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와 생명체, 그 균열과 연결의 이중주 (1)
『필경사 바틀비』는 『모비딕』의 작가로 더 알려진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이다. 1851년 출간된 『모비딕』과 후속작들이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출판사에 화재가 나서 그의 모든 작품이 불타 버렸다. 멜빌은 절박한 마음으로 『필경사 바틀비』를 쓰기 시작한다. 시련은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보게 한다. 세상에 던져져 있지만 큰 벽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 『필경사 바틀비』는 그러한 단절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9세기 중반의 월가(Wall Street)는 실제로 큰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원주민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세워진 이 벽이 월가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바틀비의 책상이 있는 창가도 오래된 벽에 막혀 항상 그늘져 있었다. 중첩된 벽들 안쪽에 자리한 바틀비의 조그만 책상, 거기가 더 이상 출구가 없었던 멜빌 자신의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바틀비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필경사’로 취직한다. 타자기도 없던 시절, 손으로 문서를 작성하는 인력이 필요했다. 그들을 필경사라 부른다. 변호사는 창백하고 쓸쓸해 보이는 ‘바틀비’라는 한 젊은이를 필경사로 고용하고 그를 자신의 소리가 쉽게 전달될 수 있는 자리에 두었다. 필경사는 필사 외에도 문서를 검증하거나 변호사를 도와 자잘한 일을 하곤 했다. 바틀비는 거의 점심도 먹지 않고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그러나 문서를 검증하자는 변호사의 지시에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허먼 멜빌, 공진호 옮김,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9쪽)라고 대답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 신입직원의 도발에 변호사는 충격을 받았으나 그가 말뜻을 잘못 알아들은 줄 알고 다시 바틀비에게 같은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자 바틀비는 다시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이런 사건은 그 후에도 다시 벌어졌다. 모든 직원들이 모여 필사한 문서를 검증하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안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직원들은 분개했고 변호사가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변호사는 애써 스스로에게 이해를 시켰다. 그가 악의가 없고 가엾은 사람이라고. 또한 관대하지 못한 고용주를 만나면 그가 굶어죽을 것이므로 그를 이해하는 것이 내 양심에 달콤한 양식이 될 것이라고.
변호사는 그 후 더 이상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바틀비가 “저는 필사하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99쪽)라고 선언하고 나서도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도 않고 사무실을 떠나지도 않는 이 이상한 직원의 선언이 변호사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동정심이 생겨 그에게 엿새의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거처를 구해주고 빈손으로 나가지 않도록 돕겠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바틀비는 엿새가 지난 후에도 계속 사무실을 지키며 일도 하지 않고 온종일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 전대미문의 곤란한 상황에서 다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그를 떠밀어 내쫒는 짓은 할 수 없었다. 험한 욕을 하며 쫒아내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을 부르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주검이나 다름없는 그가 나에 대해 승리감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책, 66쪽
변호사는 결국 사무실을 옮겼다. 다행히도 바틀비는 새로 옮긴 사무실에 따라오진 않았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 사무실에 입주한 다른 변호사가 찾아왔다. 거기 두고 온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변호사는 책임을 회피했고 바틀비를 떠안게 된 그 변호사는 그를 사무실에서 강제로 퇴출시켰다. 그러자 바틀비는 건물 계단을 점거했고 건물 세입자들에게 매우 성가진 존재가 되었다. 변호사는 다시 바틀비를 만났다. 다른 일을 알아봐주겠다고,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바틀비는 여러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아뇨.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그 일을 하면 너무 많이 갇혀 있게 돼요. 아뇨, 저는 점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하지 않아요.”(80쪽)
