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여행인이 되는 훈련
사인방의 마지막 여행
이번에 갔던 멤버는 총 네 명이었다. 당돌한 파티걸인 노르웨이 소녀 헬레나, 나와 4개월 동안 같은 집에 살았던 캐나다 언니 마라, 한 푼 한 푼 철저히 아껴 쓰지만 그렇게 모은 돈으로 친구들 밥 해주는 게 취미라서 ‘자본가 집사(capitalist butler)’라고 불리는 말레이시아 청년 제프리, 그리고 쿠바에서 6년 눌러 앉아 있겠다고 선언한 미친(?) 한국인인 나였다.
이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쿠바에 왔다. 헬레나는 내가 맨 처음부터 어울린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이고, 마라와는 같은 집에서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두 시간 이상 수다를 떨곤 했다. 또 제프리와는 뒤늦게 친해졌지만, 내가 의대에 가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 옆에서 가장 세심하게 도와준 친구였다. 이 친구들은 모두 아바나 대학교에서 6개월짜리 코스를 신청했다. 그리고 외국인이 쿠바에 연속으로 머무르는 최장 기간은 보통 6개월이다. 그 말인즉, 이들이 떠나면 나에게는 오랫동안 사귄 친구들이 한 명도 남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요즘 굉장히 울적하다. 아바나에서 또 다시 혼자가 되다니......
사인방의 마지막 여행
물론 마라는 쿠바에 푹 빠진데다가 경제력도 있어서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다른 친구들은 내가 말레이시아나 노르웨이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이 둘은 다시는 쿠바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치를 떨고 있다. “인터넷! 야채! 생선! 깨끗한 물! 설사는 이제 그만!!!”) 그리고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쿠바 밖으로 여행을 갈 여력은 없을 것 같다.....
똑같은 곳에 세 번째 가는 거라, 여행이 심심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 똑같은 일은 두 번 벌어지지 않는다. 여행은 예상보다 격렬했다. 우리는 새벽 다섯 시에 버스를 타러 나가야 했다. 짠돌이 제프리 때문에 외국인용 버스가 아니라 쿠바인용 버스를 탔던 것이다. 학생 카드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고, 가격은 외국인용 버스의 7분의 1로 2달러 밖에 안 했다. 하지만 덕분에 2시간 반이면 갈 거리를 6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할 수 있었다. 카사에 짐을 풀었을 때는 다들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에 누워서, 3시간 동안 깨지 않고 잠만 잤다. 그 다음 날에는 바다 속 물고기를 구경하러 스노쿨링을 하러 갔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덜덜 떨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해프닝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 날에 방파제에서 바라본 석양은 몹시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우리는 쿠바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 그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무너진 방파제의 틈새로 파도가 일으키는 바람을 느꼈다. 제프리나 마라나 얼마 뒤면 쿠바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감성에 푹 젖어 있었다. 다시 쿠바에 돌아오더라도 지금의 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같은 친구들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쿠바에서 살날이 한참 남은 나는 또 다른 이유로 감성에 젖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한데,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지금의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엘람이 있는 곳도 바닷가 근처다. 쁠라야 라르가/쁠라야 히론의 기억은 종종 불쑥불쑥 생각날 것 같다.
엘람 선배들이 있는 산타클라라로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라와 헬레나는 아바나로 돌아가는 버스를 탄 반면, 제프리는 산타클라라로 향할 예정이었다. 산타클라라에는 제프리의 말레이시아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엘람 6년 차로 인턴쉽을 뛰고 있거나, 이미 졸업해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명이 쿠바 어린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제프리의 영국 방문객에게 약을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쿠바의 의약품이 얼마나 부족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사가 자기 돈 들여서 밖에서 의약품을 사와야 한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제프리에게 빌붙었다. 이번 기회에 엘람 선배들을 소개 받고, 엘람 생활이 어떤지 질문도 할 생각이었다.
참고로 제프리는 영어, 중국어, 광동어, 말레이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다. 두바이에 있는 중국 기업 화웨이에서 3년 동안 미친 듯이 일하다가, 이렇게 돈만 벌다가는 틀에 박힌 인생을 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쿠바로 날아왔다. 쿠바에 스페인어를 배우러 왔다고 하는데, 정작 공부에는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스페인어가 거의 늘지 않았다. 그러나 제프리는 부족한 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쿠바 ‘언더그라운드’의 현실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 현지인처럼 밥 해먹고, 집을 구하고, 여행을 하는데 제프리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쿠바 현지인과 네트워크도 짱짱하다. (역시, 자본가!) 그래서 우리는 무슨 문제만 있으면 제프리를 찾는다. “제프리, 소고기가 필요한데 어디서 파는지 알아?” “달걀은? 시금치는?” “제프리, 나 새로 들어갈 방을 찾고 있는데, 월 300불에 괜찮은데 없을까?” 그러면 곧바로 답이 나온다. (역시, 집사!)
이번에도 제프리는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쪽을 택했다. 쁠라야 히론에서 산타클라라까지는 150km가 채 되지 않는다. 차를 탈 수만 있다면 두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턱없이 부족한 쿠바에서 ‘직통 택시’는 말도 안 되게 비싼 교통수단이다. 오로지 외국인만 이용할 수 있다. (‘택시는 왕이다’ 편의 글을 참고하시길.) 게다가 쁠라야 히론에서 산타클라라로 가는 버스도 따로 없는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서 쿠바인이라면 과연 어떻게 여행할 것인가? 이날 나는 이 여행 방법을 여섯 시간에 걸쳐 제대로 배웠다.
