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레키, 『사소한 정의』
- 착각은 자유지만 실례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 머리를 잘랐다. 생일기념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몸과 마음을 쇄신하겠다는 일종의 의식, 쉽게 말하면 그냥 셀프 생일선물이었다. ‘우주여 나의 머리카락을 바칠테니 새로운 운명과 샘솟는 에너지를 주세요!’ 라는 심정이었달까.
헤어스타일 상담을 하며 디자이너가 말했다.
“ 숏컷도 잘 어울리시겠는데요.”
“ 으허헝 설마요.”
“ 진짜요. 아무한테나 안 권하는데.”
나는 기대와 불신이 동시에 차오르는 눈빛을 숨기기 위해 스타일북을 들여다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숏컷과 관련해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이, 선명히 기억하는 것만도 세 건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 각각 한 번씩 숏컷을 했었고, 이후 다시는 그 헤어스타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숏컷이라니, 숏컷이라니! 매혹과 공포가 한꺼번에 치달아왔다. 그것은 내게 시방 위험한 짐승이었다. 내 영혼에 잇자국을 남기며 와그작와그작 씹어댈 잔학한 그 무엇.
평생 처음 숏컷을 했을 무렵의 어느 날, 어머니가 다니시던 에어로빅 학원의 탈의실에 따라 들어갔을 때 아주머니들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얘, 너는 다 큰 애가 여자들 옷 갈아입는 데 막 들어오면 어떡해?”
두 번째 기억. 스케이트링크에서 고학년 언니들이 내 쪽을 곁눈질하며 수근대다가 멋지게 미끄러져 와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 저기 너, 남자니 여자니?”
세 번째 기억. 부모님을 따라 백화점에 갔는데, 아동복 매장의 젊은 남자직원이 나를 보며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너는 남자애가 왜 머리에 삔을 꽂고 다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착각을 한다. 볼펜을 싸인펜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싸인펜을 네임펜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을 경기도 양평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고현정을 고소영의 친언니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우리 이모가 우리 엄마인 줄 착각하기도 한다. 운 나쁜 경우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재벌들 ‘삥 뜯는’ 권한을 가지며, 국정원이 그런 대통령의 사설흥신소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종다양하게 허를 찌르는 평범하고 기발하고 악의 없는 착각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리고 (저 정치적으로 심각했던 비극적인 착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착각은 그냥 짧은 해프닝으로 지나간다. 피차 실수라는 걸 모를 수 없는 작은 일에 대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앙심을 품고 기억하는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누군가의 성별을 착각했음을 당사자에게 들켰다면, 모쪼록 빠른 시간 안에 그 참사를 수습하길 바란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당신이 내심으로는 얼마나 미안해하든 무안해하든 또는 무신경하게 넘겨버리든 상관없이, 당신을 향한 원망과 저주는 이십년, 삼십년, 사십년, 또는 오십년도 더 지나 결국에는 구천으로까지 떠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 내 혀 끝에, 에어로빅 학원의 탈의실 여자들과 스케이트장의 되바라진 상급생들과 백화점의 눈치 말아드신 청년이 시지푸스의 애잔한 바윗덩이처럼 마르고 닳도록 소환되고 있듯이.
성별을 오인당하는 것은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의 저 사건들은 깊은 모욕감과 더불어 조각칼로 후벼판 듯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혼란스러운 뒷맛과 함께. 나를 정말로 괴롭힌 건, 왜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여자로 규정되는 게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모든 남자는 여자보다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여자라는 규정이 특별히 좋았던 적은 없고, 못생김은 성별로 평균을 내 견줄 문제가 아니었다(여자인 내가 남자인 원빈보다 일흔 아홉 배쯤 더 못생겼다.) 그리고 내 경우와 반대로 여자로 오인 당하고서 발끈한 남자아이들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성을 싫어하거나, 자기 성이 낫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혐의와 결부되기엔 억울한 감이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나의 불쾌감은 혹시 부당한 건 아니었을까?
앤 레키는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경이로운 데뷔작 『사소한 정의』를 읽는 동안, 나는 이 작가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성별 오인의 불쾌감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이 다른 행성 사람들의 성별을 제대로 구분해내려 애쓰며 느끼는 스트레스가 종종 언급된다. 중요도에 비해 너무 자주 나온다 싶을 정도다.
주인의 성별을 언급하지 않고 말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니면 성별을 넘겨짚거나. 최악의 경우라 해봐야 확률은 반반이다.
나는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을 알았으므로 그녀가 여성이고 손자를 둔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두 가지는 문법 면에서나 예절 면에서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꼭 숙지하고 있어야 할 사항이었다.
