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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 - 신체라는 결핍과 의지의 장

by 북드라망 2018. 2. 21.

『스페이스 오디세이』 - 신체라는 결핍과 의지의 장



1. 

꿀같은 잠이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눈을 떠,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 빛을 바라보며 만족스레 중얼거렸다. 역시 나는 겨울체질이다. 하룻밤에도 대여섯 번 씩 잠을 깨는 고질적인 증상이 겨울이면 거짓말같이 사라진다. 밤뿐이랴. 이른 아침 든든히 챙겨입고 나가, 영하 15도의 한파 속에 깊이 숨을 들이마셔 얼음 같은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울 때, 내 영혼은 고양감에 날아오를 것만 같아지는 것이다. 이 춥고 쾌적한 감각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온통 겨울뿐인 나라에 가면, 어쩌면 나는 더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2.

찬 공기를 뚫고 걸어 동네 스타벅스를 찾았다. 집중해서 작업할 일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점원에게 웅얼웅얼 커피를 주문하고, 좋아하는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는다. 커피를 테이블에 올리고, 둔탁한 패딩을 벗어 의자등받이에 걸친다. 실내기온은 딱 적당하다. 덥지고 않고, 춥지도 않고. 쾌적한 공간이다. 불특정다수의 웅성임과 인기척 뒤로 거슬리지 않는 배경음악이 얇게 흐른다. 일을 하거나 책을 읽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까. “집이 더 조용하지 않아?” 누군가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집은 너무 조용하고 또 너무 외로워. 나한테는 딱 이 정도의 사람 느낌이 필요해.   

 

3. 

일을 시작한다. 마감이 코앞인데 뭐 잘 풀리지가 않는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펜 끝을 잘근잘근 씹는다. 얼마나 그러고 앉아 있었을까. 강박행동이 나타난 걸 깨닫고 문득 동작을 멈춘다.  

‘당이 필요해.’ 

판정을 내린다. 뇌 회전이 곽 막힌 기분이 들 때, 단 음식을 먹는 건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나는 일어나서 화이트초콜릿 마카다미아넛 쿠키를 사온다. 포장을 벗기자 버터와 설탕의 냄새가 코 끝에 훅 끼친다. 노릇노릇한 표면의 질감, 드문드문 박힌 마카다미아넛과 화이트초콜릿의 탐스러운 양감을 눈으로 더듬는다. 혀 밑에 침이 고인다. 입안이 촉촉해진다.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크게 한 입 베어문다. 잇새에 끊긴 쿠키가 혀 위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진다. 두피의 모근이 쭈빗 일어선다. 아, 너무, 너무너무 달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끔찍하고 또 만족스럽다. 나의 뇌에 딱 필요했던 처방이다.  


4.