일단 우리는 30분을 기다려서 쁠라야 히론에서 쁠라야 라르가로 가는 합승택시를 탔다. (20쿠바 페소, 약 800원) 그리고 쁠라야 라르가에서 고속도로인 하구에이 그란데까지 가는 합승택시를 한 번 잡아탔다. (20쿠바 페소, 약 800원) 쿠바의 고속도로에는 군데군데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쿠바인들은 혹시라도 빈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고속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짐 싣는 트럭에 올라타거나, 합승택시를 구한다. 이곳에서 우리도 다른 쿠바인들과 함께 30쿠바 페소(약 1,400원) 지폐를 흔들면서 (그렇다, 이것이 로컬 방법이다. 돈을 꺼내들고 미친 듯이 드라이버를 유혹해야 한다!) 거진 두 시간을 기다렸다. 세 대의 꽉 찬 버스와 수십 대의 무심한 택시를 보낸 후에야, 드디어 우리는 빈 버스를 만났다. 그러나 이것도 산타클라라까지 바로 가지는 않았고, 산타클라라에서 8km 떨어져 있는 가까운 ‘285km 주유소’(이것이 주유소 이름이다)에는 멈춰 선다고 했다. 그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우리는 얼른 올라탔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달리다가 버스가 멈춰 섰다. 버스 기사가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강제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 40분 쯤 보낸 것 같다. 그때 산타클라라를 가는 또 다른 버스가 식당에 멈춰 섰다. 쿠바 승객들은 저 버스기사에게 빈자리가 있냐고 물어보라고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고속도로에서 이때까지 우리는 ‘산타클라라? 산타클라라? 산타클라라!’라는 말을 오십 번은 더 외쳤던 것 같다. 같은 버스에 탄 쿠바 승객들로서는 산타클라라에 가기 위해 투지를 불태우는 이 두 치니또가 마냥 재미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부리나케 새 버스로 뛰어갔다.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버스 기사는 우리를 거절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쿠바 승객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나도 몰라. 버스 기사는 왕이거든.” 아..... 이즈음 되면 최고 속력이 시속 50km를 넘지 않는 전동 스쿠버라도 사고 싶어진다. 차 없는 사람은 쿠바에서 어디 서러워서 살겠는가?
여하튼, 우리는 똑같은 버스를 무사히 주유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처럼 산타클라라에 가는 두 명의 무슬림과 마주쳤다. 한 명은 쿠바인이었고, 다른 사람은 가나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나 친구도 엘람에서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제프리가 자기가 말레이시아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아바스(가나 친구의 이름이다)는 깜짝 놀라면서 아리엘(제프리의 친구다)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아리엘과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자신을 아리엘의 베스트 프렌드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이와 관련해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건 다음편 글에서 썰을 풀겠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산타클라라에 가는 또 다른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다. (10쿠바페소, 약 400원) 그리고 산타클라라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말 마차를 타고 시내 중심부까지 이동했다. (5쿠바페소, 약 200원). 카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쁠라야 히론을 떠날 때는 오전 열한 시 반이었는데!
카사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쁠라야 히론을 떠날 때는 오전 열한 시 반이었는데!
쿠바의 교통수단은 ‘아무거나 잡아 타’
우리의 여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85페소(약 4천원)와 여섯 시간. 사용한 교통수단은 세 종류, 이용한 번수는 다섯 번이었다. 쁠라야 히론(택시)->쁠라야 라르가(택시)->하구웨이 그란데 고속도로(버스)->285km 주유소 (버스)->산타클라라(말 마차).
하구웨이 그란데 고속도로에서 한 쿠바인에게 산타클라라까지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지나가는 거 아무거나 잡아 타...... 계속 그러다보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이것이 정답이다. ‘아무거나 잡아 타’가 쿠바의 교통수단이다. 택시, 버스, 스쿠터, 오토바이, 기차, 트럭, 내 옆을 지나가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잡아타야 한다! 따라서 쿠바에서는 그 누구도 여행 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같은 거리라도 운이 좋으면 두 시간에도 가고, 운이 나쁘면 여섯 시간에도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비라도 내리면 끝장이다.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햇살 아래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이 때문에 쿠바 노인들은 웬만해서는 여행할 엄두를 못 낸다. 쿠바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스마트폰으로 비행기 표부터 KTX를 다 예약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계속 그러다보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산타클라라에 도착하자,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일단은 여행이 여행다워서 좋았다. 150km라는 거리는 처음에는 짧게 느껴졌지만, 이는 오로지 내가 자동차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이 가진 것은 두 발 밖에 없다. 두 발로 150km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절대로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여행을 하려면 이 정도 고생 값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뙤약볕에서 앉아 있는 쿠바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한 나라 안에서 이렇게 이동이 힘들어서야 되겠는가? 나처럼 시간이 넘쳐나는 여행객이면 모를까, 아픈 친척을 보러 가거나 일 때문에 다른 지방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쿠바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스트레스 그 자체다.
여하튼, 이날 이렇게 여섯 시간 동안 이동한 것은 충분히 보람찬 일이었다. 나의 말레이시아 엘람 선배들은 내게 흥미진진하고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썰을 풀도록 하겠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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