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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심복과 기혈로 움직이는 나라 - 中

by 북드라망 2018. 7. 12.

심복과 기혈로 움직이는 나라 - 中

민약이 이루어짐에 땅[地]이 변하여 나라[邦]가 되고 인(人)이 변하여 민(民)이 된다.

민이란 중의(衆意)가 서로 결합되어 몸을 이루는 것[成體]이다.

이 몸은 의원(議院)을 심복(心腹)으로 삼고 율례(律例)를 기혈(氣血)로 삼아

그 의사를 펼치는 것이다.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나카에조민전집(中江兆民全集)』1권, 92쪽

 

심복(心腹)과 기혈(氣血)이라는 은유

전통에서도 신체를 가지고 정치기관을 은유하는 비유는 있어왔다. 특히 심복(心腹)이나 고굉(股肱) 등과 같은 말로 군주를 보좌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다면 조민이 심복으로 의원(議院)을 유비할 때, 전통적인 논의 속에서 국회를 신하의 자리에 바꿔 넣은 것이었을까? 그러나 법령을 기혈(氣血)에 비유한 것은 전통적인 논의 속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발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민은 왜 이러한 은유를 집어넣은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은유는 어디에서 가지고 온 것일까? 이에 대해 루소의 추상적인 공동체론을 조민이 구체적인 국회개설과 헌법제정의 원리로 바꾸어 제시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루소의 계약론의 본질과 별도로 조민은 국회개설과 헌법제정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루소의 논의를 자기 식으로 끌어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조민이 처한 당대의 컨텍스트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해 보인다. 그가 운영하던 불학숙은 정치가를 길러낼 것을 기치로 삼았고, 그 불학숙에서 발행한 잡지인 ​『정리총담』은 1회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2회부터는 ​『민약역해』를 싣고 있다. 이는 『민약역해』 가 단순히 교육용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텍스트였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당시 국회 개설을 둘러싸고 민권파와 국권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그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적 의도 속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원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맥락적 설명과 더불어 사상의 내재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논의는 왜 하필 신체 유비가 추가 되었는지, 왜 다른 것이 아닌 ‘심복’과 ‘기혈’로 비유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조민이 루소의 다른 텍스트에서의 신체 유비를 참조했을 가능성이다. 『사회계약론』(1762) 이전에 쓴 『정치경제론』(1755)에서 역시 루소는 정치체를 인간의 신체에 유비하고 있다.

정치체는 개체로서 보자면 인간의 것과 유사하게 유기체적인,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질 수 있다. 주권은 머리를 나타낸다. 법률과 관습은 두뇌이다. 이는 신경의 근원으로, 오성, 의지 및 감각의 중추이다. 판사나 법관은 그 기관이다. 상업, 공업 그리고 농업은 입과 위장으로, 전체의 생존을 준비한다. 공공 재정은 혈액이고, 현명한 경제는 심장의 역할을 하면서 혈액을 운반해 신체 전체에 영양분과 생명력을 공급해준다. 시민은 신체의 손과 발로서, 신체라는 기계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작동하도록 한다.

─Rousseau 1998, 61


물론 루소가 이러한 신체 유비를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으로 생각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에서도 루소는 신체 유비가 많은 점에서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비교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루소는 여기서 정치체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하며, 주권을 머리, 법률과 관습을 두뇌, 상공농업 등의 산업을 입과 위장에 비유한다. 또한 재정을 혈액에, 경제를 심장에 비유하며 혈액을 순환시켜 정치체 전체에 영양분과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마지막으로 인민들은 신체라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손발로 비유되는데 이는 머리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강조된다. 여기에서 루소는 경제와 재정을 심장과 혈액으로 유비하는데, 이는 조민이 의회와 법률로서 유비한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또 다른 곳에서 루소가 심장의 유비를 사용한 곳은 조민이 번역하지 않은 『사회계약론』의 다른 부분, 3부 11장 「정치체의 죽음에 대하여(De la mort du corps politique)」이다. 여기서 루소는 입법권을 국가의 심장으로, 집행권을 두뇌로 유비한다.

정치체의 생명의 본원은 주권(l’authorité souveraine)에 있다. 입법권은 국가의 심장이고 집행권은 온몸을 움직이게 하는 두뇌이다. 두뇌가 마비되어도 그 생명은 존속한다. 그러나 심장이 고동을 정지하면 동물은 곧 죽는다. 국가는 법률에 의하여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입법권(le pouvoir législatif)에 의해 존속하는 것이다. 어제의 법률은 오늘의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Rousseau 1963, 128


