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람(ELAM) 선배들의 충고
나는 뉴욕에서 말레이시아인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역시, 쿠바 전역에 머무르고 있는 말레이시아인들 극히 소수다. 그런데 산타클라라처럼 코딱지만한 도시에, 엘람 출신 말레이시아인이 세 명이나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중에서 두 명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의대를 막 졸업했거나 졸업을 목전에 둔 친구들이라서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자기들의 엘람 후배가 될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오자 어떻게든 시간을 빼주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쿠바라는 낯설고 물선 나라까지 와서 굳이 의학이라는 어려운 과목을 공부하겠다는 한국 여자에게 보내는 동정의 눈초리를....... 제프리 왈,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걱정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네 계획이 무모한 거야.” 나는 ‘무모’보다는 ‘걱정’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쿠바처럼 낯설고 물선 나라에 와도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A군의 불만—엘람인들은 각성하라
처음 만난 사람은 A군이었다. 먼저 지면을 빌려서 A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그는 졸업반이기 때문에 현재 공부와 인턴쉽을 같이 뛰고 있다. 의대 6년 과정을 통틀어서 가장 바쁜 시기다. 그러나 A군은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새벽 시간으로 자기 당번 차례를 바꿔가면서 마지막까지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A군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인데, 키가 훤칠하고 용모가 한국인 같아서 산타클라라의 쿠바 여성들 사이에서는 ‘한국인 이민호’로 통한다고 한다. (쿠바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연예인은 이민호다.) 현재 산타클라라에서 동아시아인 외모를 하고 있는 유일한 주거인이다. 지난 글에서도 몇 번 설명했지만, 쿠바에서 동아시아인이란 그냥 외국인도 아니고 ‘초희귀 외국인’이다. 쿠바의 땅과 오랫동안 접촉한 백인이나 흑인과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다. 가뜩이나 작은 소도시에서 이방인의 처지로 살아가는 것은 나쁘다곤 말할 수 없어도, 피곤한 일임은 확실하다. 어느 길거리로 걸어가든 쿠바인들은 A군을 알아보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를 보고 몹시 흥분했다. 처음에 제프리가 ‘엘람에 관심 있는 외국인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그는 독일인이나 미국인을 상상했다고 한다. 100% 동아시아인인 한국인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A군은 말했다. “너도 나와 같은 ‘쿠바헬’에 입성했구나! 축하해.” 이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A군은 내가 질문을 하기도 전에 엘람에 대한 불평을 한 바가지 쏟아놓았다. 그 중 절반은 엘람에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든 지에 대해서였다.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이런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었다. 외국인으로서 스페인어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힘들긴 해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용어와 씨름하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교수의 말을 이해하려고 머리털이 빠지도록 집중하고, 쿠바 억양이 진하게 묻어 있는 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하루하루를 도를 닦는 심정으로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중도하차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A군의 불평의 핵심은 나머지 절반에 있었다. 이는 엘람의 환경 전반에 관한 것으로, 학생 개인이 어떻게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원망의 주 대상은 오늘날 엘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학생들, 그리고 3학년부터 엘람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쿠바 본토 학생들이었다. 왜 A군은 이들을 싫어하는 걸까? 두 집단 모두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대에 입학하는 쿠바 학생들 대부분은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동기가 없었다. 의사 신분이 되면 쿠바를 더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이유,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이들은 의학을 선택했다. 게다가 쿠바에서 가장 낮은 수능 점수로 입학할 수 있는 학과가 바로 의학이다. 가령, 심리학과에 입학하려면 100점 만점에 최소 92점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의대는 70점이 안 되어도 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의대는 엘리트가 아니라 ‘어중이떠중이’가 몰리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A군도 의사로서 소명 의식이 강한 타입은 아니지만, 동료들의 불성실한 태도에 완전히 질려버린 모양새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학생들은 3년 전부터 엘람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엘람이 장학생 이외에 스스로 등록금을 내는 일반 학생(estudiantes auto-financiados)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엘람은 원래 100% (쿠바든 학생의 출신 국가든) 정부 기금으로 운영되었는데,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입학 정책을 이렇게 바꿨다고 한다. 사실은 이 새로운 입학 정책 덕분에 나 역시 남한 학생 주제에 감히 엘람에서 공부하겠다고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니, 어쩌면 나는 엘람의 변화에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변화에 가장 발 빠르게 반응한 자들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중산층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외국의 다른 의대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쿠바 의대를 선호했고, 엘람이 있는 동네인 바라코아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동네의 물가가 최근 3년 동안 3배 뛰었다. 쿠바인들이나 다른 장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이 친구들이 돈을 물처럼 썼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의 질도 점점 낮아졌다. 이들이 공부는 뒷전이고 춤추고 노래하는 ‘쿠바 문화 탐색’에만 열중했기 때문이다.
