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을 시작합니다!
각기 다른 배경,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세 '아빠'가 모였습니다. 모여서 '우리가 뭐가 다르지?'라고 물었죠. 뭐라고 딱 떨어지게 답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보통의 아빠'들과는 어딘지 미묘하게 다른 삶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지, 아니면 어떻게 비슷한지 각자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런 연재를 한다는 것부터 이미 좀 다르지 않나...하는 생각 말입니다. 세 아빠들이 풀어가는 이야기,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빠인 나, 그리고 나의 아버지 이야기
나, 그러니까 이 아빠, 취미형 인간
아빠가 되기 전에 나는, 내가 ‘아빠’가 될 가능성이 무한히 0에 수렴할 정도는 아니지만 극히 낮다고 생각했다. 아예 가능성이 제로가 될 수는 없으니 한 2~3% 정도라고 해두자.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좋은 직장을 얻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오순도순 사는 데 아무 욕망도 없었기 때문이다.(요즘은 자꾸 좋은 직장과 단란한 가정을 지금이라도 만들어 보자는 욕망이 생기고 있다.)
나의 관심사는 극히 단순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난 걸 할 수 있을까’, 그게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당시엔 좀 더 복잡하고, 되도 않는 말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았었다. 지금으로선 ‘난 단순히 재미있는 것만 원하는 게 아니야’ 같은 말을 하면 더 멋져보이니까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역시 군더더기 다 빼놓고 보면 그거였다. 난 재미난 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데, 재미난 것 한가지를 정해놓고 그것에만 몰두하는 타입과 두루두루 재미난 걸 찾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넘치도록 많은 취미들을 가지고 있는 타입이다. 난 후자였다.
가장 대표적인 취미는 음악 듣기와 그에 따른 음반 모으기다. 이것은 내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꽤 좋은 오디오와 음반이 있었고, 그런 환경은 이쪽 계통에선 금수저나 다름없는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 내가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이제 ‘취향’이 거의 사라질 정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듣든 음악에 맞춰 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정도다. 그 많은(았던) 취미들 중에서 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 음악듣기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기타도 치게 되었다. 기타 실력은 고등학교 시절 교내 밴드를 할 때에 비해 거의 나아진 게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 외에는 지금의 직업과 대학시절 운동권 생활을 가능케 해주었던 책읽기와 글쓰기, 그리고 그 취미들 덕에 생긴 만년필 관련 취미들이 있다. 그리고 만화책도 아주 좋아한다. 아, 프라모델(주로 2차 세계대전 관련 제품들)도 만들었다. 아, 그리고 한때는 자전거도 탔다. 아, 카메라도 무진장 좋아했었지. 그러고 보니 최근엔 달리기를...... 그랬다. 나는 그렇게 내 젊음과 통장잔고를 취미로 소모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아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는 덜컥 아빠가 되기 전엔 ‘아빠’가 될 생각이 없었으므로, 짜증은 좀 났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앙상한 통장잔고와 물려받은 빛과 앞으로 딱히 더 나아질 일이 없는 벌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가 서른여덟에 아빠가 될 줄 알았더라면, 스물여섯 첫 직장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꾸준히 정기적금을 붓고, 헛돈을 쓰지 않으며, 물려받은 빚도 착실히 갚아나가는 삶을 살았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빠’가 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착실하게 살았어야 했다. 지금은 ‘물려받은 빚’이 되었지만, 당시엔 부모님이 갚고 있는 빚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통장은 비슷하게 헐렁하니 말이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져야할 때가 되어서야 책임지는 성품이다보니, 아빠가 될 줄 알았더라도 아빠가 되고 난 다음에야 지금과 똑같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금전적인 문제들이 아닌 것들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가령 살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여느 아기들에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는 했을 듯하다. 지금은 길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아기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딸을 키우기 전엔 별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보는 아기들이야 귀엽긴 했지만, 길가다 보는 정도보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극도의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요약하자면 아기를 비롯해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거의 모든 애들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딸을 낳아 키우면서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아기들이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그 아기들을 성장을 돕기 위해 부모들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기 때문이다. 길에서, 공원에서 보는 그 모습들 너머의 모습들에 공감할 수 있게 되니 조금 시끄럽다고, 아무대로나 막 다닌다고, 음, 조금 못생겼다고 막 싫어할 수도 관심을 뚝 끊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아빠는 딸이 생긴 후로 적금도 꼬박꼬박 넣고 있고, (애보느라) 헛돈도 거의 안(못) 쓰고, 생활도 (비교적) 규칙적으로 살고 있다. 거의 군인 같은 삶인데, 당연하다. 육아는 전쟁이니까. 다만, 그래도 역시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많다. 직업이야 딸의 엄마가, 그러니까 아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의 직원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안정성과는 별개로 평생 이걸 해야겠다 싶은 정도의 확신이 들지 않는 불안정한 나의 일(웹 마케팅이라든가, 블로그 운영이라든가)에 관한 고민 같은 것들이다.
