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지옥의 방랑자 (2) : 뉴욕과 에릭 호퍼
독(毒)의 평범함
힘든 세상이다. 적당히 잘나서는 주목받을 수 없고, 적당히 벌어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으며, 적당히 내 걸 포기해도 선해질 수가 없다. ‘적당히’라는 단어가 실종된 이런 이상한 환경에서는 비정상적인 인간이 정상이 된다. 독한 인간이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외부와 내부의 한계를 뛰어넘는 슈퍼맨.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의 정기신(精氣神)을 불살라 연료로 쓰는 열정맨. 요즘 같은 세상에 모범적인 일꾼이라고 하겠다.
요즘 지구촌에서 이렇지 않은 곳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헬뉴욕은 헬조선보다 몇 단계 더 앞서 간다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은 백수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도시다. 만인은 노동시장에 던져진다. 특히나 이민자들은 이 노동시장의 밑바닥에 자발적으로 걸어들어와서 비인간적인 임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누구도 이들보고 뉴욕에 오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이 독종들 틈새에서 살면서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 독(毒)함, 그것은 생각처럼 대단한 게 아니다. 누구든 인생에서 코너에 몰렸을 때 꺼낼 수 있는 조커 카드를 불과하다. 이 카드를 꺼내는 법은 간단하다. 편안한 고향집으로 되돌아갈 다리를 끊어버리면 된다. 머물 곳을 잃어버린 인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새로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야 만다. 즉, 진실은 정반대다. 독종이라서 적응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장 절박한 부적응자가 가장 독한 자가 된다. 독기는 그 사람의 자존감이 아니라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견디는 치욕과 비례한다. 그리고 뉴욕에서 이런 독종들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더 흔하다. 쓰레기봉투 값을 아끼겠다고 마트 봉지를 수집하는 우리 옆집 멕시코인 언니도, 부모님 퇴직금으로 대학원 등록금을 내면서 미래의 취직에 모든 것을 거는 삼십대 한국인 유학생도, 지하철에서 누가 쳐다만봐도 동물 취급하지 말라고 격노하는 흑인 아저씨도, 모두 독이 서린 인간들이다. 다들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성공한 독종’은 띄워주지만 ‘실패한 독종’은 묻어버리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인간은 모두 지옥(도시)에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이런 질문이 든다. ‘독해지기’와 ‘적응하기’ 사이에 인과관계는 도대체 뭘까? 방금 말한 것처럼 항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이 행복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세상 만사가 다 술술 풀리기만 하면 완벽한 적응자가 될 수 있느냐. 그것도 옳은 말이 아니다.
나는 독해지는 것이 특수상황에서 적응하기 위한 수단이나 결과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고질병이라고 생각한다. 그 병의 시발점은 바로 우리 모두가 계급, 시대, 성격을 뛰어넘어서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는 ‘셀프(self)-부적응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먼 이방인이다. 스스로의 영혼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른다. 자신이 어떤 동기로 인생을 살아야 가장 살맛나는지도 모르고, 세상에 떠도는 개념어에 가려 ‘나다운 모습’을 착각하기도 한다. 물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저냥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또 그러지는 못한다. 인간은 또 ‘내 인생은 내가 주도하겠다’는 욕심을 포기할 수가 없는 피곤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 깊숙한 곳에 자기 남은 인생에 대한 거창한 시나리오(망상)는 다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하는 일과 느끼는 일이 내일 되고 싶은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여정의 끝에서 희망을 만나도 당혹스럽거나 심지어 적의까지 느낄 것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리니. 1
만약 스스로의 본래면목을 찾지 못하고, 계속되는 헛발질에 실망과 당혹과 적의만 쌓이면 이 감정이 독(毒)한 에너지로 전환된다. 이 경향은 뉴욕처럼 도시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보다 더 빨리 운동하는 경우에 더 심해진다. 세상에 휩쓸려서 살고 싶지 않은 반발심이 확 밀려들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나’를 만족시켜보겠답시고 자꾸만 무리수를 두게 된다. 사업을 벌리거나, 연애에 중독되거나, 성공지향적인 루트를 달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기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상과 조직을 죽도록 미워하거나, 이렇게 찌질하게 살고 있는 자기 자신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아, 좀 건전한 사람들은 취미생활로 풀어내기도 한다.
건전한 취미생활?
