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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설 읽는 수경

돈 드릴로, 『그레이트존스 거리』 ― 시장과 예술

by 북드라망 2017. 9. 19.

돈 드릴로, 『그레이트존스 거리』 ― 시장과 예술



십여 년 전쯤 처음으로 화이트 노이즈를 읽으며 놀라움에 빠졌고 그로부터 몇 해 뒤 코스모폴리스를 읽으면서 이건 뭐지?’를 반복했더랬다. 지난해에는 그레이트존스 거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었는데 역시나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초현실적 감각으로 조명하는 소설가 돈 드릴로의 세계를 보는 건 마치 일부러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골라 쓴 것 같은 체험을 선사한다. 그곳에서는 눈짓 한 번으로 수백만 달러를 이동시키는 남자가 비현실적인 그만큼 반자본주의 시위대의 퍼포먼스 또한 비현실적이다. 어떤 장소도 어떤 사람도 기댈 만한 것이 못 된다. 모두가 어딘가 일그러져 있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장소, 그곳이 돈 드릴로가 보여주는 현대 도시다.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도시를 그리되 그곳을 빠져나갈 출구를 쉽사리 열어주지 않는 방식, 거기에 나는 매료되었던 것 같다.

 

심오하고 애매한 독백들을 다 걷어내고 보면 그레이트존스 거리의 줄거리는 심플하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밴드의 리더 버키가 어느 날 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실종을 둘러싼 루머들이 쏟아져 나오고, 은둔한 버키를 둘러싸고 그의 복귀 혹은 반대로 완전한 소멸을 꾀하는 기획들이 생산된다. 팬들은 그가 자살로 생을 마치길 바라고, 미디어 매체들은 그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고심하고, 소속사는 그가 전설’(소문으로 떠도는, 그가 언젠가 산장에서 만들었다는 음반, 일명 산장 테이프’)을 들고 복귀하길 강권한다. 실상 버키는 이 모든 것을 피해 달아난 것이다. 만들어진 전설을 뒤좇을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전보다 나은 음악을 만들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자살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명성에는 온갖 과잉이 뒤따른다. 나는 지금 세력이 기울고 있는 정치가나 나약한 왕의 어둠침침한 영예에 대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명성 즉 우리를 집어삼킬 듯한 네온 불빛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나는 잿빛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여행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나는 위험에 관해, 온갖 공허함의 가장자리에 대해, 공화국의 꿈에 에로틱한 테러를 나누어주는 한 남자의 주변 환경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영역, 기괴하고 외음부 같은 영역, 침범의 기억으로 축축한 영역에서 살아야 하는 남자를 상상해보라. 그가 반쯤만 미쳤다 해도 그는 대중의 온전한 광기 속으로 빨려들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이성적인 사람이거나 지옥의 관료거나 생존의 재주를 가진 은밀한 천재라도 생존자를 경멸하는 대중에 의해 파괴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특별한 명성은 지나친 잔혹행위를 먹고사는데, 그 정도가 안 되는 명성의 소유자들에게 조언하는 이들이 오명이라고 여기는 것들, 즉 리무진 안의 히스테리나 청중들의 칼부림, 기괴한 소송, 배신, 아수라장과 약물 따위가 그것이다. 진정한 명성에 붙어 있는 유일한 자연 법칙은 아무래도 유명한 사람은 끝내 자살을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너무 기발하거나 능숙해 대중의 탐욕스런 눈에 포착된 창작자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맞이하는 최후를 보고 있는 중이다. 보다시피 그들은 히트상품이 된다. 그들은 결코 빌라 아말리아속의 여주인공처럼 멋진 고독 끝에 위대한 예술가의 자리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항정신, 비주류 문화, B급 정서낯설고 기괴한 것들마저 끌어안아 제품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놀랄 만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로큰롤 밴드의 리더는 대중의 아이돌이 되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신().

 

정신 똑바로 박힌 예술가라면 응당 고독을 원할 테지만, 불행히도 너무 많은 대중이 그를 사랑해버리기 시작했다면 그는 시장 안 붙박이 신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가 학자들에 대해 했던 말보다 여기 적절한 코멘트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숭배하면서 죽여버렸고, 박제로 만들어버렸다.” 이럴 때 예술가의 선택지는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 끝내 도피·잠행하는 데 성공하거나, 아니면 대중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복제하기 시작하거나. 하지만 도피한다고 해서 그가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다. ‘사라진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좋은 먹잇감이라는 걸 기자들과 사업 관계자들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나간다? 대중을 향해 나아가 그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그랬을 때 펼쳐질 시나리오를 버키는 그린 듯 잘 알고 있다.

 

깡마른 몸매의 신비한 남자가 전설적인 테이프를 가지고 돌아와서 스스로를 재창조할 기회였다.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를 따르는 팬들을 새로운 침묵으로 이끌 기회였다. 팬들은 자신들의 공포를 아기 젖병 속에 담아 의자 아래 놓아둘 것이다. 난 새로운 작품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그게 핵심적인 것이었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가령 신경숙. 나는 그가 예술가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지만 한때 재능 있는 창작자였으며 그 재능이 문학시장 안에서 소모되다 지금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를 희생자로 둔갑시키려는 게 아니다. 다만 신경숙 사태에 대해 논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의 작가적 양심이 아니라 거대 출판사들과 문창과 교수인 원로 작가 및 평론가들이 점유한 문학시장이라는 거다. 그에게 작가,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일 때 출판사들이 염두에 둔 게 뭔지는 빤하다. 한 마디로 잘 팔리는 작가라는 거다. 삶을 삐딱하게 보지도, 인간의 비인간성을 파고들지도, 우리의 통념을 잘게 빻아버리지도 않는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90년대 이래 지금까지 시장에서 잘 먹힌다.

내 기억으로 그의 단편과 장편소설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가 서로를 베끼고 있었다. 제한된 언어 속에서 출구를 찾고자 분투하는 작가들과 달리 그는 다른 작가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에서 마치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순박한 소녀처럼 언어를 채취했다. 이처럼 동력이 떨어진 창작자라면 진작 자연스레 소로(小路)에 접어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출판사와 평론가들의 상찬 덕에 스타작가로 발돋움했고, 희게 뜨고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 사이에서 마침내 허점을 잡히고 만 거다.



이와 다른 길을 택한 버키, 그의 잠적은 그 자체로 예술적 행위라고 할 만하다. 대중의 열광과 거대자본의 호의,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저작권료를 모두 두고 달아났다는 것만으로도 꽤 그렇다. 자기 복제를 반복하느니 입을 다물고, 등 떠밀려 자살함으로써 신화가 되느니 춥고 더러운 아파트에 기어들어 빈궁한 이웃들과 수다를 떠는 편이 훨씬 낫다. 그게 그의 판단이다.

실제로 그는 아파트에 머무는 내내 그야말로 지껄여댄다. 지껄이기,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계약과도 인터뷰와도 노래와도 대중과의 소통과도 무관한 말만 골라서 그렇게. 바꿔 말하자면 돈이 될 만한 말들을 피해 말하기, 자본이 원하는 말들을 비껴 말하기. 빌라 아말리아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것이 버키 스타일의 고독이며 버키 스타일의 전투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복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소리를 만들 것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그를 멋진 놈이라고 생각했다

글_수경(고전비평공간 규문)



그레이트존스 거리 - 10점
돈 드릴로 지음, 전승희 옮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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