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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노바디’의 블루스 (2) : 뉴욕과 제임스 볼드윈

by 북드라망 2017. 5. 29.

‘노바디’의 블루스 (2) : 뉴욕과 제임스 볼드윈



또 다른 나라, 똑같은 전쟁


제임스 볼드윈의 『또 다른 나라』(Another Country)를 다 읽고 나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 이것은 나에게 말 그대로 ‘또 다른 나라’다. 이 소설은 1950년 대 뉴욕, 인종주의의 삼엄한 압박 속에서 흑백 남녀가 벌이는 사랑싸움과 사회와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읽는 내내 그 어떤 등장인물에게도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


오, 물론 나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도 마이너리티로 분류되는 황인종이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볼드윈의 나라에서는 한국에서 20년을 살았고 같은 인종(대만인)과 쭉 연애한 내 노란 피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래서 이방인이 불리한 것이다. 현지인처럼 서로가 공감대를 형성할 공통의 인종차별 경험도 없지만, 그 그늘을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이방인에게도 역할은 있다. 하나의 장소를 대변하지는 못해도 장소와 장소 사이에 있는 진실을 보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서든 형태는 달라도 똑같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개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의 총성 없는 전쟁이다. 여성, 남성, 아이, 노인, 자식, 부모, 흑인, 백인........ 누구는 이것을 정체성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는 딱 하나의 정체성 밖에 없다. 일상이 끝없는 바다라면, 개념은 군데군데 솟은 섬이다. 그리고 우리는 철마다 섬에 들려서 전쟁을 치르고 연료를 채워야하는 항해자다. 나는 어느 좌표에 서 있는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까? 누구와 함께 항해할까? 때로는 자발적으로 또 때로는 강제로, 우리는 답을 정하기 위해 각각의 섬에서 사회와 (혹은 사회에 의해)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돛대에 임시적인 답을 달고, 다음 번 전쟁을 치를 때까지 계속 항해한다. 어떤 ‘나라(사회/공동체)’에 살든 간에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물밑 전쟁은 항상 벌어지고 있다.



인종, 찌질이들의 환상의 섬


누구는 강태공처럼 달밤에 배 한 척 띄워놓고 유유히 유람하는 삶을 살고 싶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불가능한 꿈이다. 여기에 이 전쟁의 평범하고 짜증나는 진실이 있다. 일상의 바다가 흐르고 개념의 군도(群島)가 솟는 장소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관계다. 즉, 전쟁터는 내 옆에서 태평하게 앉아 있는 ‘저 사람’이다. 엄마, 친구, 애인, 이웃, 동료, 상사.......는 나를 만날 때 자기 안의 세계를 통째로 끌고 온다. 이들과 매일 같이 싸워야하지만, 영영 전멸시킬 수도 없다. 정말 이상한 전쟁 아닌가?


인종은 뉴욕 인간관계의 아킬레스건이다. 뉴욕에 살면서 인종 문제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인종주의자인 트럼프 대통령을 가장 증오하고, 이민자가 가장 자유롭다는 이곳 뉴욕에서조차 매년 여러 명의 유색인종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다. 인종은 이 사회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나를 증명해보라고 밀어붙이는 첫 번째 섬이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내 피부색이 색깔의 스펙트럼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의 첫 번째 반응이 튀어나온다. 인종차별은 철폐되었지만, 그 빈자리는 ‘상대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할 자유’로 대체되었다.



잠깐 사족을 달자면, 한국에서는 인종주의가 절박한 이슈가 아니다. 여성혐오 속에서 절망한 남성과 두려운 여성이 서로를 밀쳐내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해서 ‘틀딱’과 ‘꼰대’라는 유독한 말이 튀어나오지만, 우리는 우리가 같은 인종이라는 사실만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인종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 오 천 만 정신은 모두 동일한 섬에 평화롭게 정박해있다. (참고로 이건 순전히 정신적인 평화다. ‘황인종’이라는 섬은 내 실제 조상이 어디 출신인지와 전혀 관계없다.) 그렇지만 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는 일상의 중심에 ‘인종’이라는 피투성이 섬이 있다. 이 전쟁은 400년 전, 유럽이라는 세계의 귀퉁이에서 찌그러져 있던 백인들이 항해기술을 개발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생물학적으로 인종은 뿌리까지 환상이고 미신이다. 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種)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인종은 여전히 목숨을 위협하는 살벌한 전쟁터다. 인종이 환상이라면, 도대체 사람들은 상대의 피부색에서 ‘뭘’ 보기에 이 개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인 카라 워커(Kara Walker)는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나라에 계속 존재하는 인종주의의 모든 문제와 그 유산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인종주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투쟁’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겠는가?”[각주:1]