당장에야 주 직업인 육아와 두 번째 직업이 출판사 일과 마지막으로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들을 하다보면 그런 고민 따위 사치스럽다고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모를 찜찜함 같은 게 있기는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업무가 세 개나 되다보니 그런 찜찜함을 느낄 겨를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일상이 어찌나 빡빡한지 10대 시절 ‘무한히 커다란 우주와 먼지보다도 작은 인간’ 이야기를 들은 이후 내내 가지고 있었던 허무감조차 마음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으니까.
아빠는 어떻게 아빠가 되는가
우리 딸의 월령 18개월 현재, 그녀는 가끔 화도 내고, 짜증도 낸다. 대단한 건, 그러고 난 다음에 (잠깐이긴 하지만) 한동안 아빠를 본 체 만 체 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변화다. 지금까지 그는 매번 그때 그 ‘순간’만을 사는 것 같았다. 막 보채고 떼를 쓰다가도 재미나게 해주면 즉시 재미난 일로 넘어가서 깔깔 웃었으니까. 서운해 한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에 이제 ‘과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앞으로 차곡차곡 접혀갈 그의 과거 속에서 나는 어떤 ‘아빠’로 기억될까?
다시 말하지만, 지난 나의 인생 계획 어디에도 ‘아빠가 되는 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온갖 판타지로 가득 찬 10대 시절에도 ‘남편’이 될 판타지는 없었으며, 그 이후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될 마음이 없는데 ‘아빠’는 말해 무엇하랴. 물론 남편이 되지 않고 아빠가 되는 길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쪽은 아빠가 아닌 남편이 되는 것보다 더 멀리 있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결정적인 일들이 그러하듯, 나는 갑자기 정신 차리고 보니 아빠가 되어 있었다.
우리 딸이 엄마 뱃속에 있는 걸 알았을 땐, 아빠도 남편도 아니었다. 마음만은 즉시 아빠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진짜 아빠라고 볼 수는 없었다. 더 나아가 딸이 세상에 나오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아빠’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아빠’가 맞기는 한데,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없으면 아기에게 필요한 어떤 것도 제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울어도 왜 우는지 모르고, 아기가 눈을 뜨고 있으면 어떻게 놀아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때그때의 모든 순간들이 난감하기만 했었다. 물론 그랬던 것은 단지 며칠뿐이었다. 아기를 돌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자 자신감도 함께 늘어갔다. 아기와 단 둘이 남아도 전혀, 그 어떤 돌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이 생겼다. 18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 딸의 주 양육자로서 나는, 아기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다 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아빠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단련되는 것이다. 육아란 전쟁이고, 양육은 전사의 일이며, 이 아빠는 전사다!
아빠의 아버지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날 때가 많다. 무엇보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고, 그것도 티나게 주신 분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우리 딸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날이면, 내가 저만했을 때 우리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딸이 온갖 심통을 다 부리는 때에도 젊은 우리 아버지도 이런 위기를 어떻게 넘기셨을까 생각한다. 이 아들과는 달리 ‘욱’하는 일이 없으셨던 분이니 나처럼 딸에게 불끈했다가 후회하거나 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아버지는 기가 막히게 아기를 잘 보셨다고 한다. 놀아주기도 잘 놀아주고, 기저귀 가는 것부터 안고 재우는 일까지 육아와 관련된 거의 모든 종목에서 어머니보다 더 나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우리 딸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주 그리워진다. 손녀를 못 보신 것도 아쉽고, 내가 우리 딸만 했을 때 어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도 아쉽다.
아버지, 다정하지만 어딘지 냉정한
나는 매듭을 묶거나, 박스 포장 같을 걸 할 때 꼼꼼하고 단단하게 조이지 않으면 내내 마음이 찜찜하다. 그런 면과는 반대로 무언가 고장 난 걸 고칠 때, 원하던 기능이 멀쩡하게 돌아가면 마무리를 대충하고 끝낸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다. 어느 면에서는 말할 수 없이 꼼꼼한데, 어느 면에서는 이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허술했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문득문득 그런 아버지가 나에게서 튀어나오곤 한다.
