 제거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정화 작업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대화편들의 논박(엘렝코스, elenkhos)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금언도 이런 엘렝코스를 통해서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고(‘무지’), 더군다나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무지의 무지’) 있었다.
이런 엘렝코스는 등에의 침과 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침들이 사람들의 신체와 실존 내에 깊이 박혀야한다(『변론』, 30e)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살아남는 기술만을 최대 가치로 삼는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의 행위와 언어들은 “주제넘은 짓”이고 “어리석은 짓거리”로 생각될 뿐이었다(『변론』, 19b~c) 정적들은 이런 소크라테스를 적대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런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테네인들과 논박을 즐기던 소크라테스는 도시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았고,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도입했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세 가지 죄목으로 끝내 사형판결을 받고 만다. 하지만 이런 판결로 죽음 앞에 서서도 그는 ‘주제넘고 어리석은 짓거리’ 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태도 뒤에 숨어 있는 아테네인들의 기만을 통렬히 나무라고 있다.
제가 일생을 통해 조용히 지내지 못했으니,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사람이 마음을 쓰듯, 돈벌이와 집안살림 꾸미기(oikonomia), 장군의 직위, 대중 연설가 노릇(dēmēgoria), 그 밖의 여러 가지 관직(archai), 정치적 결사(synōmosia)들이나 이 나라에서 생기고 있는 당파(stasis)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니, (…) 개인적으로 여러분 각자를 저의 지론대로, 가장 좋은 일로 잘되게 해 주는 이 일에 뛰어들어, 여러분 각자가 자신이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로워지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쓰기에 앞서 자신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먼저 마음을 쓰지 않도록, 나라 자체에 대해서 마음을 쓰기에 앞서 나라의 무슨 일들에 대해서도 먼저 마음을 쓰지 않도록, 또한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마음 쓰도록 설득하려 했으니, - 그러니 제가 그런 사람으로서 무엇을 받아 마땅합니까? 아테네인 여러분! 어쨌든 진실로 제대로 형량을 제의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변론』, 36c~d)
사실 이 문장은 ‘…하니’ 또는 ‘…했으니’라는 연결어(hoti mathōn)로 계속 이어진 아주 긴, 격정적이고 숨가쁜 최후 진술 중 한 문장이다. 부지불식간에 살아남는 것만을 유일하거나 주된 가치로 삼고 있었을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오히려 살아남기를 거부하며 그들을 구원하려는 소크라테스. 살아남기를 거부하는 그 순간, 그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바로 “각자가 자신이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로워지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쓰기”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변론을 시작할 때 이미 주장한 바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 시민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신께 더욱 복종한다면서, 살아 있는 동안은 철학하는 것도, 시민들에게 충고하는 것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다시 말하면 설사 죽음 같은 것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철학과 충고하는 행위를 그만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성과 재물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도, 슬기와 명예 그리고 자신의 혼(psychē)이 훌륭해지는 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더나가서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 착각하여 자신만큼은 남들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끝까지 심문하며 나무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변론』, 29d~30a). 결국 그는 무엇이든 자기에게 붙어있는 어떤 것들(즉, 자신이 소유한 것들로서 육체, 지위, 재산 등)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해서 마음 쓰기’(즉, 자기 자신을 돌보기, epimeleia heautou)를 요청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죽음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하여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해방의 철학 : 죽음의 수련과 삶의 기술
에곤 실레, <소녀와 죽음> _ "하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자유다. 걱정하는 게 자유가 아니라 충만한 게 자유다." (아리엘 수아미, 『스피노자의 동물우화』, 열린책들, 21쪽)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남는 것에 전념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과 사물에 예속되는 것에서 벗어나서 다른 방식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또한 그 말은 인간이라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사태를 넘어서서 삶 자체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참으로 난감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아니 도대체 살아남지 않고서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살아남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을 쓴다는 게 가능이나 한 말인가?