 

워커의 말을 일차적으로 해석하면 미국인에게 인종이란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개념과 정체성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어떤 개념으로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드넓은 바다다. 그 사람이 특정한 개념 주위를 맴맴 돌고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워커의 말에 생략된 진실은 이러하다. 미국인들은 인종주의라는 섬을 없애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왜인가? 서로의 관계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은 인종주의를 통해서만 계속해서 싸울 수 있고, 싸워야만 서로를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목 안의 가시처럼 껄끄럽다. 400년 동안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린치(lynch)했던 잔인한 관계를 과연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구조의 면에서 보면 백인은 흑인에게 일방적으로 씻을 수 없는 원죄를 가한 권력자 집단이다. ‘인종’이라는 섬에서 흑인은 맨손인데 반해 백인은 최첨단 무기를 들고 싸우는 셈이다. 하지만 어떤 관계도 일방적이지 않다. 흑인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백인은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흑인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하게 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괴물처럼 바꾸지 않고서는 나에게 린치를 가하고 또 나를 게토에 가둬둘 수 없다. 게다가 (...) 나는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안다.”[각주:2] 이 진실, 이 원죄는 백인 개개인마다 무의식 속에 웅크려있다. 백인에게 까만 피부는 “자기혐오 혹은 자기부정을 반영”[각주:3]하는 거울이다. 그래서 백인들은 흑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무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반대로 흑인에게 하얀 피부는 백인이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 세운 무지의 벽이다. 흑인들은 분노로 이 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무지와 분노로 이루어진 비대칭적인 관계지만, 양쪽 다 이해하고 있다. 너와 나는 피부를 맞대고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 이 접촉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볼드윈은 400년 간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이 짊어져온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결심한다. 서로를 모욕해 온 병든 사랑이지만, 이제는 백인도 흑인도 서로를 버리지 못한 채 껴안고 가야한다는 점에서 ‘사랑’ 말고는 다른 출구는 없다. 쉬운 결심은 아니다. 볼드윈의 자서전을 쓴 리밍은 볼드윈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확실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상황을 다루는 이 예술가는 마음속에서 이것을 복잡한 질문들과 함께 견뎌야 했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혈연”은 “아마도 미국이 경험한 현실 중에서 가장 심오할 것”이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의 힘과 분노와 공포가 억눌러져 있는지 받아들이기 전까지” 우리는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각주:4]


거시적인 틀로 보면 미국의 인종주의를 분석하는 방법은 수없이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이 갈등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원초적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극소수를 빼고는 우리는 유유자적 홀로 인생을 항해할 수 없으며, 차라리 상처받을지언정 ‘노바디’가 되는 기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찌질함을 사랑이라고 부르든 증오라고 부르든 그 본질은 같으리라.



『또 다른 나라』: 이 나라에 안전지대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의 소설 『또 다른 나라』는 1950년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이자 인종 이야기다. 총 여덟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할렘 출신의 재즈 드러머 러퍼스. 러퍼스의 여동생이고 가수 지망생인 아이다. 남부의 폭력적인 남편에게 아이와 격리당한 후 홀로 뉴욕에 온 레오나. 작가지망생인 백수 비발도. 비발도의 국어선생님이었던 리처드와 그의 아내 캐스. 남부 출신이지만 게이라는 성 정체성 때문에 고향을 떠난 에릭. 그리고 에릭이 파리에서 만난 몸 파는 소년 이브. 여기서 러퍼스와 아이다 빼고는 모두 백인이다.