자식을 대할 때도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그 세대의 아버지들에게선 쉽게 찾기 힘든, 자식에 대한 다정함이 넘치는 분이었다. 겨울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를 안아주곤 하였다. 그때 아버지의 작업복 점퍼에선 꽁꽁 언 담배냄새가 연하게 났다. 뜨거운 방바닥과 엄마가 추울까봐 덮어놓은 솜이불 사이에서 벌겋게 익은 나는 아버지의 시원한 품이 좋았다. 지금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런 아버지의 손에는 호빵 봉지가 들려 있기도 했고, 뜨끈뜨끈한 만두가 들려 있기도 했다.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를 사가지고 와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는 걸 그렇게 좋아하셨다. 내가 우리 딸을 보면서 그려보는 미래의 그림도 그런 그림이다. 딸이 좋아할 법한 먹을거리를 짠, 사가지고 나타나서 즐겁게 나누어 먹는 모습이 내가 그리는 다정한 아빠의 모습 중 하나다.
그런데 그렇게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냉정한 아버지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부모가 가진 냉정함이란 어떤 ‘의도’를 가진 냉정함이게 마련인데 우리 아버지의 경우엔 그런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아무 관계없는 ‘타인’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었다. 특별히 어떤 일화가 생각나거나 하지는 않지만, 어릴 때는 문득문득 아버지가 왜 이러는가 하는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 보건데,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역할이 많이 낯설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셨는데, 그때 아버지가 겨우 6개월 남짓한 아기였다. 반쯤 정신을 놓은 할머니와 형, 누나들 사이에서 딱히 다정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한 아버지였으니 나를 대하는 아버지 자신이 어쩌다 낯설 때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버진 ‘알아서’ 살아남는 게 당연한 환경에서 자라신 것이다. 뭐든 해달라는 식으로 매달리는 당신의 어린 자식이 가끔 이상하기도 하셨겠지.
택시 운전사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오랫동안 하셨다. 법인택시, 개인택시, 모범택시, 다시 개인택시까지, 내 기억에 아버진 거의 25년 정도, 인생의 3/1 이상을 택시기사로 사셨다. 택시 운전을 하기 전에도 아버지의 직업은 늘 ‘운전’과 관련된 일이었다. 트럭으로 공장에서 나온 간장을 대리점에 배달하거나, 아이스크림을 소매점으로 배달하거나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진 늘 자동차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특히 실내에 신경을 많이 쓰셨는데, 거기엔 몇가지 원칙이 있었다. 대시보드에는 아무런 장식품도 올려두지 않는다거나, 염주, 묵주, 십자가 같은 종교적인 물건도 절대 놓지 않으셨다. 전방시야가 놓이는 곳은 언제나 순정 상태 그대로여야 했다. 대신 카오디오는 가장 좋은 걸 놓고 들을 형편은 안 되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선 가장 좋은 걸 사용하셨다. 클래식이나 올드팝을 아주 많이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아빠는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을 차에서 보내기 때문에 음악도 차에서 가장 많이 들어. 그러니까 오디오는 좋은 걸 써야지. 엄마한테는 50만원만 줬다고 하자.” 내가 여전히 음악을 일상적으로 듣고, 딸에게도 될 수 있으면 많은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이유는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집에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LP와 CD가 꽤 많다. 아버지는 나도 좋은 음악을 많이 듣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셨다. 음악을 좋아하면 살면서 힘들거나 지칠 때 더 멋지게 쉴 수 있다고도 하셨다.
아버진 자동차의 간단한 소모품 교환이나, 수리는 직접 하시곤 했다. 이를테면 엔진오일이나 브레이크 패드 교환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나는 그게 좀 싫었다.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기름때 묻혀가며 ‘직접’ 차를 손보는 게 궁상맞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늘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동네에 학교 친구들이 많은 것도 어쩐지 신경쓰였다. 물론, 이런 이야기의 끝이 언제나 그렇듯이, 학교 친구들은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자동차 바퀴의 볼트를 조이는 우리 아버지와 옆에서 아버지에게 볼트를 건네어 주는 나를 보고 인사를 하곤 했다. 지금이야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손재주 좋은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엔 나와 우리 아버지가 초라한 것 같아 움츠려들곤 했었다. 그런 나완 다르게 아버진 오히려 그런 일을 할 때 더 즐거워 보였다.
