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생명의 역사를 통해 배운 것, 『허리 세운 유인원』

한 권의 책, 세 개의 시선




『허리 세운 유인원』, 에런 G. 필러, 김요한 옮김, 프로네시스



배 형성에서의 유전적 조절이 어느 정도 이해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형성되는 배 조직을 가로지르는 화학신호의 경사도 생성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양한 유전자가 그들을 둘러싸는 인접 환경을 점검하고, 주변 경사도의 세기를 측정하고, 그렇게 하여 어떻게 작동할지 그리고 무슨 조직을 형성할지 지시를 내린다. 척추동물 계통의 기원에서 뒤집힘은 바로 이 등-배 방향 신체 축의 정보다. 머리는 신체의 유전자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 집합을 조절하여 형성되며, 따라서 똑같은 뒤집힘에 의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등-배 방향 조직화에서의 이런 변화는 매우 간단한 유전적 변화에 의해 유전암호로 지정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리하여 그 경사도가 정상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히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무척추동물의 신체 조직화로부터 척추동물의 신체조직화로 급속히 형질 변환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실은, 그 전체 사건은 단 하나의 세대 안에서 단 하나의 갑작스러운 돌연변이를 통해 발생했다. (137쪽)


나는 하루하루를 스스로 짠 일정대로 움직이며,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차근차근하려고 노력하는 계획형(?) 인간에 가깝다. 이러한 성향은 장점도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잘 변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큰 변화는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만들어진다’는 생각과 ‘한번에 크게 변하면, 힘들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차근차근 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언제나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도대체 점진적으로 변하는 게 어때서? 


『허리 세운 유인원』이 보여준 생명진화의 모습은 나에게 귀중한 참조점이 되었다. 에런 G. 필러는 생명이 결정적인 순간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그 변화의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준다. 또 변하고 싶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었다. ‘점진적으로 큰 변화를 꾀하려는 것은 넌센스!’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그가 제시한 몇몇 진화의 사건들은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절지동물의 개체발생과정에서 일어나는 등배축의 뒤집힘이다.(그 나머지의 놀라운 사건들을 몸소 체험해보고 싶은 분은 직접 책을 읽어 보시라.^^) 이것이 어떤 사건인가 하면, 일테면 ‘가재가 알을 낳았는데, 거기서 도마뱀이 태어났다’고 하는 매우 터무니없는 사건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뭔가 괴기스러워보지지만, 이러한 일은 생명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말이다.^^ 에런 필러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 몸의 형태를 결정하는 혹스 유전자의 돌연변이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생명체는 수정이 된 후, 동그란 배아상태에서 성체로 자라난다. 이러한 발생과정에서 맨 처음 이루어지는 일은 세포덩어리의 구획화다. 수정 직후의 동그란 배아엔 화학물질의 농도경사가 생긴다. 이 농도 차이에 따라 세포는 앞뒤, 등배, 좌우의 세 축으로 구획화된다.
 

구획마다 각기 다른 화학물질의 농도는 하나의 신호로 작용하며, 이는 조직을 형성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준다. 이 유전자가 바로 혹스 유전자이다. 혹스 유전자는 주변의 정보를 읽고 무슨 조직을 형성할지 결정한다. 이를테면, 화학물질의 경사도의 세기를 측정하거나, 그들을 둘러싸는 인접환경을 점검한다. 그런데 여기서 원래의 혹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것은 이와 같은 정보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된다. 농도 경사를 거꾸로 읽는 일이 생기게 되고, 그 결과 등배 축이 뒤집힌 전혀 다른 신체를 만들어 낸다. 발생과정 중의 배아는 매우 유연해서 이런 돌연변이를 수용해서 새로운 형태로 자라나게 된다. 그럼 등배축이 뒤집어지면 어떻게 될까?
 