이 여덟 명은 뉴요커답게 모두 뉴욕 바깥에서 (혹은 할렘과 브루클린처럼 ‘뉴욕 다운타운’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다. 뉴욕에서 이들은 서로 친구와 연인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의 목을 조르는 적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묘미다. 미국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도시 뉴욕에서, 뉴욕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그리니치빌리지에서조차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말인즉, 미국에서 정신적으로 안전한 장소는 단 한 곳도 없다는 소리다. 이 전쟁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미국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 ‘또 다른 나라’다.



이 소설의 실존적 무게는 러퍼스의 어깨에 놓여 있다. 그는 소설 초반부에 자살한다.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통탄해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러퍼스의 망령은 그의 백인 친구들을 소리 없이 따라다닌다. 러퍼스와 비발도는 세상에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고, 에릭은 러퍼스를 쫓아다녔다가 대차게 거절당한 후에 파리로 떠나기도 했다. 캐스는 러퍼스의 사람 좋은 미소를 좋아했고, 아이다에게는 자랑스러운 오빠이자 그녀를 할렘에서 탈출시킬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런 남자가 자살을 했다. 할렘의 재즈바에서 드럼을 치고, 여자를 꼬시며, 비발도와 어깨동무를 하고 밤새 술을 마시던 유쾌한 청년이 자살을 했다. 어째서일까?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러나 알 것만 같은 죽음의 이유가 시간이 흐를수록 각각의 등장인물에게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러퍼스의 비극은 레오나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레오나는 남부에서 올라와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뉴욕에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무작정 할렘을 찾아와 재즈바에 들어가고, 러퍼스는 이 불쌍하고 연약한 백인 여자에게 한 눈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사랑이었을까? 레오나가 알라바마(Alabama) 주에서 왔다고 말할 때, 남부에서 군 복무를 할 당시 백인 상병에게 구타를 당했던 기억이 러퍼스의 머리를 잠시 스치고 지나간다. 흑백 사이의 긴장은 이미 시작되었다. 긴장은 섹스와 함께 터져 나온다.


그는 그녀를 아래에 강제로 깔고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 그녀의 숨결은 신음소리와 짧은 울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과 함께 뱉어졌다. 그리고 그는 무심결에 더 빠르고 더 공격적으로 깊게 움직였다. 그는 그녀가 사는 가장 오랜 날까지 그를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 숨결을 내뱉으며 그는 우유처럼 하얀 창녀를 욕했고 신음했으며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서 그의 무기를 사용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도 그를 멈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얀 신(神)도, 동번서주 튀어나오는 린치하는 군중들도 그를 멈출 수는 없었다. (...)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때렸으며 자기 안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백 명의 흑-백 아이들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각주:5]


이 장면에서는 강간에 가까운 폭력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섹스가 끝난 후 레오나는 몹시 만족해한다. 결국 이 폭력은 실제로 행해졌다기보다는, 러퍼스의 내면에서 일어난 흑-백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다. 레오나는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는 세상 전부를 끌고 왔다. 러퍼스는 “하얀 신(神)과 린치하는 군중들”이 그어놓은 금지선을 넘기를 소망했고, 백인들이 흑인들을 “그들이 사는 가장 오랜 날까지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세상이 독으로 취급하는 “백 명의 흑-백의 아이들”을 만들고 싶어 한다. 의도치 않게 ‘흑백 연합 전선’의 선봉자가 된 러퍼스는 레오나의 몸 안에서 두 동강난 세계의 불가능한 화합을 꿈꾼다. 흑인으로서 불쌍한 백인 여성을 돌보면서, 러퍼스는 잠시 자신의 힘이 세졌다는 고양을 느낀다.


그러나 세상은 러퍼스보다 훨씬 힘이 셌다. 사람들은 레오나를 창녀 취급했고, 러퍼스를 극악의 범죄자로 몰아붙였다. 이 압박을 견딜 수 없었던 나머지 러퍼스는 레오나에게 모든 문제의 화살을 돌렸다. 그녀를 끊임없이 폭행했고, 다른 남자와 잤는지 의심했다. 이 비극은 레오나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남부에서 올라온 오빠들의 손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끝났다. 러퍼스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한 달 동안 노숙자처럼 뉴욕의 길거리를 헤맨 후 목숨을 끊는다.



