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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정화스님 멘토링] 게임 중독에 걸린 사춘기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by 북드라망 2015. 11. 13.


자식을 남 보듯이 하세요



Q1. 백수로 지내는 스물여섯 된 아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가 아들 생각만 하면... 에휴..


아들이 대학 졸업 후에 이렇다 할 직장을 잡지 못 했어요. 자격증 시험 떨어지고 학자금을 갚겠다고 해외로 1년 동안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 왔어요. 300만원을 벌어왔더라고요. 돌아와서 그걸 영어 공부랑 면허 따는 데 다 써버렸어요. 요즘엔 알바도 힘들다고 안 하고, 밤마다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새벽에 들어와요. 혼을 내도 잔소리로만 듣네요. 전 자식이 스무 살이 넘으면 집에서 나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들한테 같이 살 거면 생활비를 내든지 그게 아니면 독립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이상한 거 아니냐며 아무리 직장을 다녀도 자기 친구들은 엄마하고 계속 같이 산다는 거예요. 저도 갈등이 되는 게, 따로 살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갈 거고, 같이 사는 게 경제적으로 이득이죠. 하지만 애랑 같이 사는 것도 힘들고…. 다 큰 아이를 지도한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제가 이 애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스님_ 우선 남 보듯 하세요. 자식은 완벽하게 나와 다른 개체예요. 유전자를 물려줄 때도 부모가 “절대 너는 나처럼 살지 마”하고 유전자를 변이시키는 것만 봐도 그래요. 자식을 남처럼 보듯 훈련하세요.


두 번째, 경제적이든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해줄 수 있는 게 있으면 하고, 그 외에 부담되는 것은 하지 마세요. 선을 딱 긋는 게 중요해요. 이때 자식에 대한 연민은 금물이에요. 제 살 길 찾아 잘 살 테니 그 다음은 걱정할 것 없어요. 호주에 다시 가든, 피시방에 가든 문제 삼지 말고, 그냥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으면 내 보내세요.


자식이라고 곁에 두고 있는 게 능사는 아니에요. 보통, 우리는 자식한테 뭘 많이 해 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예를 하나 들어보죠. 지금 밝혀진 몽유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어린 시절 부모의 과도한 보호 때문이래요. 자식의 행선지를 일일이 알고자 했던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 보니 억압이 되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그 억압된 행동이 튀어나온 게 밤에 의식이 없는 상태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습관이 된 거죠. 이것은 때가 되면 자식도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요. 사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걸 다 해줘도 그건 자식에겐 빚이거든요. 빚쟁이랑 사는 게 좋은 일이겠어요?


부모와 자식은 어디까지나 '남'이다. 물론 어느 누구보다 특별하고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 하지만 스님 말씀대로 부모 자식 관계는 특별한 '우리'가 아니라 특별한 '남'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때 비로소 우리는 부모 자식 사이의 채무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다. 빚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각자 자기 나름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Q2. 게임 중독에 걸린 사춘기 아이 때문에 속상해요

사춘기 아들이 하나 있어요. 그동안은 모범생이었는데, 그게 자기를 억눌렀던 것인지 그게 지금 터진 것 같아요. 자기한텐 인생의 목표도 삶의 의미도 없고, 게임만 있으면 된대요. 컴퓨터 앞에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통에 제가 한 달 이상 싸우다가, 방학이니까 그럼 시간을 정해놓고 게임을 하는데 효과가 별로 없네요.



스님_ 보살님이 백프로 실패할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보세요. 하루 열 시간 게임 하는 학생한테 한 시간만 하라고 하면 나머지 아홉 시간은 뭘 할까요? 아홉 시간동안 공부를 열심히 할까요? 아마 이 시간만 지나면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할 거예요. 자기를 또 억압하는 거죠. 억압된 게 풀리지 않은 상태로 이런 저런 일을 해봐도 그 인생은 별로 행복해질 수 없어요. 참았다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폭발할 수도 있죠.

요즘 게임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요즘엔 뇌를 중심으로 한 심리적 연구가 많이 되고 있어요. 옛날 농사지으며 살았던 시절엔 그런 연구가 없어서 그저 매로 다스리거나 억압하는 방식을 썼는데, 지금은 연구된 게 많으니까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부모라도 사실상 애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 아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그 심리적 사건을 엄마가 잘 모를 수 있다는 말이에요. 부모가 자란 문화적 환경과 지금 아이들이 접하는 문화적 환경은 완전히 달라요. 불과 이삼십년 차이라고 해도 서로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감안하여 연구된 다른 것을 알아보셔서 아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은 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보세요.