호퍼는 인간의 찌질함이 너무 창의적이라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어떤 환경에서 살든 스스로를 부적응자로 설정하는 인간의 소외능력(?)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 종(種)만의 특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이 찌질해진 게 아니라, 찌질한 게 우리 인간의 원래 모습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부터 신체적으로 다른 동물들보다 열등한 종이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신체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악기를 발명하며, 언어를 개발했다. 이런 시도들이 엉뚱하게 문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인간의 창조성의 원천은 그 불완전함에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창조력을 발휘한다. (...) 인간은 자연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은 인간을 완성하는 일을 깜빡 잊어버렸고, 그 실수의 대가를 지금까지 치르고 있다.”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약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두드러지게 제 역할을 다했다. 설사 그 중 1%만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인류사 전체를 바꿀만한 발견이었다. 2
호퍼의 통찰을 몇 발자국 더 밀고 나가면 니체의 통찰과 연결된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간들은 천국에 없다(In heaven, all the interesting people are missing)”고 말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지옥에는 이 흥미로운 인간들이 몽땅 모여있다는 소리다. 왜인가. 대체불가능한 자신의 영혼의 얼굴을 만낙 위해 금지된 선을 넘어본 사람들 숫자가 천국보다는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감정과 논리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진,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기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자기만의 ‘존재의 정합성’을 가지게 된다.
“독립적인 인간은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존재이다. 홀로 정신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자신감과 자존심은 툭하면 변질되기 쉬우며 매일매일 재생되어야 한다. (...) 자율적인 인간의 영혼은 화산 지대의 풍경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곳은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자기와의 경계선이 생겼다. 우리의 모든 열정과 정열적인 추구, 꿈, 포부, 뛰어난 업적은 전부 이 갈라진 틈을 따라 탄생했다. 이러한 영혼은 성취를 통해 자기와 화해해서 이 틈을 메우거나, 무사무욕의 상태가 되어 틈의 존재를 속이거나, 자기부정을 통해 틈을 제거하느라 분투한다.” 3
이 분투 때문에 내가 뉴욕에 반한 것 같다. 처음 도착했을 때,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로 나를 매료시켰다. 이제 나는 뉴욕의 진정한 다양성을 보고 있다.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국적, 언어, 이런 카테고리는 다양성의 겉가죽에 불과하다. 뉴욕에서 정말 다양한 것은 이 분열증적인 환경 속에서 각각의 사람들이 ‘나’를 유지하는 공식들이다. 뉴욕의 운동은 반생명적인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데, 이런 환경은 자신의 본래목면을 찾아가려는 사람들의 시도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그러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가슴 아프고 처절하며 매력적이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를 일관되게 유지해주는 공식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단 말인가? 똑같은 마음-지옥에서 출발해서 이렇게 다른 길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지옥은 달리 어디 있는 게 아니다. 세상과 접해있는 마음의 가장자리에 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가장 인간적인 창의성이 피어난다.
뉴욕 스피릿의 극약처방 : 자유, 열정, 혁신
독해지는 것은 병증이다. 그래서 호퍼는 단적으로 말한다.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자는 진정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아니다.” 즉, 사람이라면 무릇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이렇게 초를 친다. 누구나 창조적인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창조력은 오직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데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저절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옛날에는 자기 스스로 마음 속 불만을 해독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종교를 활용했다. 그러나 종교가 힘을 잃은 현대 사회에서는 이 독기가 고스란히 병증으로 퍼지게 된다. 뉴욕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모든 사람들이 워커홀릭이 되어서 “사업, 정치, 문학, 예술, 과학” 등등에 비정상적으로 몰두하는 도시다. 이렇게 생활강도가 강하면 반작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독기를 품게 된다.
“전통적 종교는 구원의 탐구를 인도하고 일상화한다. 이런 종교가 신용을 잃으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영혼의 구원에 나서야 하며, 하루 24시간 내내 이 일에 매달린다. 이 때문에 사업, 정치, 문학, 예술, 과학, 심지어는 연애와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생활 모든 부문에 걸쳐 광신주의가 분출된다. 따라서 종교적 열정의 배출 통로를 차단하면 사회 조직이 모두 감염되고 여기저기 염증이 생기는 것이다.” 5
그렇지만 이런 뉴욕에서도 길 잃은 정신을 통제하기 위해서 내리는 극약처방이 있다. 자유(freedom), 열정(passion), 그리고 혁신(renovation)이다. 모두 뉴욕의 진보성을 상징하는 가치다. 그러나 호퍼에 따르면 이것들은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불만으로 가득한 정신들을 시스템으로 유인하기 위해 길을 낸 것에 불과하다. 인용구와 함께 그의 해석을 잠깐 맛보도록 하자.