삯(dues)을 내지 않는 사랑은 없다


모두가 러퍼스의 폭력에 깜짝 놀라며 그를 욕했을 당시, 아이다만은 레오나를 증오했다. 왜 하필 우리 오빠에게 엉겨 붙어서 고통을 안겨주었나? 그녀의 말은 한편으로 옳다. 러퍼스는 악인이 아니었다. 러퍼스의 몸은 지난 400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배치에 따라 분열된 것이다. 레오나의 따뜻한 마음씨는 러퍼스를 구원해줄 유일한 길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피부색은 러퍼스의 고통을 극단으로 밀어붙였다. 러퍼스의 폭력은 이 상황을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였다. 이 혐오를 불어넣은 건 당연히 세상이었다.


이 세상에는 러퍼스의 ‘친구들’인 그리니치빌리지 백인들도 예외 없이 포함된다. 그들 중 누구도 러퍼스의 고뇌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러퍼스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진 유일한 친구”[각주:6]라고 서슴없이 불렀던 비발도마저, 러퍼스가 레오나를 그토록 절망적으로 때렸던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러퍼스가 한 달 만에 노숙자 꼴을 하고 나타났을 때, 비발도는 친구가 실연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졸리고 피곤했던 나머지 이런 멍청한 빈 말을 내뱉은 것이다. 


“아침에 여기 누워서 우리 집 천장을 한 번 바라봐. 균열로 가득하고, 모든 종류의 그림을 만들어내. 아마 이 그림들이 나에게 아직 말해주지 않은 것을 너에게는 말해줄지도 몰라.”

다시금 러퍼스는 자신이 질식되고 있다고 느꼈다. “고마워, 비발도.”[각주:7]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천장을 볼 필요조차 없다. 모든 관계, 모든 사랑에는 지불해야 하는 댓가가 있다. 러퍼스는 흑인이라는 배치에서 태어나 백인과 함께하기를 선택한 자기 사랑의 삯(due)을 지불해야 했다.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오랫동안 벌어진 사회적 전쟁을 감당해야 함을 뜻한다. 불행히도 러퍼스는 파산상태였다. 그는 돈이 없는 뮤지션이었고, 흑인이었으며, 여자를 책임져야 하는 남자였다. 그는 결국 목숨으로 삯을 내야 했다.


러퍼스보다 정신력이 강했던 아이다는 이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다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백인이 흑인보다 안전하게 살아가면서, 이 관계의 삯을 지불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정신적으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심리적으로는 흑인들과 접촉을 꺼리고, 물질적으로는 부를 독점하면서 계속해서 삯을 체불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가 백인의 인종주의의 무지의 정체다.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분리(Segregation)는 정책적으로 제거되었을지는 몰라도, 일상의 바다에서는 무지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다.

  아이다의 복수는 아이러니하게도 비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러퍼스의 장례식에 갔던 비발도는 아이다에게 홀딱 반하고,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다는 비발도가 아직도 ‘삯’을 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발도는 러퍼스와 아이다의 삶이 어떠한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흑인의 세계는 그에게 ‘또 다른 나라’였다. 그리하여 아이다는 결국 참지 못하고 기획사 사장인 엘리스와 바람을 피운다. 비발도가 흑인 여성을 돌보는 백인 남성으로서 은연중에 느끼는 우월감을, 아이다는 ‘더 능력 있는 백인 남성’을 만남으로써 폭력적으로 짓눌러버린다. 진실을 고백한 후에 아이다는 말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말이지.”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거야. 그리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당신이 러퍼스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들이 엄청 많은데, 당신은 어떻게 러퍼스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어? 어떻게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어? (...)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당신은 몰랐어. 당신은 나에게 삶이란 어떤지 몰라.”[각주:8]


나를 죄책감으로 질식시키지 말라고 울부짖는 비발도에게 아이다는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구도 세상 전체를 책임질 수 없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세상에 태어난 것은 누구에게도 죄가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또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삯을 지불해야 할 몫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우선은 알아야 한다. 나는 어느 섬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전쟁을 치르며 항해하고 있는지.