이 지점에 오면 죽음에 대해서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싶어진다. 죽음 자체를 참고 견뎌내면서, 어떤 비극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태도에 대해서도 바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게 죽음을 견뎌내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크게 나쁜 것들, 예를 들면 나쁜 평판 같은 것을 더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면서,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무서워하는데도 용감하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파이돈』, 68d) 그렇다면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은, 설사 그것이 용감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무서움과 비겁함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참된 의미에서 용기가 아닌 게 되고, 따라서 그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단순한 절제’와 관련해서도 일어난다. 이들도 다른 쾌락들을 빼앗기는 게 두려워서, 즉 그 다른 쾌락에 지배당하고 있는데도 절제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것도 또한 참된 의미에서의 절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두려워하는 사람이 용기를 갖는다고 하는 것이나, 쾌락에 빠진 무절제한 사람이 절제를 한다고 하는 것 모두가 잘 사는 것을 참으로 말해주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사는 것에 대해 난공불락의 아포리아를 만나게 된다. ‘살자’고 해도 문제이고, ‘죽자’고 해도 문제인 어떤 막다른 골목 말이다. 무조건 살아남으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다. 때론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죽음을 숭배하는 철학'으로 비난받곤 한다. 사실 이데아 자체가 죽은 이후에나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런 비난을 마냥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사유가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기계가 아니라, 어찌해서 그게 참이 되고 거짓이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라면, 여기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중대하게 사유하고, 말해야만 했던 이유이다.
생시에 자신을 죽은 것과 최대한 가까운 그런 상태로 살아가는 준비를 한 사람이, 죽음이 자신에게 닥치니까, 이에 대해 성을 낸다면, 그건 우스꽝스럽지 않겠나?....제대로 지혜를 사랑하는(철학하는) 사람들은 실은 죽는 것을 수련하고 있거니와, 죽음이 모두 가운데서도 이들에게 가장 덜 무서운 것일세.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만약에 이들이 몸과는 모든 면에서 사이가 벌어져 있으면서도, 혼은 그것 자체로만 갖기를 바라오다가, 이 일이 이루어지자, 두려워하며 성을 낸다면, 아주 불합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파이돈』 67e~68a)
이 막다른 골목에서 소크라테스가 돌파하며 제안하고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수련(meletēma)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것 중에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것에만 자신을 맡기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즐거움들을 위해서 죽음을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죽음의 수련’은 궁극적으로 ‘철학을 쫓아가는 삶’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삶의 기술’로서 제안된다.
바르게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은 몸과 관련된 일체의 욕망을 멀리하며 버티어내는데, 그것은 재산을 탕진하는 것이나 가난을 조금인들 두려워해서가 아니고, (…) (또한) 타락으로 인한 불명예와 오명을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 이들은 오히려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철학을 통한 해방(lysis)과 정화(katharmos)에 대해서 어긋나는 짓을 해서는 아니된다고 믿고서는, 철학이 인도하는 대로, 철학을 쫓아가며, 그리고 방향을 잡네.(『파이돈』, 82c~d)
결국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는 사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몰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예속 상태(즐거움과 두려움)에 빠트리는 특정 사물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수련은 자기가 자기에게 사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바로 여기서 철학은 온갖 예속상태로부터 전향하여 인생 전체에 걸쳐 존재 전반을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구성하도록 하려는 ‘삶의 기술’로서 제시된다. 이 지점에 오면 진실을 인식한다는 것, 즉 뭔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그 자체로 바뀐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삶의 기술로서, 해방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에로스 :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기
그런데 이런 해방의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서, 예속상태에 있는 현재의 자기와 다르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수련’이란 바로 이 예속상태를 벗어나서,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최상의 전략이자 전투였다. 그것이 전투인 이유는 푸코의 말대로 “진실은 주체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거는 대가로만 주체에게 부여”(『주체의 해석학』, 59쪽)될 것이기 때문이다.
