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결단이 필요한 순간 - 택천쾌

결단이 필요한 순간, 택천쾌




택천쾌(澤天夬) 괘를 앞에 두고 서두를 어떻게 쓸지 망설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한순간을 소개할지, 요즘 핫한 TV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을 삽입할지,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개할지 갈팡질팡한다. 어디 이것뿐이랴.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를 감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밥을 먹어야 할지, 빵을 먹어야 할지….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사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세태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등장했다.


“제가 결정장애라서요. 이 옷과 저 옷 중에 뭐가 괜찮은가요?”

“제가 선택장애라서요.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


‘뭘 저런 걸 다 물어보나’ 싶다.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때마다 자신의 결정을 보류하고 물어봐야 한다면 참 피곤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결정장애’ 혹은 ‘선택장애’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이면 ‘시대의 병증’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찾아봤다. ‘결정장애’ 혹은 ‘선택장애’가 뭔지.


선택장애: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고르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뜻하는 신조어. 비슷한 표현으로 결정장애라는 신조어도 있다.


그렇다. 많은 사람이 일상의 순간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정의 어려움, 선택의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심리적으로 괴롭고, 장애에까지 이를 정도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것은 심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적 문제까지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의 힘은 나의 의지를 발휘하는 데서 나온다. 의지는 맺고 끊는 힘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신체! 이보다 무력한 신체가 있을까. 이 무력하고 후진 신체에 결단을 요구하는 괘가 있다. 택천쾌가 그것이다.


오른쪽으로 가는 게 맞나?


(夬)는 ‘결단할 쾌’로서 결단한다는 뜻이다. 왜 결단하는 쾌가 될까? 택천쾌의 괘상은 위에 음이 달랑 하나 있고, 그 밑에 다섯 양이 주르륵 있는 모양이다. 양이 다섯이나 있으니 그것이 올라가 마지막 남은 음을 결단한다. 하나의 음을 결단하고 나면 전체 괘는 하늘괘인 중천건이 된다. 괘가 모두가 양인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군자의 시대요, 군자가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된다. 그런 시대를 위해 음 하나를 결단해야 한다.


공자는 「서괘전」에서 ‘더함을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결단이 난다.’고 하였다. 익(益) 괘 다음에 쾌(夬) 괘를 놓은 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반드시 결단이 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떤 것을 결단하지 못하는 ‘결정장애’는 모든 것을 만족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 상황에서 둘을 견주어 어떤 것이 이익일까 따지다 보니, 쉽사리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못한다. 결단의 이면에는 이득을 따지는 마음, 하여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택천쾌 괘사


夬 揚于王庭 孚號有厲(쾌 양우왕정 부호유려)

쾌(夬)는 왕의 뜰에서 드날림이니, 미덥게 부르짖되(호소하되) 위태롭게 여기느니라.


告自邑 不利卽戎 利有攸往(고자읍 불리즉융 이유유왕)

읍으로부터 고함이요, 군사에 나아가는 것이 이롭지 아니하며, 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라.


彖曰 夬 決也 剛決柔也 健而說 決而和(단왈 쾌 걸야 강결유야 건이열 결이화)

단전에 이르길 쾌는 결단하는 것이니, 강(剛)이 유(柔)를 결단함이니, 굳세며 기뻐하고, 결단하여 화합하니라.


揚于王庭 柔 乘五剛也(양우왕정 유 승오강야)

‘양우왕정(揚于王庭)’은 유(柔)가 다섯 강을 타는 것이요,


孚號有厲 其危 乃光也(부호유려 기위 내광야)

‘부호유려(孚號有厲)’는 그 위태함이 이에 빛남이요


告自邑不利卽戎 所尙 乃窮也(고자읍불리즉융 소상 내궁야)

‘고자읍불리즉융(告自邑不利卽戎)’은 숭상하는 바가 이에 궁하게 됨이요,


利有攸往 剛長 乃終也(이유유왕 강장 내종야)

‘이유유왕(利有攸往)’은 강한 것이 자라서 이에 마치게 되리라


象曰 澤上於天 夬(상왈 택상어천 쾌)

상전에 이르길 못이 하늘에 오르는 것이 쾌(夬)니


君子 以 施祿及下 居德 則忌(군자 이 시록급하 거덕 칙기)

군자가 이로써 녹을 베풂이 아래에 미치며, 덕에 거하여 꺼림을 법하느니라.


결단하는 쾌 괘에서 결단해야 할 것은 상육이다. 음이지만 제일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직 세력이 강하다. 음이라고 소소하게 보거나 하찮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상육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왕정, 곧 왕의 뜰에서 결단하라고 한다. 택천쾌에서 구오는 왕의 자리이므로 왕정에 해당한다. 왕정에서 상육의 결단을 온 백성이 납득할 수 있도록 낱낱이 고하여야 한다. 그렇게 백성들의 호응을 얻은 뒤에 상육을 결단하라는 것.