가족, 고통을 반복할 용기


이런 악다구니 속에서 사랑은 정말 가능할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결국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을 너에게서 비춰 보는 게 아닐까? 너를 향한 내 사랑과 증오이 모두 너의 잘못은 아니지 않나? 맞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삯’을 치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바로 사랑의 증거라고 나는 믿는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로 인해 고통스러울 리가 없다. 거꾸로 나로 인해 고통 받기를 바라며 상대를 상처주는 경우도 있다. 찌질하다. 하지만 찌질한 사랑이라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사랑을 하려면 고통을 반복할 용기가 필요하다. 『또 다른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다른 주제는 남성의 연약함이다. 남자 주인공들은 섹슈얼리티에서 여성보다 리드를 할 수 없을 때 자존감을 잃고, 또 사회적으로도 앞장서서 능동적으로 가족을 만들어야 하는 압박 때문에 여자들보다 먼저 무너진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겪고 무사히 ‘삯’을 지불하는 사람은 에릭이다. 그는 남성 또한 때로는 수동성을 필요로 하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사랑은 섹슈얼리티와 상관없이 누구나 100% 능동적일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아슬아슬한 항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사상을 온몸으로 전파한다! 비발도는 에릭과 섹스를 하면서 자신의 양성애적 욕망을 깨닫고, 리처드가 상업적 작가로 돌변한 후에 신뢰를 잃어버린 캐스는 에릭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자신이 여전히 리차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길거리에서 몸을 팔던 프랑스 소년 이브는 에릭을 통해 온전히 사랑받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남녀를 초월한 에릭의 능동성을 통해, 그리니치빌리지의 백인들은 자신이 (러퍼스와의 우정을 포함하여) 사랑 앞에서 얼마나 비겁했는지 깨닫는다.


볼드윈은 인종문제가 해결되려면 사생활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생활은 진공 상태의 독방이 아니라, 새 생명과 새 삶을 구성하는 만남의 광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 대해 정직해지고 확신이 생길 때, 진심으로 가족을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할 수 있다. 개인적인 고통에 매이지 않고 다음 세대와 시대를 기원할 수 있다. 이때의 가족은 꼭 혈연이 아니어도 된다. 내가 내 옆에 스스로 두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에 천착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죽은 자가 중요하고, 새로운 삶이 중요했다. 흑인-성(blackness)이나 백인-성(whiteness)은 중요하지 않았다.”[각주:9]



노바디들의 블루스


뉴욕에서 어떻게 사랑을 할까? 어떻게 가족을 만들어낼까? 쉽지 않다. 이곳은 정신의 지브롤터 해협 같다. 수많은 개념-섬들에 인해 인간관계가 고립되거나 오해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를 푸는 첫 번째 스텝을 알고 있다. 내 옆의 러퍼스를 구제하라. 혹은, 내 안의 러퍼스를 구제하라. 질식해가는 정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상황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의지를 동시에 노래하는 블루스처럼, 진심으로 말하고 진심으로 듣는 순간은 상대와 나를 모두 ‘노바디’ 상태에서 구출할 것이다.


러퍼스는 재즈바에서 연주를 하다가 귀를 막은 관중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도 [음악을] 듣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피 없는 사람들을 피 흘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각주:10] 나는 볼드윈에게, 내 이웃에게, 적에게 어떤 관중일까? 피 흘렸던 자들은 볼드윈의 블루스를 들으며 위로를 받고, 피 흘려본 적 없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평화에 감사하며 다음을 준비하기를. ‘또 다른 나라’에서 새벽에 글을 마친다. 


글_김해완

  1. Elizabeth Armstrong, ‘Interview with Kara Walker,’ , Walker Art Center, 1997 [본문으로]
  2. James Baldwin, ‘Selling the Negro,’ , Vintage International, 2017 [본문으로]
  3. David Leeming, , Arcade Publishing, 1994, loc.1287 [본문으로]
  4. David Leeming, , Arcade Publishing, 1994, loc.811 [본문으로]
  5. James Baldwin, , Vintage International, 1993, loc.324 [본문으로]
  6. James Baldwin, , Vintage International, 1993, loc.964 [본문으로]
  7. James Baldwin, , Vintage International, 1993, loc.829 [본문으로]
  8. James Baldwin, , Vintage International, 1993, loc.5119 [본문으로]
  9. 재인용, David Leeming, , Arcade Publishing, 1994, loc.847 [본문으로]
  10. James Baldwin, , Vintage International, 1993, loc.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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