『사소한 정의』는 거대한 은하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비극적인 사고로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졸지에 인간의 몸에 깃들어 살게 된 인공지능 함선(!)이 20년 동안 숨어서 칼을 갈다가 마침내 은하제국의 황제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하면 뭔가 유치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총체적으로 난감한 3류 콘텐츠같이 들리지만, 아니다. 지극히 정교하게 짜여진 얼개, 흠잡을 데 없이 치밀한 개연성, 생생한 개성을 띠고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힘으로 독자를 훅 빨아들이는 이 작품은 대담한 스케일의 에드벤처 활극이면서, 모략과 반격이 난무하는 영리한 정치 무협극이면서, 애틋하고 가슴 저리는 서정적인 로맨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사소한 정의』는, 전례 없이 강력한 페미니즘 시공간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일언반구도 언급되지 않지만, 그건 여타 소설에서 ‘물의 분자식은 H2O’라는 말을 구태여 늘어놓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소한 정의』의 우주에는 페미니즘이 마치 물리법칙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인물들의 성별 정보조차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독자가 기존의 성별 편견을 작품 안으로까지 끌고 들어올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작가와 작중인물 모두의 공조로 이루어지는 이 성별 은폐 작업은 기실 피해의식이나 수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불필요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이네 남성이네 하는 사실이 이 우주에서는 별 소용이 되는 정보가 아니다. 구태여 성별을 밝히는 건 마치 ‘제가 머리 가름마가 두 개에요’라던가, ‘저 사람이 좋아하는 벌레는 선캄브리아기의 남미에서 처음 생겨났대요’ 하는 식의 TMI(Too Much Information) 전달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못 들은 척 하거나, 대놓고 면박을 주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속으로 투덜대기 마련이다. ‘뭐 어쩌라고?’
사실 이분법적 성별 고정관념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21세기 지구 사회의 일원으로서, 독자가 소설 속 은하계의 저 성 중립적 태도를 체화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쟤는 남자니까 단호하겠지.’ ‘쟤는 여자니까 좀 더 상냥할 거야.’ ‘밥 짓다가 나온 걸 보니 여자겠구나.’ 성별 정보를 입수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거의 본능적인 탐색에 가깝다. 그리고 모종의 판단이 형성되는 순간 성별 고정관념은 전광석화처럼 개입하여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를 만들어버린다.
『사소한 정의』가 가장 짜릿하게 빛나는 지점이 여기에 있었다. 앤 레키는 성별을 바탕으로 이미지를 형성하는 관습적인 독서 패턴을 그 어떤 정서적인 호소도 없이 기술적으로 차단해버린다. 아주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칭대명사를 전부 여성형으로 통일시켜 버린 것이다. she, her, hers. 모든 사람을 ‘그녀’로 지칭하는 이 간단한 비틀기가 사고의 전개에 일으키는 이물감은 상상 이상이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이 다 여성뿐인가 했다가, ‘그녀’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이르면 ‘레즈비언 SF’인가 했다가, ‘그녀’라고 지칭된 인물의 생물학적 성별이 명확히 ‘남성’으로 설명되는 대목을 몇 번 맞닥뜨리고 나서야, 아...하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사람’이라고 하면 무심코 남성을 상정하던 관성을 벗어나, 그냥 중립적인 ‘사람’, 혹은 오히려 살짝 여성으로 기울어진 이미지로써 대상을 수용하는 감각, 관점, 사고방식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시뮬레이션 해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남성이나 여성으로 특정하지 않으면서 등장인물들을 판단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은 신선하고도 즐거운 경험이다.
이 소설을 좋아할 이유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내게 각별했던 이유를 대자면 역시 다시 숏컷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인물들의 활약과 매력에 있어 각자의 성별은 전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내용 속에, 문체에, 심지어 문법에까지, 끈질기게 녹여내고 설득해내는 와중에도 작가가 성별이 각자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또한 놓지 않는다는 점이 나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이 딱히 우월하다는 관념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성별을 준거로 하는 차별이 전혀 작동하지 않지만, 성별을 오인하는 것은 명백히 실례가 되는 일이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할 때 어김없이 불쾌해 한다!
스트리건의 모국어는 성별 구별을 요구했다. 그러면서도 스트리건이 속했던 사회는 동시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곤 했다. 남성과 여성은 별다른 구별 없이 옷을 입고 말을 하고 행동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은 누구도 상대방의 성별을 파악하는 데 망설이거나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망설이거나 잘못 추측할 때면 그들은 예외 없이 불쾌해 했다. 나는 그 묘기를 익히지 못했다.
성평등과 여성/남성/다른성으로서의 자긍심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음을 텍스트로 체험하면서, 어쩌면 다음 번 미용실 방문 때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숏컷을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누군가는 착각을 일으켜 ‘너 남자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지금은 옛날처럼 상처받지도 않을 테지만, 마음껏 드러내놓고 불쾌해 하기는 할 참이다. 그 불쾌감이 정당한지 또는 모순은 아닌지에 관한, 내 오랜 혼란은 종식되었다. 그 감정은 여혐이나 남혐이 아니다. 앤 레키의 그 거대한 페미니즘 우주에서조차, 성별 오인은 그냥 무조건 실례되는 일이지 않던가.
그러니까, 착각은 자유지만, 실례는 아니라고요.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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