사회는 약속된 시스템이다. 규율과 제도가 약속되고 사회 구성원들은 그것을 내재화한다. 내재화된 규율은 신체를 자동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월가의 구성원들은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내재화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고용된 사회인은 출근 시간에 맞춰야 하고 보수에 맞는 교환가치를 생산해내야 한다. 내재화된 규율은 자동으로 그 요구에 따르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사회 시스템과 개개인에 내재된 프로그램 안에는 바틀비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회로가 없다. 사무실의 한쪽 구석의 책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고용자의 요구에 맞는 자신의 노동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일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출근 하거나 사유건물의 계단을 점거하는 것은 시스템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다. 내재된 프로그램은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공유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권력 사용을 시스템의 대표기관에 위임했다. 사법과 경찰권 등의 강제적인 힘이 그런 예이다.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내재된 규율권력을 유지하려는 뿌리에는 행복에 대한 인간적인 욕망이 잠재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강제하고 규율하는 프로그램은 행복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존재 안에는 내재화된 규율과 통치에 저항하는 또 다른 벡터의 힘이 있다. 그것은 질서에 저항하는 힘이고 규약을 파괴하는 힘이며 문명을 새로운 야생으로 만드는 힘이다. 아감벤은 이런 힘의 주체를 ‘생명체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 생명체들의 야생적 몸짓과 담론을 포획하고 규정하며 제어하려는 힘을 ‘장치’(아감벤은 미셀 푸코가 이미 사용했던 장치라는 개념을 확장시켰다)라 불렀다. 즉, 앞서 언급했던 내재화된 초월적 규율 권력이 바로 장치다. 장치는 인간의 동물적 생명력을 문명의 인간화로 바꿔놓는다. 이 과정에서 생명체는 자연과 분리된다. 자연은 인위적으로 규약된 질서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자연에게 부여된 유일한 질서는 늘 변이한다는 것이다. 규정된 질서가 카오스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르자면 매순간 변이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스템의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장치의 유지를 위해서는 자연에서 분리되는 수밖에 없다. 이는 장치가 “생명체를 그것이 환경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에서 분리한다”(조르조 아감벤, 양창렬 옮김, 『장치란 무엇인가』, 난장, 37쪽)는 아감벤의 주장과도 통한다. ‘환경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란 ‘자연과의 직관적 연결’을 뜻한다. 언어적 논리가 배제된 자연과의 직관적 연결은 동의보감의 의학적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직관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질병 치유가 시작된다. 바꿔 말하면 질병은 이 연결성이 배제될 때 일어난다.(안도균, 『동의보감, 양생과 치유의 인문의학』, 작은길[근간] 참조) 그런 점에서 장치에 저항하는 ‘생명체들’의 힘은 우리 안에 내재된 모든 권력 장치를 병리적인 시점에서 진단하게 하는 내적 혁명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리고 내적 혁명이 인위적이고 억압적인 장치를 극복하는 처방을 만날 때 생명체는 자연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직관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질병 치유가 시작된다.
바틀비는 월가의 시스템과 그 욕망이 내재된 장치에 가장 이질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저항한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저항은 이미 대비되어 있다. 월가가 원주민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세운 벽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언변으로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일도 없다. 그의 행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동경과 희망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만일 사람들에게 새로운 욕망의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은 매우 클 것이다. 시스템의 붕괴는 대개 내부 구성원들의 욕망이 달라졌을 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그런 맥락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틀비는 그런 영향력을 주지도 못한다. 다만 동정과 연민을 일으킬 뿐이다. 때문에 이 사회의 구성원들 입장에서는 바틀비가 시스템을 붕괴시킬 위험인물일 리가 없다. 변호사가 강제로 내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이사를 가게 된 것도 그 존재감이 너무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의 태도에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데가 있었다면, 나는 필시 그를 난폭하게 사무실 밖으로 내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실제로는 소석고로 만든 창백한 키케로 흉상을 내 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필경사 바틀비』, 30쪽)
바틀비의 이런 이질적이고 이상한 저항은 구치소에서 극단에 이른다. 격노한 건물주는 결국 바틀비를 구치소에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았다. 변호사는 구치소 관리에게 최대한 관대하게 구금해줄 것을 부탁하고, 취사를 담당하는 교도관에게는 은전을 쥐어주었다. 취사 담당 교도관은 바틀비에게 좋은 식사를 제공하려 했으나 바틀비는 거절했다. “나는 오늘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속에서 받지 않을 겁니다. 저녁식사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요.”(같은 책, 88쪽) 변호사가 다시 구치소를 찾았을 때 바틀비는 안마당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 변호사는 바틀비가 죽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바틀비의 눈을 감겨주었다.