1) 자유: ‘하지 않을 자유’를 억압한 결과
“자유를 측정하는 기본적인 시금석은 아마 무엇인가를 하는 자유보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자유일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 확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유는 삼가고 뒤로 물러나며 절제하는 자유이다. 행동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활발한 전체주의 체제하에서도 부자유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6
뉴욕의 대표적인 가치는 ‘자유’다. 세계 각국의 전통이 금지하고 있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 원하는 꿈을 쫓으라는 것. 대신 그 자유에 책임을 지라는 것. 그러나 호퍼는 한마디 한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야만 어떤 특정한 윤리가 절대적 강령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할 자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을 억압하고 있어도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상대방이 그의 자유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냐고 반문할 뿐이다.
그러나 뉴욕은 절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리라. 그래야만 이 자본주의의 심장에서 ‘백수’의 존재를 근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퍼의 발언은 사람을 모두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뉴욕의 현실을 정확하게 꼬집었다고 하겠다.
2) 열정: 자기 부정
“가장 이기적인 열정에도 자기희생의 요소가 다분히 들어 있다. 알고 보면 놀랄 일이지만, 극단적인 이기주의도 실상은 자기 포기이다. 수전노, 건강중독자, 영광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희생을 수련한다는 점에서 이타적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모든 극단적인 태도는 자기로부터의 도피이다.” 7
뉴욕의 미덕 중 하나는 열정적으로,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교육받고, 결혼하고, 결과적으로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이다. 호퍼에 따르면, 이런 극단적인 열정은 자신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지름길이다. 오늘의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내일은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괴로워도 참아볼만 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정의 정서를 활용하여 뉴욕은 각종 부적응자들을 시스템 속에 흡수하고, 그들의 창의성을 착취한다.
3) 혁신: 세대 희생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한 세대를 희생시키는 사람들은 인류의 적이다.” 8
어느 이민자나 1세대는 노예처럼 일한다. 영어도 못하면서, 개 돼지 취급을 받아가며 푼돈을 모아서 자식들을 교육시킨다. 그들의 희망은 가족의 운명을 혁신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식들만큼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만으로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은 뉴욕 바닥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선택과 희생이 그 옛날 혁명군의 이상만큼이나 숭고하다. 호퍼는 딱 잘라서 한 세대를 희생시키는 이상은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뉴욕 이민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서
지난 회에도 고백했지만, 나는 뉴욕에 계획 없이 가서 방향 없이 살다 왔다. 왜 나는 뉴욕에서 슈퍼우먼처럼 살지 못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내게는 아직 ‘돌아갈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망치듯이 허겁지겁 한국으로 날아왔더니, 이제와서 보니까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수많은 고민을 들었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모순에 감동받았다. 뉴욕을 떠났지만, 뉴욕에서 내가 목격한 마음-지옥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듯하다.
서울 남산 필동의 TG 스쿨에 앉아 글을 쓰면서 뉴욕을 떠올려본다.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3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 내 마음에는 뉴욕에 대한 밤톨만큼의 환상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매일 삶을 새로이 갱신하고 있는 뉴욕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진다. 그들의 자긍심과 찌질함은 참으로 인간적이었다. 그들과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빈 손으로 뉴욕에 와서 엉겁결에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나게 사람들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콜드플레이(Coldplay)의 신곡 ‘기적들(Miracles)’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나 역시 뉴욕에서 만난 친구들을 한 명씩 떠올려본다.
몇 달 후, 나는 쿠바에 간다. 그곳 역시 천국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또 새로운 이야기와 더 찌질한 마음-지옥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나는 쿠바에 대해 일찍이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감사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조금 더 인간적인 ‘호모 사피엔스’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더 넓어지고, 독기 빠진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193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인간의 조건>,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3~4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27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26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150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176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8번 테제, 2014 [본문으로]
- 에릭 호퍼, <영혼의 연금술>, 정지호 역, 이다미디어, 146번 테제, 20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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