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되었다, 다른 삶이 주어졌다
아빠가 된다는 건, 어떻게 되는 건가? 나에게 그것은, 거의 다시 태어나는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전반을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이었다. 그것은 존재가 전혀 다른 장(場)에 놓이는 일이다.
예전에는, 아빠가 되기 전에는 ‘아이를 낳아 길러보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콧방귀(흥!)가 나오곤 했다. 그 이야기는 마치 ‘공부엔 다 때가 있다’는 말처럼 옳기만 할 뿐 여전히 젊(다고 믿고 있)은(는)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공부에 ‘때’를 놓쳐봐야 정말로 공부에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듯, 진짜 부모가 되어 봐야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나의 경우엔 ‘어른’이 되는 걸 일부러 지연시킨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냥 좀 꺼려졌다고 할까. ‘어른’이 되어서 기꺼이 내 일에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영원히 소년으로 남는 편이 더 멋지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당연하게도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일도 좀 보이고, 배도 좀 나오고, 담배도 늘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거기 남아있는 것은 여전히 풋풋한 소년도 아니요, 굳센 어른도 아닌, 늙은 소년뿐이었다. 그러다가는 영영 아무것도 아닌 채로 한 세상 끝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나를 덮쳐왔다. 그리하여 열심히 내면의 성장을 도모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이 내게 보여주는 것은 허무하고, 또 허무한 아수라장, 그건 아마 내 마음이었을 텐데 참 꼴보기가 싫었더랬다.
그래도 그런 중에도 사람이 숨이 붙어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되는 것인지 나는 꾸역꾸역 연애도 했고, 소설도 좀 읽었고, 도무지 귀에서 겉돌던 흑인음악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득바득 용을 쓰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아빠가 되었다.
늙은 소년은 정든 집을 떠난다
우리 딸이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다. TV 드라마에서처럼 아빠는 입덧하는 엄마를 위해 한겨울에 딸기를 구하러 마트에 가기는커녕 정신없이 몰아쳐 오는 본가의 일을 처리하느라 혼이 쏙 빠졌었다.
일어난 일을 꼽아 보자면, 나의 모친께서 욕실에서 낙상을 하시는 바람에 허리에 골절상을 입고 입원을 하게 되셨고, 그 사이에 본가는 윗집의 누수로 인해 벽지가 다 젖고, 그 물이 두꺼비집으로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정전까지 일어났다. 와중에 본가를 비우고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아내 곁으로 올 수도 없었다. 방문하는 누수업체마다 어디서 물이 새는지 찾질 못하는 바람에 일주일 넘게 아침마다 탐지업체를 바꿔가며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건의 이해당사자(인 모친의 대리인)로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밤에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추운 본가에서 내내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요즘 보일러는 전기가 안 들어오면 불도 붙일 수가 없다) 참 우울한 시절이었다.
춥고 어두운 밤 본가 내방 침대에 누워 나, 아빠는 온 생애를 통틀어 가장 낯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내를 걱정하였다.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그러고 있었던 것이지만, 혹시나 이렇게 ‘본의 아니게’ 방치한 것으로 나중에 책을 잡히면 어쩌나...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혹시라도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져서 아기와 엄마 모두에게 안 좋은 영향이 생기거나 하면 어쩌나 같은 유의 걱정이었다. 물론 그건 그냥 나 혼자 생각한 것이고, 아내는 나처럼 궁상스럽거나 지질한 구석이 없는, 그야말로 쿨(cool)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그 낯설었을 시간을 굳세게 통과해 버렸다. 아, 물론 그렇게 결과가 좋기는 했지만, 나는 그때의 그 ‘본의 아닌’ 방치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그때의 일을 가지고 나와 공격하는데, 여전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다. 처음엔 그냥 당하고만 있었으나 요즘은 그냥 기억을 못하는 척하기도 한다.
모친의 퇴원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드디어 누수의 원인을 찾았다. 보일러관이 터져서 그 물이 바닥을 타고 우리 집 천장과 벽으로 흘러들었던 것인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살았던 그때까지의 ‘우리 집’과 작별을 준비하였다. 사실 나는 그 집에서 조금 더 일찍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어쩔 수 없이 더 오래 살게 된 것이었다. 떠나겠다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나는 그 후련한 마음에 힘입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고야 말았는데, 모친이 퇴원해 돌아오기 전에 도배한 지 10년이 넘은 온 집안의 벽과 천장, 누수로 인한 물자국으로 얼룩진 그 벽과 천장을 (일명) 벽지페인트로 싹 칠하자는 계획이었다. 내가 떠난 후에 그 집에서 혼자 살게 될 엄마가 좀 더 깨끗한 집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어쩐지 이 집에 작별의식 비슷한 것을 하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계획이었는데, 나 혼자 힘으로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실제로 해냈으니까) 해서는 안 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온 집안을 새로 칠한 후에 깨끗해진 천장과 벽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러나 한시라도 빨리 거길 떠나고 싶었다. 지나치게 힘들고 훌륭한 작별의식이었다.