루소는 정치체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정치체의 생명의 본원을 주권이라 파악하고 그 핵심인 입법권을 심장에, 집행권을 두뇌에 비유해 설명한다. 루소는 이 신체 유비를 통해 집행권보다 입법권이야말로 주권의 핵심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기존의 중세 서양의 정치담론에서 머리에 왕을 위치시켜 그 권력을 절대시하는 방법으로 신체 은유가 사용되었다면, 루소에게는 입법권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 주권이 전신에 혈액을 보내주는 심장, 혹은 전신에 돌아다니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혈액으로 대체된다. 이는 루소가 기존의 신체 유비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 대목 역시 루소의 유비와 조민의 유비는 약간 다르다. 조민에게서는 집행권과 입법권의 대립 속에서 입법권을 보다 근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의회 개설에 대한 논의가 막 시작된 시점으로, 아직 의회조차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황에서 집행권 보다 입법권을 우위에 두는 발상은 불가능하거나, 긍정하더라도 적어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또 주의해야 할 점은 루소가 ‘법’과 ‘입법권’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국가가 존속하는 것이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입법하는 힘’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어제의 법은 오늘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루소의 말이 보여주듯이 이 입법하는 힘이야말로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는 심장에 해당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루소가 혈액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법은 혈액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입법하는 힘(심장)은 새로운 법(혈액)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조민이 추가한 심복과 기혈의 유비는 루소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을 동일하게 볼 수 있을까. 이를 보기 위해서 루소의 바디폴리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어떤 신체관에서 나온 것인지, 그리고 조민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조민과 루소의 비유에서의 차이와 공통점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루소와 하비의 심장

이치노카와 야스타카(市野川容孝)는 루소와 의학자 비샤(Xavier Bichat, 1771-1802) 그리고 피르호(Rudolf Virchow, 1821~1902)와의 논리적 유사성을 지적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의 단순한 합인 전체의지와 달리 분할불가능한 형태로 결합된 정치적 신체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이는 생명을 죽음에 대항하는 제기관의 ‘집합체’로 정의한 비샤와,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서 생명을 분할불가능한 ‘개체’로 파악한 피르호의 논리와 그 구도가 크게 겹친다는 것이다. 또한 비샤가 ‘유기적 생명’의 중심기관인 심장과 폐를 ‘동물적 생명’의 중심기관인 뇌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파악해, 뇌의 죽음이 아니라 심장의 죽음을 생명의 끝으로 본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뇌의 죽음이 아니라 심장의 죽음을 생명의 끝으로 본다는 점 역시 동일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루소와 비샤의 공통점이라기보다 차라리 루소와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의 공통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비샤나 피르호는 루소와 시대적으로도 차이가 있는 의학자들이며, 심장에 대한 강조는 이미 루소 이전의 의학자인 하비에게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샤는 심장의 중추적 역할에 대해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프랑스혁명으로 왕권이 상실된 후, 그는 심장이 혈관들의 운동을 지배하는 유일한 추진력이라는 사고에 대해 거부한다.

주지하듯이 하비는 혈액의 순환체계를 발견한 인물로 의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의 발견으로 의학사에서 갈레노스 이래 1400년 동안 이어져온 중세적 세계관의 지배가 끝난다. 하비는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헌사와 서문에서 “해부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책이 아니라 실제 해부를 통하는 것이, 철학의 가르침이 아니라 자연의 구조를 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갈레노스의 학설을 비판한다. 기존에 혈액이란 간에서 만들어져 온몸으로 보내져 소진될 뿐, 순환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비는 심장의 수축을 통해 혈액이 닫혀진 고리 안에서 순환함을 밝혀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발견은 17세기 과학의 가장 중요한 대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하비 이전까지 중세 시대를 지배했던 갈레노스의 의견대로라면 정맥류는 신체 각 기관에 영양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동맥류는 신체 각 기관에 생기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소멸되어야 했다. 하지만 하비는 실험을 통해 심장 박동 순간의 혈액 출력량을 수분 동안 합산한 결과 체중의 몇 배가 넘음을 발견했다. 이는 대동맥에서 흘러나온 혈액의 대부분이 다시 심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두뇌 중심의 모델에서 심장 중심의 모델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공기와 비는 하늘의 물체들의 순환운동을 본받는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도 순환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젖은 대지는 태양에 의해 덥혀지면 증발하고, 위로 올라간 증기는 농축되어서 비의 형태로 내려와 다시 땅을 적신다. 이런 순서로 생물은 세대를 전승하며 또 같은 방식으로 폭풍우와 다른 대기현상들도 순환운동 및 태양의 가까워짐과 멀어짐에 따라 생겨난다. 따라서 틀림없이 같은 일이 인체 내에서는 피의 운동을 통해 일어나지 않을까? 인체의 여러 부분들이 더 따뜻하고 완전하며 증기적이고 영적인,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영양분도 지닌 피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보존되며 더욱 활성화된다. 반면에 피는 이런 부분들과 접촉해서 차가와지고 응축된 후, 말하자면 정력이 빠진 후 그 주권(sovereign)인 심장으로, 마치 그 근원을 향해 가는 것처럼 또는 인체의 가장 깊숙한 고향으로 가는 것처럼 돌아가서는 거기에서 그 탁월하고 완전한 상태를 회복한다. … 결과적으로 심장은 생명의 시작이며, 마치 태양을 우주의 심장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심장은 소우주의 태양이다. 왜냐하면 심장이야말로 생명의 기본이며 모든 작용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Harvey 1907, 56-57


​하비는 태양이 대지로부터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이 수증기가 응축되어 비를 내리게 해 지구를 적신다는 발상을 심장의 운동이라는 순환성과 연결시킨다. 하비에게 심장은 가장 처음부터 존재하는 기관으로 뇌나 간이 존재하기 전 혹은 뇌와 간이 그 형태는 갖추었다고 해도 기능을 수행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혈액과 생명, 감각, 운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심장은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생명체처럼 신체가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신체 내의 모든 힘은 이 심장에서 기인하며, 심장은 다른 모든 기관에 앞서 존재하며 다른 기관들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이 된다.

