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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정화스님 멘토링] 나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워요

by 북드라망 2015. 10. 12.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





Q1 : 남편이 제 말을 끊는게 싫어요.


Q_남편과 식탁에서 대화를 할 때,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남편은 제 이야기를 끊고 자기 이야기를 해버려요.


스님은 질문부터 하셨다.  “그걸 바꾸고 싶으세요?” 질문한 선생님은 “네,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이렇게 묻죠.” 하셨다. 스님은 그러면 평생을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평생 고민'이라구요? 하아..



스님의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 한마디로 남편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라는 말에, 스님은 단호하게 “아니, 아니에요. 상관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말을 자르는 것은 남편 몸에 배어 있는 관계의 특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말을 잘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특성은 남편이 엄마 뱃속에 수정란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의 배선들을 ‘안 듣게 해놓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바뀌지 않는 사람한테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계속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남편도 힘들고, 말하는 자신도 ‘내 인생은 뭐지?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빠질 수 있다고 하셨다. 사실 이 문제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남편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습성이라고 하셨다. 스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즐겁게 리액션 할 것인가를 연습해보라고 하셨다. 내 말을 자르고 자기 말을 하는 남편의 말을 즐겁게 경청하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진심을 담아 100일 동안 경청을 하면 어느 순간, 남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다고 하셨다.


그럼, 나는 왜 남편이 내 말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것일까? ‘나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아내로서의 정체성이 ‘아~ 내 인생은 살 만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의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한 것이라고 하셨다. ‘당신이 이렇게 해주면 나는 즐거운 삶을 살겠습니다.’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해주는가에 따라 내 삶의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한 것이라고 하셨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 인생이 즐겁겠다’라고 하는 순간, 내 인생의 즐거움은 자식에게 양도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내 인생을 살면서 나한테서는 아무런 즐거움을 발생시키는 요소를 만들어 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하셨다. 남편이 나를 즐겁게 해야 되고, 자식이 나를 즐겁게 해야 된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 안에서 즐거움이 생길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즐거움을 남에게 양도해놓고 인생을 굉장히 훌륭하게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면 틀림없이 나를 즐겁게 해주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남편과 자식한테 수십 년 공을 들여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열 번을 잘해도 부모 눈에는 열 번 모두 들지 않는다. 부모의 눈(조건)에 들어야 예쁜 것이다.  


래도 할 말은 꼭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연서를 쓰듯이 남편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쓰지 말고 ‘나는 당신을 만나서 인생이 즐거워요’라는 것에 방점을 팍팍 찍는 내용들을 쓴 다음,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라는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짤막하게 적으라고 하셨다. 이렇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 기분 좋은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꽃미남 배우에게 편지를 쓴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스님은 꽃미남은 아무리 좋아해줘도 밥 한 끼 못 얻어먹지만 남편에게 이렇게 공을 들이면 점점 달라지는 남편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Q2 : 저는 왜 남편도, 사람들도 다 미울까요.


Q_저는 남편이 말을 걸까봐 너무 무서워요. …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 미워하는 사람들이 남편을 비롯해 다 혈연들이에요.



이번 질문을 해주신 선생님은 남편이 말을 걸까 봐 그것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집에 남편이 있는 것을 알면 일부러 늦게 들어가 마주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내 삶을 이렇게까지 지배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저렇게 결혼하게 됐던 과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끝에는 ‘아, 나는 왜 태어났지?’ 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고, 이것을 매번 반복하는 자신의 심리상태가 너무 싫다고 하셨다.


스님은 “부모님은 살아계십니까?”라고 물으셨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구요. 어머니는 그냥 살아 계신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제가 왕래를 안 하거든요. 엄마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분노가 확 솟아나요. 이런 내 자신이 또 너무 싫어요”라고 하셨다. 또, 남편이 나에게 그렇게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잘못한 일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남편을 미워하는 것을 공감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스님은 “그 남편을 안 만나고 다른 남자를 만났어도 똑같습니다. 또한 그 남편분도 보살님을 안 만났어도 보살님과 똑같은 여자를 만났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자기심리코드가 상대를 그렇게 보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서, 혹은 그 사람이 나를 만나서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제일 먼저 풀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묘 앞에 서서 자신이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하라고 하셨다. 좀 시간이 오래 걸려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 이후에야 다른 실마리가 보인다고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살아계신 분은 열 번을 하면 한 번의 메아리가 돌아와서 뭔가 풀리지만, 돌아가신 분은 내 안에서 메아리가 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방법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니,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기분이 ‘업’ 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뜀박질을 한다든지, 즐겁게 노래를 부른다든지 해서 분노와 우울한 상태로 가는 자신을 빨리 정지시켜야 한다고 하셨다.  




Q3 :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쉽게 끊어버립니다.


Q_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잘 삐져요. 절실하게 친하게 지내다가도 뭔가 감정이 한번 상하면 관계를 끊어 버려요.


이번 선생님은 사람들과 너무 밀착해서 잘 지내다가 갑자기 삐지면 완전히 등을 지게 된다고 하셨다. 이런 식으로 여기에서 깨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해왔다고 하셨다. 지금 암 치료 때문에 몸이 힘든데도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삐져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고 하셨다.



스님은 “여기 있는 분들도 다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어요”라고 하셨다. 왜냐면 칭찬 받기를 전부 다 외부로(남에게) 돌리기 때문에, 내 안에 그것에 대한 불만족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쌓아왔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편지 내용은 ‘내가 이래저래 사느라 고생했구나, 이렇게 저렇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와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자기스스로를 칭찬하는 편지를 오래 쓰라고 하셨다. 이것은 밖에서 아무리 찾아봐야 밖에서는 구해지질 않는다고 하셨다. 이때는 내 자신이 내 밖에서 나를 칭찬하는 글을 계속 써서 스스로 폭을 넓히라고 하셨다.  


