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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서당개 삼백년_공부의 초식

by 북드라망 2017. 9. 27.

고전비평공간 규문(링크)에서 활동하는 규창님의 새연재 '서당개 삼백년'을 시작합니다. 이 연재는 그야말로 '성실'로 점철된 것으로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문 원문에 한자풀이까지 실려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수 있지' 싶습니다만, 해당 구절에 대한 주석까지 찾아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당개의 공부'라고 주장하는 듯 합니다. ^^ 몹시 유익한 연재가 될 듯 하니 관심있게 지켜봐 주셔요!



공부의 초식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_『論語』 「子罕」, 18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산을 쌓는 것과 같아서, 한 삼태기를 못 채우고 멈추는 것도 내가 멈추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땅을 평평하게 하는 것과 같아서(다른 해석 : 비유하자면 산을 쌓기 위해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붓는 것과 같아서), 한 삼태기를 부어서 나아가는 것도 내가 가는 것이다.”


※ 한문의 초식 : 한자(漢字) 풀이※


※ 구절에 관한 주석들 ※

무협지를 좋아하시는지? 주인공들이 자신의 한 맺힌 사연을 해결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느끼는 쾌감과 감동 때문에 난 무협지를 즐겨 읽는다. 뻔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연을 풀기 위해 고수가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몇 년 동안 무거운 철통에 물을 길어야 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기본적인 자세가 몸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때까지 같은 동작을 무한반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고수가 되기 위한 ‘비법(秘法)’ 같은 건 따로 없다. 모든 고수도 다른 하수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반복하는 것 외에는. 공부의 도(道)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


규문에 온 지 1년 정도 됐다. 처음에는 글이나 말이 엉터리여도 열심히 하다보면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공부가 생각처럼 늘지 않았다. 글은 비문과 비약 투성이고 말도 마구 꼬이면서 전달이 잘 안 되기가 부지기수였다. 이럴 때마다 공부에 재능이 없는 게 아닌지, 그만두고 다른 걸 하는 게 더 나은 게 아닌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공부를 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잘 하는 ‘비법’ 같은 걸 원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건 기본기를 쌓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내 게으름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위산구인, 공휴일궤(爲山九仞, 功虧一簣). ‘아무리 산을 높게 쌓아도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붓지 않아 허물어진다’는 뜻이다. 공부도 이전에 쌓은 것과 관계없이, 중단하는 순간 허사가 되고 만다. 딱 한 번 과정을 생략했을 뿐인데 이전에 쌓은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진다니,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 하지만 무너지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쌓아올린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축적이 아니다. 마일리지가 쌓이듯 통장 잔고가 따박따박 쌓이듯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통해 얻게 될 ’최종잔액‘만 생각하다 보면 공부를 즐길 수 없다. 공부의 즐거움은 조금씩 내 힘으로 알아가는 공부의 과정 그 자체에 있다. 고수들이 고수인 것은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숨 쉴 때나 잘 때나 매순간 단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고수는 자신을 닦고 연마하는 과정 속에서 고수로 되.어.가.는 것이다.


유학에서는 모든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기지학’이란 자기를 위해 학문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공부를 통해 인정이나 대가를 바라는 것을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말한다. ‘위인지학’을 하는 자는 공부를 하는 이유나 그치는 이유를 외부에서 찾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위인지학’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공부를 하면서 몇 번이나 그만두려 했었던 것도 원인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공부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신기하게도 나는 동시에,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며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러나 솔직해지자. 내가 공부를 하면서 만족하지 못한 것은 열심히 하는 나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내가 공부하는 과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공자님 말씀대로, 나아가는 것과 그치는 것 모두 나에게 달린 일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오래할 수 있는 비결은 다른 게 없다. 당연하지만, 지금의 공부를 즐기는 마음이 전부다. 산을 쌓기 위해 먼저 땅을 다지는 것이나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산을 더 높게 만드는 것이나 사실은 똑같이 한 삼태기의 흙을 붓는 과정인 것이다. 진정한 고수의 기예(技藝)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독특한 무공이 아니다.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초식을 끝없이 갈고 닦은 결과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무공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의 초식이란 무엇인가. 자기만의 글쓰기와 말하기에 이르기 위해 텍스트를 한 페이지씩 곱씹는 것이다.


이전에 나는 초식을 연마하는 지난한 과정을 견디기보다는 하루 빨리 독특한 해석을 담아낸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진짜 내 공부로 시선을 돌리자.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공부의 초식은 비문을 고치고 비약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전부다. 구덩이를 메우는 흙이 어느 새 큰 산을 이루듯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를 하는 것이 내공을 쌓는 과정이리라. 지금 나의 ‘한 삼태기 흙’은 무엇인가? 책을 더 꼼꼼히 정독하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최대한 글을 명료하게 쓰는 과정이야말로 바로 나의 ‘한 삼태기 흙’이다.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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