다 먹었다. 쿠키 부스러기를 조심스럽게 털어내고, 노트를 도로 펼친다. 아까 끄트머리를 깨물어댔던 펜을 다시 집어든다. P사에서 만든 S펜이다. 10년째 꾸준히 사서 쓰는 제품이다. 손 글씨를 써야할 땐 이 제품만 고집한다. S펜은 내 손에 무난히 감기는 그립감도 좋지만, 펜촉이 매우 가늘어서 글씨를 작게 쓸 수 있다. 글씨를 작게 쓸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집개미 사이즈로 꼬물꼬물 기어가는 글씨는 큼직하게 쓴 것마냥 못생김이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슬리게 종이를 긁지 않으면서도 너무 매끄럽게 미끄러지지 않을 정도의 저항감이 있는 것도 중요하다. 손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어 나의 악필이 더 심한 날림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게끔 잡아주기 때문이다. 글씨를 쉽고 빠르게 쓰는 게 목적이라면 종이 위에서 스케이트처럼 미끄러지는 젤펜 또는 촉이 부드러운 펠트펜이 맞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 그런 펜들은, 글씨가 흉하고 알아보기 힘들게 남아 결국 ‘글씨 씀’이라는 행위의 목적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S펜에 대한 나의 선호는 글씨를 못 쓰는 나의 무능력- 서툰 손과 머리의 조야한 협응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겨울에만 단잠을 잘 수 있는 체질. 찬 공기를 호흡할 때의 고양감.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강박행동. 쿠키를 먹고 컨디션을 쇄신하는 것. 특정한 펜을 골라 쓰고, 스타벅스를 찾아 해드는 창가자리를 골라 앉는 것까지. 오늘 아침 이 일들은 모두 내 신체에서 일어났다. 신체에서 출발하여 신체를 경유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이 시간 바깥으로 외연을 넓혀, 내 인생의 수많은 선택, 취향, 욕망들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을까. 불안은 노르아드레날린의 분출, 기쁨은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조화. 내 정서의 바탕에는 무형의 신비로운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하나 분자식까지 명확히 규명된 호르몬이 흐른다. 신체 유지의 행동들을 유도하거나, 욕구 충족의 보상으로서 분비되는 화학물질 말이다. 이러한 기작이 없이, 먹고 자고 연애하고 번식하며 이 생을 존속하려는 나의 의지는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수고로이 유지해야 할 불완전한 육신이 없다면, 지적 존재로서의 나는 어떤 동기로 그 생을 지속하려나. 이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읽는 내내 내 머리를 어지럽힌 의문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기념비적인 SF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크게 네 덩어리의 이야기로 엮여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직 인류가 무리 짐승에 지나지 않던 시절, 미지의 외계문명의 도움을 받아 희미한 지성을 탑재하고 문명을 향해 첫발짝 내딛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번째 이야기부터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21세기로 와서, 인류가 달의 뒷면에서 외계지성체가 남긴 300 만 년 전 인공구조물을 발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로부터 2년 후, 우주 탐험선이 토성을 향해 항해하던 중 인공지능이 착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인간 승무원들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 보먼이 외계생명체와 만나 전혀 다른 생을 맞이하는 경이로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난해한 것으로 악명 높은 동명의 영화와 달리, 텍스트의 설명력을 한껏 활용한 이 작품은 그렇게까지 힘겹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우주기술과 천체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한 철저히 과학적인 고증과, 외계문명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오히려 독서의 즐거움이 각별하다. 중심인물 한 명, 중심스토리 하나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특유의 스타일이 여기서도 약간의 산만함을 안겨주는 가운데, 아서 C 클라크는 크게 세 종류의 지적 존재를 등장시킨다. 


첫째는 우리 인류다. 신체와 정신 모두를 가진 종족이다. 원시적인 원숭이인간에서 출발하여 부단히 발전해온 인류는 소설의 시점 기준 이제 막 지구 바깥의 세계를 향해 서툰 첫발을 내디딘 참이다. 

둘째는 인류가 발명한 인공지능, HAL이다. HAL에게는 신체가 없지만, 인공지능에 기반한 정신이 있다. HAL은 태양계를 가로지르는 우주선 디스커버리 호에 탑재되어 선체관리와 우주탐사의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소설 속에서는 두 프로그램의 목적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일종의 정신이상증세를 일으키게 된다.  


보먼은 HAL이 프로그램 충돌로 생겨난 무의식적인 죄책감 때문에 지구와의 연결 회로를 끊으려 했다는 시몬슨 박사의 이론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HAL이 의도적으로 풀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 HAL은 단순히 증거를 없애려 했을 뿐이다. 자기가 타 버렸다고 보고한 AE35 유닛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날 테니까. 그리고 그가 그 다음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거짓말이 쌓이고 쌓여 주체할 수 없게 된 서투른 범죄자처럼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보먼은 공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 269쪽 


보먼이 공포를 아주 잘 이해하는 것은 그에게 익사할 뻔 했던 경험, 그리고 비행도중 산소 게이지가 바닥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나온다. 둘 다 폐라는 신체 부위에 직접적인 고통이 가해지는 경험이었다. 아마 당시 보먼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새 교감신경이 흥분되고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인간의 공포였다. 보먼은 무슨 근거로 자기가 HAL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둘 다 ‘존재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불안반응으로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신경물질도 분비되지 않는 철저히 비(非) 신체적인 존재의 프로그램 충돌 효과가, 어떻게 육신을 가진 자의 공포와 동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공포, 두려움, 기쁨과 자랑스러움 등 천양각색의 인간적 심리상태는 모두 신체를 기반으로 한다. 당 충전의 충동은 두뇌활동에 즉각 연료를 공급할 필요로부터 온다. 쿠키의 모양과 냄새를 앞에 두고 입에 침이 괼 때, ‘먹고 싶다’는 욕망 내지 ‘먹겠다’는 의지는 아밀라아제의 분비, 위장관의 꿈틀거림 같은 신체작용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S펜에 대한 취향을 성립시킨 건 내 손과 뇌의 어딘가 나사 빠진 협응력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대한 내 선호는 아마도 항온동물로서의 신체 시스템에 남들과 다른 미묘한 오차가 있어서 생겨났을 것이다. 내 유전자에 각인된 무리동물로서의 본성은, 적당히 북적이는 카페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만든다(아마도 세로토닌이 분비되겠지).  