이러한 심장의 중요성과 순환성이 루소의 신체 유비에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하비에게 심장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의회가 아니라 군주라는 점에서 루소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하비가 주장하는 심장의 우위와 순환성이라는 논리는 루소에게 전통적인 바디폴리틱과는 다른 새로운 주권의 이해를 낳았다. 이를 통해 그는 집행권보다 입법권을 우위에 둠으로써 두뇌(집행권)가 마비되어도 생명(정치체)은 존속되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루어낸다. 흔히 자연적 신체에서 머리 혹은 뇌에 특권을 부여하는 태도는 그것이 정치적 신체에 전용되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국왕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루소는 하비의 논의에 따라 심장의 순환성을 바탕으로 해 ‘일반의지’에 주권의 본원 자리를 내줌으로써 이 관계를 뒤집는다. 루소의 논리상 ‘일반의지’의 자리는 머리 내지 뇌수에서 찾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전신에 혈액을 보내주는 심장이, 혹은 전신에 돌아다니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혈액이, 그렇지 않으면 신체 전체에서 구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주권은 어느 한 곳의 위치가 아니라 온몸을 순환하는 일반의지라는 생명의 구성원리 그 자체에서 구해져야 했다.

그리고 이 신체의 죽음은 군주인 머리의 죽음이 아니라 일반의지인 심장의 죽음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조민에게서 역시 심복과 기혈을 의회와 법률로 비유한 것은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조민에게서 명시적으로 심장과 머리의 관계에 대한 설명하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루소에게 핵심이 심장을 머리보다 우위에 두고 이를 죽음과 관련해 사유한 것이라면, 조민의 유비는 이러한 논리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이를 단순히 옮긴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민이 머리와 심장의 관계가 아니라 심복과 기혈만을 이야기한 것은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의회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공통적이지만 루소가 입법권을 심장에 비유한 것이 근본적인 법을 만드는 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면 조민은 입법권과 법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의회 개설이 급선무였던 조민이 루소의 논의를 갖고 오지만, 일반의지를 구성하는 의회의 중요성에 대한 루소의 논리적 전환까지는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심장(heart)과 심복(心腹)의 논리

그렇다면 왜 이러한 차이가 보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신체관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서양에서의 ‘심장(heart)’과 ‘혈액(blood)’의 관계는 동양에서의 ‘심복’과 ‘기혈’의 관계와 다르다. 동양에서 심복이라는 단어는 병의 증상을 말할 때 ‘심복이 팽창한다’는 예로 쓰이는 것처럼 복부를 의미하는 것이지 심장이라는 기관 자체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동양 의학에서 심(心)이 혈맥을 주관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심장(heart)이 피를 순환시키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심이 혈맥을 주관한다(心主血脈)’고 할 때의 의미는 음식을 통해서 얻은 정미로운 기운이 비(脾)에 들어가 혈을 만들고 심(心)의 통솔을 받아 간(肝)에서 저장되고 폐(肺)에서 퍼지며, 신(腎)에서 빠져나가 온몸을 축여준다는 논리로, 혈액을 산출하는 심장이라는 발상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굳이 따지자면 혈액을 만드는 기관으로는 비가, 혈액을 온몸으로 전달하는 기관은 폐가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순환에는 결코 심장 같은 중심이나 시작점이 없다. 물론 기혈은 기와 혈이 짝이 되어 온몸을 순환하는 사고를 나타내는 단어다. 이를 통해 조민은 루소와 하비가 의미하는 순환하는 신체성을 나타내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혈액을 생산하고, 순환시키는 기관으로서 심장이라는 인식은 동양적 사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입법하는 힘을 나타내는 루소의 심장(heart)과 조민의 심복(心腹)은 다르다. 또한 하비 혹은 루소식의 사유와 같이 심장/심복이 머리를 대신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몸에서 단독으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혈액을 생산하고, 순환시키는 기관으로서 심장이라는 인식은 동양적 사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민이 의회의 중요성과 법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군주보다 더 근원적 자리에 의회를,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반의지를 구성하는 인민들을 놓는 루소식의 발상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당시 아직 민선의회가 설립되기 전 상황에서 군주보다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민에게는 이러한 사유가 없었던 것일까? 다시 한 번 조민의 논의 속에서 신체 유비를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 이 글은 『정치사상연구』 23집 1호(2017)에 실린 글입니다. 자세한 주석이나 참고문헌은 그 글을 참고해주세요.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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