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논어 씨앗문장 - 예의 보다 '감사'하는 마음

'예'의 본체는 '감사'




林放이 問禮之本한대 子曰 大哉라 問이여 禮는 與其奢也론 寧儉이요 喪은 與其易也론 寧戚이니라

임방이 문예지본한대 자왈 대재라 문이여 예는 여기사야론 영검이요 상은 여기이야론 영척이니라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크도다. 물음이여!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을 잘 치르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4장(『논어강설』 138쪽, 성균관대 출판부, 이기동 역) 



(禮)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대개, 예(禮)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답답함’이다. 그러한 이미지가 생겨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마음’을 ‘알맞게 표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TV드라마만 보더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이 이상하게 되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오해’는 증오의 씨앗이 된다. 예를 들어 슬램덩크의 정대만이 안감독님을 오해하여 북산 농구부를 증오하는 루트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만약 그가 농구부를 박차고 나가기 전에 예(禮)에 따라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안감독님을 찾아뵙고 농구부를 나가겠노라 인사를 드리고, 농구부원들에게도 작별을 고하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만화는 안 되겠지만) 그 동안 품었던 오해와 증오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정대만이 안선생님께 예를 갖추었다면, 정대만의 방황도 없었을 지도...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에 팽배했던 온갖 오해와 증오를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다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고, 그에 따라 내놓은 답이 바로 예(禮)였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위에 인용해 놓은 문장에 있는 것, 예의 본체인 ‘마음’이다. 본 마음과는 상관없이 허식만을 따르는 예는 예가 아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단련하고 길러야할 마음은 무엇인가? 예절의 세세한 규칙을 몸에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슬픈 것을 보고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을 기르고, 사치스러운 것을 멀리하고 검소한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를 단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의 본체(本體)를 육성하는 데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주고 양육해준 부모에 대한 고마움, 호화롭지는 않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이 마음을 늘 잡고 있지 않으면 예는 멀어지고, 오해와 증오는 늘 가까이 있게 될 것이다. ‘감사’를 지니고 살면 최소한 ‘원수’를 만드는 일은 없지 않을까?



다시 말한다면,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예는 가까워지고, 오해와 증오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