아기가 온다, 딸이 왔다
우리 딸은 불현듯,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아내와 나의 인생에 끼어들었다. 이게 왜 ‘불쑥’인가 하면, 우리는 아기를 바란 적도 없고, 아이를 키우며 그것을 낙으로 삼는 인생을 바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각자 허무한 가운데 열심히 일하는 독신남녀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 절대, 절대 아이는 낳지 않을 거야’라거나, ‘오, 세상에 애를 어떻게 키워’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어렴풋이 ‘애가 생기면...음... 뭐 낳아서 키우면 되지 않겠어?’ 정도였달까? 가끔 TV 같은데서 너무 사랑스러운 아기가 나오면 ‘아이를 키우면 참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같은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막 그 말에 책임져야 하고 그런 거 아니지 않나요? 뭐 여하튼, 그런 정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일단 아내의 뱃속에 아기가 생겼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내도 나도 감격했다. 나의 경우엔 어떤 안도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아내에게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아기가 생겼으니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 ‘강제로라도 이 삶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같은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반짝하고 솟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금방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격에 사로잡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빠의 삶의 한마디에 모종의 출구를 열어준 우리 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아빠가 된다, 삶의 다른 길이 열린다는 생각에 두근두근 하고 있었는데, 문득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올랐다가 덮쳐왔다. 일단, 결혼 소식을 친구들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 ‘나는 결혼 안 할 건데?’ 또는 (결혼한 친구에게) ‘그러게 결혼을 뭣하러 했어’라고 떠들어댄 나에게 그들은 무어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놀림을 받을 것인가. 뭐 그건 어떻게 잘 참고 넘어간다고 하고, 본가에 남아있는 빚은 어떻게 할 것이며, 혼자 남게 된 모친은 괜찮을 것인지 등등,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잔뜩이었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손쉬운 결론에 도달했다.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그랬듯 뻔뻔하게 굴기로 했고, 그 외 기타문제들은 어떻게든 될 터이니 순리에 따르자는 결론이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대충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 든든한 우군 (좀 미안하긴 하지만)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신조,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하니 처하태평(妻下太平)이라’
‘모든 일을 아내의 명령에 따라하니 아내 밑에서 태평하리라’는 뜻이다. 아내는 어떤 선택의 순간에 대개 나보다 옳은 선택을 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원칙적인 사람인 동시에 최강의 리얼리스트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도 탁월하다. 반면에 나는 편의에 따라 ‘원칙’을 자유자재로 바꾸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냉엄한 현실을 떠나 훨훨 날아오르길 주저하지 않는, 말하자면 제멋대로의 도피적 성향의 인간이다. 이런 내가 저런 아내의 명령에 따르는 게 어느 모로 보나 좋다. 그나마 나에게 이 정도 지혜라도 주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여하튼 아내의 그런 성품에 비춰 보건데 나에게 닥친 현실적인 걱정들에 대한 해답을 그녀가 이미 모두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나는 내가 처리할 사소한 문제들(내 친구들에게 이 결혼과 임신소식을 알리는 문제나, 남아 있는 자잘한(?) 카드 대금을 처리하는 문제, 그녀 몰래 구입해 쟁여 놓은 각종 취미용품들의 처리 문제 따위)에 관해서는 최대한의 자율성을 발휘해 번개같이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좀 굵직한 문제들, 부모님들께 알리는 문제, 결혼 후 수입의 배분과 할당 문제 같은 것들은 그냥 온전히 그녀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물론, 나의 이런 처세에 대해 아내는 불만이 많을지도…아니다, 사실, 그녀의 불만은 내 처세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언설에 있을 것이다. 말인즉, 내가 말로는 그녀의 말을 다 따르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녀가 원하는 만큼은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 그녀의 가장 큰 불만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에게서 ‘사람들은 내가 널 휘두르는 줄 알지. 쯔쯔’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이에 대해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화만 더 돋우는 말이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노력해서 그 정도라는 점이다. 나는 사실 (사람이 누구나 그렇겠지만) 누가 보아도 자아가 강하고, 진심어린 남의 조언을 거의 언제나 참고만 하며, 매사에 취향이 분명한(했던)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전형이다(었다). 그런데 아내를 만나고 한 번, 아빠가 되고 두 번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자기중심의 기둥을 부쉈다. 살면서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정말이지 결혼-육아 생활에 손톱만큼의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이다. 언제가 그 기둥들이 다시 재건될지 어떨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냥 이 상태가 더 좋다. 강한 자아와 취향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 생활은 파탄까지는 안 가더라도 극도의 우울 속에서 지속되지 않았을까?