귀스타브 모로, <헤라> _ "삶이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을 요구했을 때 삶은 내게 가장 가벼워졌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책세상, 373쪽)
소크라테스가 아가톤(Agathōn)의 심포지엄에서 에로스(Erōs)에 대해 말할 때, 하려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의 자기와 다르게 되려는 주체의 상징으로서 에로스.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것을 욕망하는 자이고, 사랑하는 자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결여되어있다고, 그것이 추함이나 나쁨 그 자체는 결코 아니다. 추한 것은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추한 것은 온통 추한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한 존재는 생각조차도 추하여 추한 것만을 욕망할 터이다. 따라서 일단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원하기만 한다면 그 에로스는 완전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완전히 추한 것도 아니다. 즉 그것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소크라테스에게 결여란 ‘완전히 없음’이 아니라 ‘완전히 없음’과 ’완전히 있음’ 사이에 있는 어떤 상태, 이를테면 중간자적 존재를 말한다.
이렇게 중간자로서 규정되자마자 에로스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이해될 기반을 갖게 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중간자로서 에로스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기를 바란다. 따라서 에로스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자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 것(oikeion)을 넘어서 좋은 것(agathon)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에로스를 말한다. 사실 중간자는 추한 것이거나 나쁜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결여하기 때문에 항상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에로스는 자기 것(oikeion)을 항상 뛰어넘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것을 뛰어넘어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 소크라테스 말대로라면 자기에게 결여한 것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늘 있게 하려는 존재가 바로 에로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디오티마(Diotima)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으로 가는 사다리’라는 비유를 통해 아주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됩니다. (『향연』, 211c)
즉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저 아름다운 것을 목표로 늘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아름다움으로 이끌려 간다. 이 과정에서 에로스는 기존의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결여된 어떤 것을 찾아내고 그 결여된 것을 다른 이들로부터 얻어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끊임없이 중간자인 채로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려고 한다. 아마도 이 넘어섬이 계속되면 궁극에는 "아름다운 바로 그것 자체(auto ho esti kalon)를 알게"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궁극의 상태로서 상정한 것이지, 에로스 자체가 그런 상태에 도달하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자기를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상태, 과정 그 자체, 다시 말하면 넘어섬이라는 동사 그 자체가 에로스일 것이다. 이처럼 에로스는 매번 자기 존재의 변형에 내기를 거는, 매순간 전위적인 존재인 셈이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야말로 이런 에로스적 존재이지 아닐까? 우리는 언제나 이미 살려고 항상 넘어서 왔다고 말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란 이렇게 ‘항상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밤의 잠을 넘어서고, 밥을 먹는 것도 배고픔을 넘어서고, 일터에 가는 것도 내 집 문지방을 넘어서고, 돌아와 자는 것도 낮의 분주함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처럼 전위적인 에로스야말로 삶의 본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삶은 결코 상투적일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이미 전위적이었고, 앞으로도 항상 전위적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에로스적 운명은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터에 가고, 저녁에 잠이 드는 바로 그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넘어서야만 하는 운명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삶은 상투적이 되고, 예속상태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항상 ‘삶의 기술(technê tou biou)로서의 철학’이 불가피하게 거주할 필요가 생긴다. 항상 예속상태에서 해방하려는 의지를 도발시키고, 현재의 자기 것을 넘어서 본래의 자기 자신─전위적인 에로스─에게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철학은 이 자명한 것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따라서 아마도 ‘산다는 것’은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며 항상 전위적으로 ‘살아지는 것’일 터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매번 9회말 2아웃 후에 뜬 볼을 친 안타까운 마지막 타자일지 모른다. 그래서 머리 처박고 1루를 향해 냅다 달려가고 있는지도. 하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저 볼을 '매번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어서, 누구나 다 싱거울 거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참다운 ‘삶의 기술’이 눈뜨고, 그 기술은 매순간 에로스를 깨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차 말하지만, ‘산다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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