백성의 호응과 지지를 얻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상육을 결단하려고 하면 피를 흘리는 전쟁을 해야 한다. 헌데 지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이롭지 않다. 그러니 읍으로부터 고하라는 것. 읍(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사람의 도읍지는 심금, 즉 마음이다. 몸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므로 먼저 마음으로부터 고해서, 그동안의 어지러운 사회를 전부 각성하라는 것. 자기로부터의 각성, 결단은 통절한 자기반성에서 나아갈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양이 맨 위까지 올라가서 결단을 냄으로써 결국은 강한 양으로 끝을 이루니 새 시대가 열린다.

 

 

택천쾌를 괘상으로 정리하면, 택천쾌의 내괘는 하늘괘로서 굳세고 모두가 강하다. 외괘인 못괘는 말하고 웃고 즐기고 기뻐한다. 안으로는 마음이 강건하고 굳세면서도, 밖으로는 모두에게 기쁘게 대한다. 택천쾌의 결단은 강건한 하늘괘로서 결단을 하되, 웃고 즐기는 못괘로서 화(和)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비록 제일 윗자리에 있는 상육을 결단하지만 바르게 결단하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택천쾌 효사


初九 壯于前趾 往 不勝 爲咎(초구 장우전지 왕 불승 위구)

초구는 앞 발꿈치에 장함이니, 가서 이기지 못하면 허물이 되리라.


象曰 不勝而往 咎也(상왈 불승이왕 구야)

상전에 이르길 이기지 못하면서 가는 것이 허물이라.


결단하는 마당에 초구의 양은 이제 처음 나와 그 힘이 아주 약하다. 그런데도 맨 윗자리의 상육을 결단하려고 발꿈치를 들먹거린다. 초구의 힘이 겨우 발꿈치에 있는데 그것만 믿고 상육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다. 이기지 못하는데 가는 것은 허물이 될 수 있고, 이기지 못한다고 가지 않는 것도 허물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결단하는 때에 초구는 돌격대장의 역할을 자처하기 쉽다. 결단하려고 나서지만, 결단을 해야 할 상대를 알지 못한다. 상대를 알지 못하는데 나서는 것은 허물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무모한 행동이다.


九二 惕號 莫夜 有戎 勿恤(구이 척호 모야 유융 물휼)

구이는 두렵게 부르짖음이니, 날 저문 밤에 군사가 있더라도 근심치 말지로다.  


象曰 有戎勿恤 得中道也(상왈 유융물휼 득중도야)

상전에 이르길 ‘유융물휼(有戎勿恤)’은 중도(中道)를 얻었기 때문이라.


구이는 비록 아래에 있지만 양으로 강하고 내괘에서 중을 얻었다. 하지만 구이는 초구처럼 자신의 힘만 믿고 상육을 업신여기고 마구 가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백성의 호응을 얻고자 두려움에 떨며 호소한다. 상육을 결단하려고 하니 나의 호소를 들어달라고, 나에게 호응해달라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이렇게 구이가 ‘척호(惕號)’를 하니 비록 날 저문 밤에 상육의 군사가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근심할 필요가 없다. 구이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고 구이에 호응해서 모두 같이 싸우기 때문이다. 이렇게 싸워줄 사람이 많은 것은 구이가 힘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괘에서 중을 얻었기 때문이다. 중도를 실천하는 구이, 민심도 얻고 상육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까닭도 없다.


중도를 실천하라.



九三 壯于頄 有凶 獨行遇雨 君子 夬夬(구삼 장우구 유흉 독행우우 군자 쾌쾌)

구삼은 광대뼈에 장해서 흉함이 있고 홀로 행하여 비를 만나니, 군자는 결단할 것을 결단하는지라.


若濡有慍 无咎(약유유온 무구)

젖는 듯해서 성냄이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君子 夬夬 終无咎也(상왈 군자 쾌쾌 종무구야)

상전에 이르길 ‘군자 쾌쾌(君子 夬夬)라’ 마침내 허물이 없느니라.


구삼은 결단해야 하는 상육과 응하고 있다. 『주역』에서는 양효가 음효를 만나는 것을 비로 표현하는데, 구삼의 양이 상육의 음을 만나니 비가 내린다. 이렇게 구삼이 상육과 응하여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 구삼이 처신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육을 보호해주면 흉하다. 그러니 결단할 것은 결단하라는 것. 결단할 상대는 상육이고, 결단해야 하는 주체는 구삼이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때, 결단할 것을 결단하는 것만이 허물이 없다.


九四 臀无膚 其行次且 牽羊 悔 亡(구사 둔무부 기행자저 견양 회 망)

구사는 볼기에 살이 없으며 그 행함이 머뭇거리니, 양을 끌면 뉘우침이 없으련마는


聞言 不信(문언 불신)

말을 듣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로다.


象曰 其行次且 位不當也 聞言不信 聰不明也(상왈 기행자저 위부당야 문언불신 총불명야)

상전에 이르길 ‘기행자저(其行次且)’는 위(位)가 당치 않음이요, ‘문언불신(聞言不信)’은 귀밝음이 밝지 않음이라. 