사실 아버진 택시 운전 일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내내 그 일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자동차 정비나 기계를 다루는 일이 아버지의 적성에도 훨씬 잘 맞았을 것 같다. 택시 운전을 하러 나가실 때는 즐거워 보였던 적이 드물었지만, 쉬는 날 주차장에 나가 자동차 보닛을 열 때는 거의 항상 즐거워 보이셨으니 말이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이 직업이어서 그랬을까. 내 기억에 아버지의 벌이가 좋았던 시절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언제나 빚에 쪼들렸고, 빚을 갚아야 하니까 택시를 몰고 나가야 했고, 빚 갚을 돈을 벌러 나가야 하니까 집에서 쉬어야 했다.
교양인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나름 취향이 생겨 음반들을 모으고, 책을 직접 사서 읽기 시작하자, 아버진 기다렸다는 듯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물론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음반을 팍팍 사주셨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지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서적 지지였다. 그러니까, 돈이 생기는 대로 음반을 사서 듣고, 책을 사 읽는 일이 시간낭비, 돈낭비가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야 말로 중학생인 네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훌륭한 일이라 여기게끔 해주신 것이다. 물론 나중에 한참 자라고 나서도 월급을 거의 대부분을 그 일들에 쏟아 붓는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일에 죄의식 없이 몰두할 수 있게 해주신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는 내가, 무엇보다도, ‘명실상부한 교양인’이 되길 원하셨다. 학교라고는 ‘고등공민학교’ 밖에 다니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학력과는 별개로 보기 드문 교양인이셨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책장엔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세계문학, 사회과학, 인문학 문고본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뿐인가, 집에는 언제나 오페라 아리아나 교향곡 선율이 울려 퍼지곤 하였는데, 그런 고급한 문화를 자유자재로 즐기는 중에도 아버진 항상 학력 콤플렉스를 안고 사셨다. 이를테면 일을 하시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곤 하셨는데, 혹시나 손님이 ‘무식한 택시기사가 무슨 클래식을 듣는다고...’하는 식의 시비를 걸어오진 않을까 걱정하는 식이었다.(생전에 아버지의 흩어진 이야기 몇가지를 떠올려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으므로, 나 역시 그런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좋은 오디오로 좋은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만나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걸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문제는 아버지의 학력이었다. 아버진 마치 ‘교양인 면허’ 같은 게 있기라도 한 듯, 대학을 나와야 진짜 교양인답게 살 수 있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말하자면 대학을 나와야 ‘명실상부한 교양인’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성격상 ‘무조건 대학에 가야해’ 같은 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났었다. 이미 충분히 훌륭한데 어째서 그런 콤플렉스를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기 시작한 화가 내 20대 시절 내내 지속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에게 참 미안한 생각이 든다.
여하간 나는 아버지가 원하던 대로 (졸업은 못했지만) 대학도 다녔고, 내 일과 삶에 비추어 ‘이 많은 교양을 어디에 다 쓰나’ 싶을 정도의 교양인도 되었다.
아버지가 원했던 삶
그 세대의, 혹은 그 전 세대의 여느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우리 아버지의 목표도 나에게 자신과는 다른 삶을 물려주는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성공하신 듯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은데, 이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리고 아버지 자신이 살길 원했을 삶을 내가 살고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버진 1950년 전쟁이 나기 여섯 달 전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일제시대부터 평양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한 기업가였던 할아버지는 월남하여 사업을 계속 하셨지만 점령당한 서울에서 납북되셨다. 그래서 아버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전쟁통에 가족의 사진첩을 넣어놓은 가방을 잃어버려서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할머니는 반쯤 정신을 놓으신 상태였고, 막내였던 아버지는 형과 누나들 틈에서 늘 기가 죽어 있었다고 했다.
성인 된 다음엔 늘 운전과 관련된 일을 하셨다. 당시엔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도 몇 없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충분히 ‘기술’이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는 다른 일이 하고 싶으셨지만, 학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므로 다른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역경을 이겨내고 목표했던 바를 기필코 이뤄내는 성품의 사람이었다면 다른 수가 있었겠지만, 아버진 역경을 만나면 역경을 피해 될 수 있으면 편한 쪽에 머무르는 분이셨다.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아 기르는 동안이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다. 내가 중,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문득문득 어머니에게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 방문을 한번씩 열어보시곤 ‘참 부러운 놈이야’ 같은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떠올렸을 아버지의 ‘불행했던 시절’들을 상상해 보면 배고프고 여기 저기 살이 튼 어린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드리고 싶어진다.
어떤 당위나 의무감 같은 것은 전혀 없지만 나는 기꺼이 내게 주어진 이 삶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내 삶을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아버지가 보란 듯이, 당신이 물려준 그 많은 것들을 재산삼아,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즐겁게 지낸다고,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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