결혼과 육아가 인생의 메인스테이지에 들어오면서 이른바 ‘내 시간’은 심야의 몇 시간 정도로 한정되고 말았지만 나는 기꺼이 ‘나’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초반에는 그 시간 없음에 절망하고 ‘이게 우울증인가?’ 싶은 정도까지 갔었다. 그런데 그 상태로는 도저히 아기를 돌볼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나름대로 ‘훈련’하듯 그 ‘시간 없음의 시간’들을 버텨냈다. 말하자면 낮에 아기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내 (자아)의 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옆으로 밀쳐놓는 연습이었다. 그게 마음속에 있으면 결국 조바심이 나게 되고, 그 영향이 고스란히 아기에게 가기 때문이다. 아기를 버리는 것보다는 낮 동안 ‘나’를 버리는 게 훨씬 쉬웠다.
지금은 아기를 돌보는 것과 관련해서는 쉽게 우울감에 빠지거나 하지 않는다. 우울해질 것 같으면 딸과 더 격렬하게 놀고(아빠가 힘들수록 딸은 더 크게 웃는다), 더 열심히 유아식을 만들고, 빨래를 돌리고, 빨래를 개키고, 방을 닦고, 딸을 씻기고 한다. 그러고 나서 밤을 맞이할 때, ‘내 시간’에 대한 갈급증이 훨씬 줄어들어 있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는 함께 키우는 것’이라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함께’ 아기를 돌보고, 생활을 책임지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숨구멍이 되었다.
물론 나는 아내의 말에 모두 다 (기계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아내가 옳다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굴 때가 있는데, 그건 도저히 나도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뻘짓인 걸 알면서도 그걸 꼭 해야만 다음 날이 살아지는 그런 짓들 말이다.(아내의 눈에는 도저히 저런 짓을 왜 하나 싶은 ‘키보드 스위치 교환’이라든가, ‘심야 만년필 세척 주간’ 같은 짓들 말이다. 쩝.)
어쨌든, 그렇게 아빠이자, 남편이 된 나는 꽤 어른스러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다보니 인생이 어떻게든 앞으로 간다.
아빠가 되기는 되었다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비하면 아빠가 되는 문제는 쉽다. 이건 단지 열심히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하루에 몇 차례, 불쑥 마음속에서 그런 질문이 솟는다. 딸을 혼내거나, 그녀가 원하는 걸 하지 못하게 막을 때 같이 딸이 불만을 가질 법한 상황에서 특히 자주 생각난다. 여전히 나는 사람이 저마다 타고나는 게 있고, 그게 다 다르고, 각자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지만, 그와 동시에 그 타고난 것이 발휘되는 환경의 영향력도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딸을 두고 볼 때, 그녀의 인격형성에 결코 적지 않은 지분을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면 겁이 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그녀에게 좋은 영향만을 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게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느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훌륭한 점과 별로인 점이 비슷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을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나로 인해 혹시 우리 딸의 인생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떨쳐보려고도 해보았는데, 그럴수록 더 끈적하게 달라붙어 온다. 그래서 나는 요즘엔 애써 떨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루에 한번쯤 해본다. 그러는 편이 아빠인 나를 점검해 보는 데에도 좋고, 딸을 대하는 마음이나 자세를 정돈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만, 나름대로 경계를 늦추지 않기도 하는데, 저런 식의 불안감은 까딱하면 딸에게 좋은 것만 주겠다는 식의 강박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얼마든지 괜찮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이런 고민이 인생의 주요한 고민이 되었다는 게 낯설기도 하지만, 이 낯선 기분이 인생을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활력을 준다. 심지어 내 인생에 최근 10년 사이에 이렇게 활력이 넘쳤던 적이 없다. 아빠가 되길 잘했다. 아니지, 아빠가 되게 해주어서 참 고맙다.
- 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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