구사의 자리는 원래 음의 자리인데 양이 왔다. 유약한 자리인 만큼 구사가 아무리 양이라 하더라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외괘의 못괘는 동물로는 양을 나타낸다. 양은 고집이 센 동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양의 속성을 알아서 우격다짐으로 하지 않고 슬기로운 방법을 쓰면 후회가 없는데 그런 방법을 잘 쓰지 못한다. ‘견양’은 ‘양을 잘 몰듯이 슬기로운 방법을 쓰라’는 말이고, ‘회망’은 구사가 상육을 결단함에 있어서 쉽게 나서지 못하여 후회될 일이 있으니 후회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양을 잘 몰듯이 슬기로운 방법을 쓰라.



헌데 여러모로 구사는 결단하기 어려운 형국에 있다. 외괘인 못괘에서 구사가 변하면 감중련 물괘가 된다. 물은 흘러내리면서 소리가 나는데 이를 따서 물괘를 말(言)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본래 못괘는 그 상으로 보면 귀의 고막이 막힌 상이다. 하여 구사는 말로 일러줘도 고막이 막힌 상태라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허나, 구사는 포기하지 말고 느려도 천천히 무리를 이끌어야 한다. 결단하는 괘에 결단하지 못하면 후회만 남을 뿐이다.


九五 莧陸夬夬 中行 无咎(구오 현륙쾌쾌 중행 무구)

구오는 현륙을 결단하고 결단하면 중(中)을 행함에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中行无咎 中未光也(상왈 중행무구 중미광야)

상전에 이르길 ‘중행무구(中行无咎)’나 중(中)이 빛나지 못함이라.


구오는 양이 양자리에 있으니 제자리에 있어 바르다. 또 외괘에서 중을 얻어 중정한 상태이므로 다른 때 같으면 참 좋은 자리다. 허나 지금 구오는 바로 위에 있는 상육을 결단해야 할 위치에 있으므로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구오가 상육과 이웃하는 관계이므로 상육의 물에 흠뻑 젖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상육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친다.


구삼이 상육과 응하는 자리여서 어려움이 있듯이, 구오 역시 중도를 행하기가 어려운 처지다. 구오가 음을 결단하는 주체임에도 상육과 친하여 연연해한다. 리더인 구오의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 통솔력은 결단할 것을 결단하는 데서 나온다. 따라서 구오의 결단은 쾌 괘 전체를 판가름한다. 구오의 결단을 비유하자면 사회나 인류, 생명차원으로 뻗어간다.


쾌 괘가 속한 시공간은 3월이다. 모두가 음인데 동짓달에 양이 하나 생기고, 섣달에 양이 하나 더 생긴다. 이렇게 양이 생겨 3월이 되면 양이 다섯 개가 된다. 3월이 되면 땅속에 있던 것들이 땅 밖으로 나온다. 움츠려 있던 것들이 모두 나와 완전히 새로운 때를 만나는 것이다. 화창한 봄 날씨에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 호시절이 된다. 하여 어려움 속에서 내린 구오의 결단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세상의 탈바꿈은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上六 无號 終有凶(상육 무호 종유흉)

상육은 호소할 데가 없으니, 마침내 흉함이 있느니라.


象曰 无號之凶 終不可長也(상왈 무호지흉 종불가장야)

상전에 이르길 ‘무호지흉(无號之凶)’은 끝까지 길지 못하니라.


상육은 음이 홀로 위에 처하여 나아갈 바도 없고 호소할 데도 없다. 음이 세도를 얻어 위세를 떨치다가 이제 종말의 때를 맞이한다. ‘일란일치(一亂一治)’라고 했던가. 다시 양이 다스리는 세상이 온 것이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음. 백척간두진일보의 결단이 그 존재를 살린다. 나아갈 바도 호소할 데도 없는 상태에서의 결단은 죽음이 아니라 살기다. 흉함은 잠깐, 새로운 세상에서 살기는 계속된다. 그러니 상육이여, 기꺼이 백척간두진일보하라!


‘결정장애’ 혹은 ‘선택장애’에 걸린 분들에게 택천쾌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결단을 앞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더 이득일지 따져보는 ‘영악한 머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라는 ‘용감한 마음’이다. 택천쾌는 때에 따라 결단할 것을 종용한다. 나의 결단을 보류하지 않을 때 삶은 나아간다. 그것이 비록 허물이고, 흉할지라도 새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매 순간 창조되는 살기다. 그러니 매 순간 결단하라. 나의 결단이 시공간을 주도하리니. 결단이 필요한 순간, 결단할 용기! 택천쾌로부터 배우자.



글_이영희(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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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조아하자 2015.06.05 22:13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사실 현실에서는 선택을 하지 않고 머뭇거려도 결과적으로는 한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는 경우가 많죠. 나는 변하지 않아도 주위 환경은 계속 변하고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계속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 북드라망 2015.06.08 10:16 신고 수정/삭제

      네, 그럴 수 있지요. 그렇지만 결단하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