잘해줬던 사람하고만 있으면 ‘정말 잘해줬다’라는 감정만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틀어지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잘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고 반응한다. 이것이 폭이 좁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하셨다. 이런 사람들은 올인하듯 상대에게 잘해준다. 그러다 상대방이 혹 멀어지거나 점점 부담스러워 한다거나 싫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너를 위해서(정말 상대를 위해서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했는데’ 하는 반사가 커지면서 꼴도 보기 싫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교우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좁고 긴밀하게 맺는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를 좁고 아주 얇게 가지는 경험을 계속하다 보면, 점점 자신의 감정을 닫아가다 40, 50대가 되면, 그야말로 우주에 홀로 서있는 존재처럼 되어버린다고 한다.


스님은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지적이거나 논리적인 이유를 살피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다. 감정은 신체의 많은 부분에 무의식적으로 축척되어 있기 때문에 다스리기가 훨씬 어렵다고 하셨다. 감정의 역사가 생명체에게 오래되고 깊으며, 아주 강한 의식의 수단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셨다.


외부의 어떤 자극도 없을 때는 마음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 싶은데, 어떤 감정으로 자극만 조금 받으면 확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어느 선생님의 질문에 스님은 “안 변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내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 물러설 힘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하셨다. 지금 우리의 상태에서는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그냥 배고픔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보는 훈련을 하라고 하셨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죽은 시체나 다름없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우리는 그 감정에 가치판단을 붙인다고 하셨다. 우리가 배고픔에 가치판단을 붙이는가? 배고픔은 가치판단이 아니다. 감정도 이렇게 볼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가치판단 없이 감정을 볼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Q4 : 나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워요.


Q_저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그러지는 않는데 저 스스로 저를 힘들게 해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는 이해 못하는 상황에서 저 혼자 나가떨어지고, 이렇게 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가 원망스럽고…. 이런 식으로 아이들, 남편 그리고 가족들, 친구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번 질문의 선생님은 주변 사람들한테 너무 완벽하려고 한다, 자존심이 강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하셨다. 어떤 일을 생각할 때나 결정할 때도, 누구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지만, 막상 일을 하고 난 후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완벽하게 잘 하지도 못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잘하지 못하면서 왜 자꾸 내 감정만 추구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이런 마음이 몸에 병으로 나타나 뭘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셨다. 점점 주변에 원망이 쌓이면서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 있게 한다고 했던 것들을, 누군가가 와서 가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고 하셨다. 소화시킬 수 없을 만큼 먹어서 위장에 문제가 되듯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만큼 잘하려고 하지만 결국 소화를 시키지 못해 꽉 막혀 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고 하셨다.


스님은 우선 자기 자신한테 “너는 착한 딸이 아니어도 괜찮아. 너는 착한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아. 너는 착한 아내가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라고 하셨다. 살아오는 과정 중에서 자기한테 이런 것들이 강력히 요구되었는데 이런 요구가 자신에게 충족이 되지 않아 원망하는 마음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에 기본적인 맥락은 ‘착한 딸이고 싶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착한 딸’은 적당한 착한 딸이 아닌 상당히 ‘강력하게’ 착해야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쁜 것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지만, 어떤 사람은 너무 나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착한 사람들이 있다. 너무 나쁜 것도 병이요, 너무 착한 것도 병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다가는 몸에 병이 들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착하게 살려고 하니 생각이 많아지고, 무의식적으로 착하게 되도록 안에서 계속 생각을 굴리게 된다고 하셨다.  


위장을 옛날사람들은 ‘생각 사(思)’ 자를 써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하셨다. 머리에 생각을 많이 하면 일차적으로 연결된 코드가 위라고 하셨다. 꼭 생각을 많이 해서라기보다 무의식적으로 나를 그렇게 맞추도록 되어 있으면 삶이 힘들어지는 부분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속이 딱 멈춰버리게 된다고 하셨다. 젊었을 때는 위장이 이런 상황에도 어느 정도 돌아갔지만 나이가 들면 그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지나치게 좋은 딸,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 충분히 좋은 딸이고 좋은 엄마이며, 좋은 아내이니까 적당히 줄여서 누가 뭐라고 말을 하면 ‘아, 내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있구나’라고 빨리 생각을 하고, “내가 너무 그렇게 살지 않았어도 되는데 너무 그렇게 살았구나”라고 자신에게 말을 해주라고 하셨다.  그러면 문제가 풀린다고 하셨다.


분노와 우울의 상태로 가는 나를 멈추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어느 생물학자가 ‘살아있는 유기체란 무엇인가?’라고 할 때 ‘불안정성과의 화해’라고 했단다. 안정되어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구조자체가 안정될 수 없는 조건이란다. 안정된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른 조건이 카오스처럼 와서 나를 덮치기 때문에 자기를 흔들어 안정되지 않는 상태로 화해해 가는 것이 생물에 삶의 조건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과 화해해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여기서 화해란 자기를 바꿔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시공자체가 불안정성으로 계속 흔들리니까 거기에 나를 맞춰 계속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다. 마치 관성에 의해 달리다가 멈추게 되면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균형을 맞추듯이 말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생물체 중에 변이하지 않은 생물체들은 99.9% 전멸했다고 한다. 이것을 봐도 인간은 얼마나 화해(변이)를 잘하면서 살아왔는가. 인생을 즐겁게 살기위해 우리도 지금 그 자리에서 ‘불안정성과의 화해’를 시도해보자.
  


글/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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