A군은 엘람의 국제적인 명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걱정한다. 졸업이 목전이니, 이제 쿠바를 떠나 본격적으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시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디서도 직업을 구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A군은 월급의 액수에 크게 연연치 않고 일단 최대한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을 목표로 세계를 떠돌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쿠바에는 남아 있지 않겠다고 한다. 최근 3년 간 엘람이 겪은 변화에 완전히 질려버린 모습이었다. A군은 잔뜩 겁을 먹은 내게 한 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어떤 선생과 어떤 학우를 만나도, 네가 열심히 하려고만 하면 기회는 올 거야. 학교 물이 안 좋을수록 그 속에서 진정한 공부열을 지닌 학생은 튀는 법이니까.” 역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S양의 열정—의료시스템이 망해도 의사는 의사다
S양은 엘람을 졸업한 지 1년 째, 가정의학 전문의로 일하기 시작한 지 반 년째인 의사였다. 의사로 받는 월급은 한 달에 5만원 밖에 안 된다. 사실상 쿠바의 깡촌 시골에서도 월세도 못 내는 수준이다. 이 비현실적으로 낮은 월급 때문에 엘람 졸업생들은 졸업하자마자 부랴부랴 쿠바를 떠난다. (쿠바의 국가 사정을 고려했을 때 월급의 절대 가격은 낮을 수 있지만, 최소한 이 나라 내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S양은 굳이 쿠바에 남았는가? 왜 전문의 전공으로 가정의학으로 선택했는가? 그는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일단 쿠바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으려면 돈을 내야한다. (그렇다, 역시 돈이다.) 돈을 내면 졸업 후에 곧바로 전문의 과정에 들어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아무거나 선택할 수 있다. 만약 무료로 전문의 과정을 밟고 싶다면 5년 동안 쿠바 커뮤니티에 봉사해야 한다. 쿠바인의 세금으로 교육을 받고 싶다면 일단 쿠바인에게 봉사하라는 것, 이것은 합리적인 요구처럼 들린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도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공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의대가 시설 낙후와 교육 인력 부족을 이유로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 전공 자리를 확보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돈을 내고 5년 봉사과정을 건너 뛴 학생들을 우대한다고 한다. 이런, 쿠바, 이러면 안 되지!) 그래서 돈이 없는 학생들은 차라리 쿠바를 떠났으면 떠났지, 5년이라는 시간을 걸고 도박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가정의학을 전공으로 하는 전문의 과정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 오히려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고 또 공부할 수 있다. 이는 쿠바의 의료 시스템이 가정의학/예방의학을 기반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각 마을마다 동일한 의사가 배치되어서 정기적으로 매 가구를 방문하고 돌봐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영역은 인력이 없어서 못 쓸 정도로 언제나 바쁘다. S양은 어떤 병원도 갓 의대를 졸업한 샛병아리 학생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일단 쿠바에서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에 직업을 찾는 것도 결코 나쁜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문의라는 학위도 따고 실제 진료 경험도 축적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라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로 공부하고 싶은 전공은 나중에 돈을 벌면서 차차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S양은 정말로 의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소명의식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었다. 엘람의 공부는 험난했고, 쿠바라는 마초 사회에서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일도 다반사였으며, 친절한 이 여의사와 말 한 마디 나눠보려는 외로운 노인들이 아프지도 않은데 새벽 5시에 집 문을 두드리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S양은 자신은 노인들을 좋아한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또, 아픈 아이들이 고통의 순간이 지나가고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S양은 자기 돈을 털어서 쿠바 밖에 나갈 때마다 약을 사오는 사람이었다. 제프리가 이번에 산타클라라에 온 것도 약을 배달해 달라는 S양의 부탁 때문이었다. 이처럼 그는 아픈 사람을 눈앞에서 그냥 보고 있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엘람에 대한 A군의 부정적인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묻자, 엘람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러나 A군은 나중에 툴툴거리며 말했다. S양이 자기보다 기수가 먼저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학생들의 쓰나미를 겪어보지 못했다고...... 엘람의 황금기를 보낸 기성세대(?)의 의견일 뿐이라고......)
그러나 S양을 울고 싶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쿠바의 관료주의적인 의료 시스템이었다. 쿠바의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의사들은 몇 명의 환자를 돌보든 간에 자신의 월급 액수가 올라가지 않는다. 반면 의료비는 무료이기 때문에 병원에는 언제나 환자가 넘친다.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아오는 것이다. 동기부여는 약한데 일의 강도는 훨씬 센 상황이다. 게다가 숙련된 의사들은 모두 외화벌이용으로 외국에 보내지기 때문에, 쿠바 내의 의사들은 인력도 딸리고 수준도 떨어진다. 그래서 S양과 그의 상사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마을의 인구는 800명이라고 한다. 단 두 명이서 800명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매일 기나긴 리포트를 써서 정부에 넘겨야 한다. 월급 단 돈 5만원을 받고서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들려준 믿기 힘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술 취한 사람이 검지 손가락이 거의 절단된 채로 병원에 찾아 왔다. 달랑거리는 손가락은 끊어지기 직전이었지만, 당장 수술에 들어가면 봉합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S양의 상사는 말했다. “그냥 잘라.” S양이 사색이 되어서 왜 치료할 수 있는 손가락을 자르냐고 묻자, 상사는 다시 대답했다. “그게 훨씬 더 쉽잖아.” 결국 S양은 우겨서 이 환자의 손가락을 홀로 도맡았다. 병실 구석에서 4시간에 걸쳐 봉합 수술을 시행한 것이다.
이런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자기는 의사인 것이 좋다고 웃는 S양의 얼굴이 예뻐 보였다. A군의 이야기를 듣고 침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들떴다. 그렇다고 A군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충고는 언제나 필요하니까 말이다.
S양이나 A군이나 앞으로 공부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주었다. 역시, 책임감 넘치는 선배들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게 된다면, 각기 다른 문제로 연락을 하게 될 것 같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과연 어떤 엘람 생활을 하게 될까? S양에 가까울까, 아니면 A군에 가까울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제3의 엘람을 보게 되지 않을까? 답은 시간이 가져다줄 것이다. 9월부터 시작될 엘람 생활이 말이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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