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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바치는 애끓는 참회기 꺼진 SF도 다시 보기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바치는 애끓는 참회기 참회의 여정이 시작된 건 어느 오후의 한담에서였다. 친구가 여상히 던진 질문에 ‘몰라’라고 눙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달까. “아아, 보르코시건 시리즈?”질문을 들은 나는 나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가, 시차를 두고 천천히 뜸을 들이며 되물었다. 단 세 개의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안다는 투로 두 번째 음소를 높여 길게 끄는, ‘아아’ 같은 추임새는 넣지 말걸. 그냥 통째로 모르는 척 할걸. 어조에 시큰둥함을 묻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됐네. 그나저나 이 단어가 맞나? 보르‘코시’건? 보르‘시코’건 아니고? 헷갈려라. 사실 구태의연한 되물음 자체가, 할 말을 짜낼 시간을 벌기 위한 연막이었다. 이러쿵.. 2018. 7. 25.
내가 겪는 슬픔은 누구나 겪는 슬픔이다. 억울할 게 없다. 내가 겪는 슬픔은 누구나 겪는 슬픔이다. 억울할 게 없다. 나는 이렇다 할 '신앙'이 없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느낌으로 믿는 바들이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 인생이 남들에 비해 특별히 행복하거나, 특별히 불행하지 않다는 믿음이다. 부자나 빈자나, 아프리카의 유목민이나 유럽의 작가나, 중국의 농부나 한국의 직장인이나, 만족에서 불만족을 빼거나 불만족에서 만족을 뺐을 때, 나오는 결과가 그렇게 크지 않은 범위에서 대채로 비슷비슷하리라고 믿는다. 아무 근거가 없다. 믿음일 뿐이니까. 이런 믿음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유용한 점이 많다. 예를 들어, 인생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수없이 많은 괴로움들을 겪을 때, 겪어야 하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기가 조금 쉬워진다. 그렇다. '겪어야 할' 괴로움으로 당면한.. 2018. 7. 24.
들뢰즈,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대중은 속았다'로는 부족하다 들뢰즈,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대중은 속았다'로는 부족하다 적敵, 혹은 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사로잡히는 하나의 가상이 있다. '정권이 언론을 장악하고, 대중들은 거기에 속고, 속아서 지지하고, 그리하여 적들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다'는 식의 가상이다. 이 가상은 합리적이고, 선하고, 훨씬 더 공정한 비전을 제시하는 '우리측'에 비해서 전근대적이고, 악하고, 극도로 부패한 적들의 지지율이 언제나 높은 이유를 스스로 납득해야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여기에 투표로서 이른바 '민의'를 '대의'한다는 '대의민주주의'의 정식까지 들어와 버리면 머릿 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서, 대중에 대한 혐오, 혹은 허무로 나아가가게 된다. 차라리 이쪽이든 저쪽이든, 제.. 2018. 7. 23.
엄마를 부르기까지, 수만 번 불렀을 '엄마', '아빠' 수만 번 불렀을 엄마 아빠 이제 생후 15개월에 접어든 딸은 하루가 다르게 자기 주장이 강해져 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애교와 귀여움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엄마 아빠를 완전히 지치게 몰아붙이다가도 갑자기 쏘아주는 애교 한번으로 다시 힘을 내게 하고, 뭐가 마음에 안 들면 뒤로 누워 소리지르며 울다가도 평소 좋아하는 장난을 치면 금방 일어나 까르르 넘어가게 웃고 그러면 또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엄마 아빠도 소리 내 웃게 된다. ‘밀당’의 장인이 있다면 아기가 아닐까. 주말에는 엄마가 눈앞에서 잠시라도 사라지면 “엄마 엄마”를 숨넘어가게 부르며 찾아대는 딸 덕분에 뭘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피로함에 푹 절어 있다가, 문득 이 아기가 어떻게 “엄마”라는 말은 이렇게 또렷이 할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 2018.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