스님은 앞선 질문과는 사뭇 다른 조언을 해 주셨다. 앞에서는 자식에게 최대한 개입하지 말라고 했던 반면, 이번 경우에는 개입을 하되 어떤 방식으로 할지를 고민해보라고 하신 것이다. 청소년과 성인은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기엔 뇌세포의 연결고리가 유동적이다.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배선이 아침저녁으로 달라져 몹시 불안정하다. 자기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연결 고리는 경험이 쌓이고 성인이 되어서야 단단해진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부모들은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어느 정도 돌보아줄 필요가 있다. 부모는 청소년기 아이들을 그저 '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때,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게임 중독 같은 경험해보지 못 한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의 조언을 활용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Q3. 중년 여성의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제가 그동안 살아온 걸 생각해보면 별 큰 풍파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건가? 우울증이 좀 있어요. 지금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복하려고 노력을 하지만요. 40대 초반엔 제가 생각해도 좀 심했어요. 그 땐 가까운 절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어떨 땐 마음이 너무 가라앉는 것 같아 나 스스로 좀 밝아져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죠. 사주 명리학을 공부해보니 그것이 제 신체와도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았어요.


스님_ 여성은 초경 전에 일생동안 쓸 난자를 한꺼번에 만들고 난소에 저장을 합니다. 그걸 다 쓰면 배란이 끝납니다. 대부분은 50세쯤 되면 자연스럽게 완경이 되지요. 그러면 후손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여성의 존재 이유가 꼭 생산에만 있는 걸까요? 생산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여성은 살아갈 이유가 없어지는 걸까요?


저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되면 역할이 달라지는 거예요. 남자들은 여자와 달리 죽을 때까지 정자가 형성되니까 머리가 백발이 되도 헛짓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반면, 여성들은 덜 하지요. 그래서 예전부터 생활 문화적 배경이 전혀 없는 자손들에게 문화를 가르쳐 주는 일을 하는 게 여성, 특히 할머니의 역할이었어요. 그것은 다음 세대에 문화 유전자(밈)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이에요.

근데 요즘 세상은 부모 자식이 각자 떨어져 살잖아요? 그러니 중년 여성들이 생리적으로 타고난 일, 그러니까 후손에게 밈 유전자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남성보다 여성들이 우울증이 많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역할과 비슷한 일을 주변에서 찾아보세요. 감이당에 공부하러 와서 발표도 하고, 주변에 다른 여성들을 만나서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죠. 이런 일들을 꾸준히, 무리하지 않으면서 하다 보면 생득적 욕구가 충족 돼요. 우울한 틈이 없게 되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정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우울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님은 생리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우울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문제는 자신의 생리적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데 있다. 나는 이번 스님 말씀을 통해 후손에게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이 중년 여성에게 있어왔고, 그것이 생리적 욕구라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듯 생물학은 종종 생각지도 못 했던 문제들을 풀어주곤 한다.



Q4. 교회 사람들이 불편해졌어요

저는 교회를 다니는데요. 감이당 공부를 하다 보니 교회 가는 게 불편해졌어요. 특히 한국 사람들이 순결, 위생, 계몽 등 억압적인 서구의 가치들을 내면화하게 된 데에 교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교회 사람들의 태도에 반감이 생겨요. 배타적이고 편협한 것처럼 느껴지고, 목사님 설교를 들어도 마음이 불편해요.


스님_ 개종을 하세요. (^^;;) 불교라든가 천주교로 개종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예 종교에서 손을 떼세요. 모든 종교성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갖지 말라는 얘길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 그러니까 불교로 개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종교를 갖되, 내 옆에 있는 남편, 자식, 이웃을 조건 없이 좋아하는 종교를 가지세요. 일생동안 사람은 타인을 많이 만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반은 가족과 친한 이웃들이에요. 남편이나 자식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을 강도 높게 좋아하는 연습을 하세요. 단, 대가를 바래선 안돼요. 조건 없이 좋아하는 연습을 하세요.

그리고 교회가 불편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편협하다고 싫어할 것 없어요. 세상이 원체 다른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내 생각하고 같겠어요?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들을 좋아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것은 나하곤 잘 안 맞습니다."라고 할 뿐이지. 타인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면 그것이 나한테도 감정을 싣는 게 돼요. 그러니 그냥 "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하면 돼요. 물론, 과하게 모든 사람들을 다 좋아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나부터 시작해서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으로 점점 반경을 넓혀 가면 돼요.


신을 믿는 종교는 익숙하지만 주변 사람을 좋아하는 종교를 믿으라는 스님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스님은 주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게 자기 삶을 사랑하는 거라고 하셨다. 사람들과의 관계 딱 그만큼의 모습이 자기 삶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죽기 전에 자기 삶을 좋아하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은 종파를 바꾸는 개종이 아니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는 개종을 통해서 가능한 것 같다.


글/정리_신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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