HAL을 만든 사람들이 자기 창조물의 심리상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인류와 완전히 다른 존재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 268쪽


하지만 이는 얼마나 당연한 얘기인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인류는 그 어떤 지성적인 인공지능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 나는 소가 되새김질할 때 신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그때 위장과 목구멍에 어떤 감각이 드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박쥐와 돌고래가 초음파로 소통하는 감각에 공감할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잘린 신체가 새로 돋아날 때, 조그맣고 귀여운 불가사리가 어떤 느낌으로 그 부위를 자각할지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육신을 가진 존재에 대해서도 이러할진대, 육신이 아예 없는 존재의 정신작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배고프지도 않고, 당 충전의 충동을 느껴볼 일 없고,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고자 하는 본능이 어떤 느낌으로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내 손과 내 습관에 어떤 펜이 어떻게 좋다는 탐색과 판단도 불필요하고, 아픔을 회피하거나 사랑을 간구할 필요도 없는 존재에게- 삶은 어떻게 추동될 수 있단 말인가. HAL을 이토록 이질적인 존재로 만들어놓고 공감의 불가능성을 고민하느니, HAL에게 생물학적 호르몬의 전자기적 유사 시스템을 장착시켜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쁨의 보상 기작, 슬픔의 보상 기작, 공포의 보상 기작을. 




하지만 아서 C. 클라크는 ‘이질적 지성체’와의 소통에 관한 내 깊은 절망감을 좀 더 가중시킨다. 바로 세 번째 지적존재, 인류를 문명화의 길로 이끌어주고, 달과 목성에 인공구조물을 남겨두고 떠나갔던 미지의 외계지성체를 등장시킨 것이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시간동안 고도의 기술발전을 거듭한 끝에 아예 신체를 떠나 순수 에너지의 복사체로서 존재하게 된 종족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우주의 구조 그 자체 속에 지식을 저장하고, 얼어붙은 빛의 격자 속에 자신들의 생각을 영원히 보관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복사선으로 존재하는 생물이 되었다. 마침내 물질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곧 스스로를 순수한 에너지로 변화시켰다. 그들이 버리고 간 텅 빈 껍데기들은 수천 개의 별들에서 한동안 멍하니 움찔거리며 죽음의 춤을 추다가 녹슬어 부스러졌다. 

- 296쪽


그야말로 끝판왕이다. 육신도 없고, 뇌도 없고, 오로지 정신만이 남겨진 에너지의 복사선이라니! 이 선구적인 지성체를 상상하면서, 나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할 모든 의욕을 잃었다. 갯벌에 발랑 나자빠져서 무력하게 사람을 올려다보는 불가사리나 바지락조개가 된 기분이었다. 내 신체의 한계와 가능성, 거기서 빚어지는 디테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순수한 정신체와 더불어 도대체 무슨 교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외계지성체의 ‘열반의 경지’가 조금도 부럽지 않다. 살아가고 싶다는 나의 생 의지는 내 고귀한 정신활동이 아니라 내 불완전한 육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방점은 ‘불완전한’에 찍힌다. 사회적인 무리본능을 타고 난 유성생식 동물로서, 나는 동료 인간의 따스한 포옹, 달콤하고 부드럽게 달래주는 말, 내 연약한 육체를 보듬어 보호해주는 손길을 갈구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신체적 감각 속에 비로소 영혼의 고양감을 만끽한다. 내 생명유지 시스템이 독자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수많은 결핍들이, 나를 먹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궁금해 하게 하고, 답을 찾게 만든다. 또, 비슷한 신체 시스템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이 우리를 서로 보완하게 만들고, 생각을 다르게 만들고, 그로 인해 반목하거나 갈등하거나 사랑하면서 발전해나가게 만든다. 결핍과 차이가 벌어지는 신체라는 장이 사라지면, 도대체 생은 무슨 동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까 산 커피는 다 마신지 오래다. 텀블러를 탁탁 털어 마지막 한 방울을 혀 끝으로 핥아내고, 나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체 없는 삶을 상상하니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기분이 이 모양일 땐 떡볶이가 제격이다. 쫄깃한 떡을 씹는 저작행동의 후련함, 캡사이신이 불러일으키는 후끈한 통각의 쾌감, 이른바 단짠의 조화 속 작열하는 나트륨와 당의 향연이 내 슬픔을 잠재우고 활기를 보충해줄 것이다. 보라, 나는 이토록 신체적인 존재다. 떡볶이에조차 끌리지 않는 복사체 혼령으로는 그 어떤 세상도 살아가고 싶지 않아.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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