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동무' 되기의 어려움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踈矣
자유왈 사군삭 사욕의 붕우삭 사소의
자유가 말했다.
“임금을 섬기는데 번거로울 정도로 간언하면 모욕을 당하게 된다. 벗과 사귀는데 번거로울 정도로 충고하면 관계가 소원해지게 된다.”
- 「이인(里仁)」편 26장
=글자풀이=
=관련주석=
난 막역지우(莫逆之友)에 대한 로망이 있다. 서로의 허물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고 받아들이는 사이. 하지만 그런 관계를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난 사소한 지적을 자주하는 편이다. 나름 상대방을 위한 쓴소리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었는데, 되려 잔소리라는 핀잔을 들었다. 처음에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방이 미웠지만, 생각해보면 내 잔소리를 듣는 상대방을 고려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얘기하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고, 자주 얘기하자니 서로 마음이 상한다. 아, ‘막역지우’란 그저 꿈일 뿐인가.
인간관계는 크게 두 부류다. 하나는 피로 맺어진 가족관계요, 다른 하나는 자라면서 맺는 사회관계다. 가족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나도 떠나선 안 된다. 하지만 사회관계, 예를 들면 군주와 신하,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의 관계는 다르다. 이 관계는 피가 아닌 의(義)로 맺어졌기 때문에 의가 어그러지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군주와 신하는 서로의 이상향이 일치할 때 만난다. 신하가 목숨 바쳐 군주를 섬기는 것도 그 뜻이 일치할 때다. 하지만 만약 군주가 어느 순간 자신과 다른 뜻을 가지게 되면 폭군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를 떠나야 한다. 이미 의가 어긋났는데도 떠나지 않는 것은 군주 옆에 있음으로써 얻게 되는 부귀영화에 대한 탐심 때문이다. 그 욕망 때문에 떠나지 않고 군주 옆에 있으면 군주와 계속 부딪히게 되고, 결국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붕우의 경우는 어떠한가. 붕우는 대등한 위치의 만남, 수평적인 관계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얘기하는 붕우는 지금처럼 sns로 맺고 끊는 사이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다. 붕우에 ‘동문수학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듯이, 붕우란 자신과 뜻을 나누고 함께 하는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그토록 다양한 출신과 신분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공통적으로 배움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움이라는 ‘의’를 함께 하는 도반(道伴)이었던 것이다. 도반끼리 주고받는 쓴소리는 서로의 배움을 추동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친구 사이라 해도 쓴소리가 여러 번 반복되면 그 의미가 가벼워지고 듣는 이도 싫증이 난다. 그러니 쓴소리는 굳이 여러 번 할 필요가 없다. 만약 나의 말이 충분히 전해졌다면 그는 서서히 변할 것이고, 반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면 배우길 그쳤을 뿐이니 더 이상 마음을 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구의 행위가 못마땅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관계를 고수하려는 의지가 간절하기 때문에 관계를 끊어내기가 어렵다.
붕우란 ‘의(義)로 합(合)한’ 관계라는 주희의 주석을 다시 생각해보자. ‘의’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견지하는 원칙, 가치관, 비전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의 형성은 ‘의’로 이루어진다.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지적하는 건 잔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의’가 흔들리는 순간 마음을 내서 쓴소리를 하는 건 ‘의’를 굳건하게 해주는 일이다. 가령, 공부를 하다 보면 마음이 들떠서 집중이 안 될 때가 있다.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차서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쓴소리 덕분이었다. ‘의’를 나눈 도반들의 쓴소리는 흔들리는 내 마음을 지탱해준 관심이고 응원이었다.
막역지우(莫逆之友)란 뭘까? ‘허물을 기탄없이 얘기하는 사이’를 나는 모든 불편한 점을 다 얘기하고 상대의 뜻대로 따라주는 ‘나의 동일자’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붕우가 ‘길동무(도반)’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나와 모든 것이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공부의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벗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것을 다 고치라는 것은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다. 막역(莫逆)함은 상대를 내 마음에 들도록 고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럴 때라야 충고는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어린 말’이 될 것이고, 벗과의 신의를 돈독히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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