바틀비는 사회의 모든 현장의 어떤 시스템적인 질서에도 섞이지 않았다. 도심 한 복판에서도, 감방 안에서도 그의 저항은 매우 이질적인 방식으로 아무런 영향력 없이 일관되었다. 하지만 단 한사람, 변호사에게만큼은 미미한 존재가 아니었다. 변호사는 바틀비의 어법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최근에 딱히 적절하지 않은 온갖 경우에 나도 모르게 ‘택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 들었다. 그 필경사와의 접촉이 이미 내 정신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로 인해 더욱 심한 다른 비정상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같은 책, 55쪽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내재된 장치는 바틀비라는 존재에 강력하게 대항하지 못했다. 짜증이 나긴 했지만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 놀라운 우위에 다시금 복종”(66쪽)할 수밖엔 없었다. 급기야 그는 그것이 운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는 그 필경사와 관련된 걱정거리들이 모두 영겁의 세월 전부터 예정되었으며, 바틀비는 전적으로 지혜로운 신의 어떤 신비로운 뜻에 따라 나와 함께 살도록 숙사를 배정받았다는 확신에 점차 빠져들었다.
같은 책, 71쪽
운명에 대한 확신과 고뇌는 자연과 접속하는 입구로 안내한다. 자유의지가 외재적인 힘과 내재화된 장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연은 한 걸음 가까이 와있다는 걸 알게 된다. 존재는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안팎으로 연결된 여러 힘들과의 관계가 존재의 삶과 운명을 이끈다. 그 힘은 ‘외부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기운’으로까지 확장해서 해석해야 한다. 나를 둘러싼 외부 혹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인 존재로써 주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운명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의 그런 사유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보다 더 확장되고 일반화된다. 이로써 바틀비의 미미한 저항은 변호사의 장치에 균열을 내고, 그가 생명체로서 자연과 접속하고 연결하는 데 기여하게 된 셈이다.
바틀비의 미미한 저항은 변호사의 장치에 균열을 냈다.
변호사 개인의 장치에 생긴 균열은 시스템 전체로 따지면 극히 미약하다. 그러나 그가 시스템 내의 전형적인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작은 균열이 가져올 효과는 의외로 클 수 있다. 전형적인 구성원은 조직의 표준이 된다. 표준 밖의 존재가 행하는 이적은 갈채나 탄성의 대상이 될 뿐이지만, 표준 안에서 일어나는 전변은 질투와 욕망의 변이로 이어지기 쉽다. 쉽게 말해 같은 처지의 사람이 창의적인 도약을 시도했을 때의 파급력은 크다. 이런 효과는 시스템 전체의 붕괴나 변혁의 물고를 튼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적 과제로 선택해야 할 삶은 어떤 것일까? 바틀비 쪽인가 변호사 쪽인가.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바틀비는 생존을 버리면서까지 미미하지만 중심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키는 잠재적 씨앗을 제공하고 떠났다. 그래서 바틀비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해석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바틀비는 그런 비장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행동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는 다만 점원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고, 시스템 안에 갇혀 있기 싫었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욕망은 어떤 인위적인 장치도 거부한 채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 의지가 외부의 힘과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자연스럽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자연의 만물은 반드시 외부의 힘과 섞여서 존재하는 카오스적인 조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바틀비는 타자에게 이질적인 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데서 자연 친화적일 수 있지만 정작 그는 스스로를 타자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점에선 자연과 배타적인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순수한 영웅적 이적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실천이 되지 못한다.
변호사의 경우는 동정과 배려라는 속물적인 양심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사회 구성원이었지만 바틀비를 만나면서 이질감을 내면화하고 기존의 장치에 잠재된 균열을 만들어간다. 그 균열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이었지만 변호사는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라고 외치면서 그 균열을 세상과 함께 나눠야 할 몫으로 열어 놓는다. 이렇게 ‘나’는 이질성을 받아들인 뒤 거기서 생긴 균열을 공유함으로써 포획된 장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시에 생명체로서 자연과의 무매개적인 연결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과제는 바틀비가 아니라 변호사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바틀비의 역할을 누가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마주치는 모든 존재는 다 이질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재화하는 시도에서 기존의 장치에는 균열이 생긴다. 바틀비는 도처에 존재한다. 다만 너무 미미해서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이어지는 병법과 방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글_도담(안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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