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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서당개 <논어> 읽기 - 단단해질지어다

by 북드라망 2017. 10. 11.

단단해질지어다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널리 글을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논어(論語)》옹야(雍也)편 25장

※ 한문의 초식 : 한자(漢字) 풀이※


※ 구절에 관한 주석들 ※

***


요즘 인기 있는 유형 중 하나가 ‘뇌가 섹시한 사람’, 이른바 ‘뇌섹남’이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선두로 잡다한 지식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이 꽤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의 뇌를 심하게 자극하는 '깊이' 있는 지식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떤 소재를 가지고도 한두시간 '떠들'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원할 뿐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교양인’이 되고픈 욕망이 컸다. 잡다한 것을 알아두면 자연스레 사람들과 친해지고, 어떤 화제를 가지고도 사람들과 두루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잡식(雜識)을 섭취했다. 그러나 결과는? 잡다한 지식은 관계의 깊이와 다양성을 확보해주는 실천적 앎이 되지 못했고, 대화의 끝은 공허했다. 잡다한 걸 알고 있으면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아는 것처럼’ 보이고 인정받고 싶었던 내 욕망에 불과했던 것 같다. 공허한 지식과 얄팍한 인간관계. 이런 내게 공자의 박학(博學)과 약례(約禮)는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관계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공자도 ‘박학’을 말한다. 하지만 공자가 말하는 ‘박학’은 “알아두면 쓸데없는 잡학”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기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앎이다. 그러니까 ‘박학’이란 나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나의 인생을 통찰하도록 하는 배움인 것이다. 때문에 공자는 ‘박학’에 그치지 않고 약례(約禮)를 말한다. 도대체 ‘박학’과 ‘예’는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전에 나는 ‘예’라는 말을 들으면 ‘꼰대의 철학’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가끔씩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다짜고짜 ‘요즘 것들은…’, ‘나이도 어린 것들이…’, ‘우리 때는…’이라며 예의를 강요한다. 그럴 때마다 ‘예’란 고리타분한 것이고 억압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논어(論語)를 읽다보니 ‘예’는 그런 고리타분한 형식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예’는 관계성의 실천이다. 주희는 ‘예’를 ‘절문(節文)’으로 해석한다. 즉, ‘예’란 구체적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행위할 수 있는 실천적 능력이다.


공자가 말했다. “삼베로 짠 모자를 쓰는 것이 예이지만, 오늘날에는 명주실로 짠 모자를 쓴다. 후자가 검소하므로 나는 대중을 따르겠다. 대청 아래서 인사하는 것이 예이지만, 오늘날에는 대청 위에서 인사한다. 후자는 교만한 행위이므로 대중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대청 아래에서 인사하겠다.”(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 《논어(論語)》 〈자한(子旱)〉편 3장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는 모든 인간이 일정하게 따라야 하는 외적규범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통을 따르고,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풍속을 따르는 것이 ‘예’다. 그러니까 ‘예’는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행하는 자의 능동적 판단에 따른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예(禮)와 비례(非禮)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나, 행하는 자의 내적 진실성, 믿음, 성실성이다.


그동안 나는 배움과 실천을 분리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공자에 따르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지 않는 배움은 허영에 불과하고, 끊임없는 배움이 따르지 않는 실천이란 독단일 뿐이다. 배움은 실천을 통해 연마되고, 실천은 배움에 의해 유연해진다. 요컨대, 박학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기세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고, 배운 바를 실천으로 단속함으로써 매번 새로워질 수 있다. 이처럼 ‘박학’과 ‘예’는 상호규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기쁨을 나누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뿐 그 관계를 통찰할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배움이 결여된 관계 맺기였던 것이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같은 관계와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또 배움에 관한 다른 관점 하나를 갖게 되었다. 배움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자기변형을 가능케 하는 실천이라는 것.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아무리 힘든 문제를 겪는다 해도 배움을 통해 나는 계속 새로워지고 단단해질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이 공부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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