절지동물과 척추동물을 비교해보자. 절지동물의 하나인 곤충은 뼈가 밖에 위치하는 외골격을 지니고, 내장기관은 하늘 쪽(등)에, 신경계는 땅 쪽(배)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바로 뼈는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고, 내장기관은 땅 쪽에, 신경계는 하늘 쪽에 있게 된다. 이러한 형태를 취하는 게 바로 척추동물이다. 바로 등배축 뒤집힘은 곤충에서 척추동물로의 극적인 진화를 가능케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말이다.   


초사이언으로 변신하듯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와우!


무척추 동물과 척추동물은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존재다. 파리나 지네같은 곤충과 물고기나 파충류 그리고 사람까지를 포함한 척추동물은 얼마나 다른가. 이런 다른 존재로의 극적인 변신은 바로 혹스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등배축의 뒤집힘같은 급격한 변화로서만 가능했다. 그런데 왜? 꼭! 순식간의 큰 변화이어야만 하느냐구? 보통 이런 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차근차근 진화해가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나? 점진적 변화에 대한 미련이 약간 남는다.
 

에런 필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커다란 진화적 혁신에서 점진적인 변화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 동안 나처럼 큰 변화를 싫어하는 생물학자들은 이 커다란 변화가 오랜 세월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등배축의 뒤집힘이 ‘순식간’에 일어났다기보다는 10도 뒤집힌 생물이 존재했고, 20, 30, 40… 180도 뒤집힌 생물들이 점차적으로 등장하면서, 등배가 완전히 뒤집힌 척추동물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렇게 점진적으로 진화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한 형태를 계속해서 남기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그런데 어떻게 30도 뒤집힌 얘들이 잘 살 수 있단 말인가? 또 어디 자연이 그들이 180도로 될 때까지 기다려 준단 말인가?^^;; 자연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생명 진화의 역사 속에 대진화와 같은 커다란 혁명적 사건이 있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진화의 역사를 공부하며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배운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어떠한 역사를 창조하며 살 수 있는지를 안다. 그래서 대규모 진화의 존재 자체는 우리 신체 속에 그러한 역사적 기록이 새겨져 있으며,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또 때론 변화란 어때야하는지까지도. 물론 모든 변화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생명의 역사는 그것이 필요할 때,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을 과감히 떠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커다란 모험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걸 말해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모든 변화가 점진적이어야만 한다는 상식을 깬다. 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커다란 변화를 상상하고, 감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에서 우리가 얻는 값진 교훈일 것이다. 




글. 정철현(남산강학원)



만일 하나의 종이 수백만 년 동안 존재한다면, 이 경우 후대의 종 개체들은 선대의 종 개체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석 유물은 많은 경우 이런 사실을 증명해주지 않는 것 같다. 부분적으로, 문제는 고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에 기인한다. 선대의 지층에서 먼저 발견된 표본과 전혀 다른 모양의 표본을 후대의 지층에서 발견하면, 고생물학자들은 그 새로운 표본을 새로운 종이라고 일컫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론은 말하는 것 그 자체에 의해서 실현된다. 만일 차이가 발견될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새로운 종이라고 일컫는다면, 하나의 종 안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기나긴 시대를 내려오는 동안 상대적으로 거의 변화를 겪지 않는다면, 이는 ‘평형(시간에 따른 의미심장하고 뚜렷한 변화의 부재)’의 증거로 여겨질 것이며, 또 어떤 종이 빠르게 변화한다면, 그 종은 개체의 안정적 존재 상태를 짧게 지속할 뿐인, 일시적 삶을 영위하는 갈라진 종이라는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154쪽)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유는 나를 비롯한 인간, 특히나 일군의 과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콕 집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웃음은 우리가 가진 어리석음에 대한 실소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허리 세운 유인원』의 저자 에런 G. 필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화석으로 종의 계보를 만든다고 해보자.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이를테면 몸의 구조가 유사한 것들을 하나의 종의 계보로 묶을 수 있다.


화석이 어떤 계보에 소속(!)되기 위해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구조라는 것!



그러면 모습이 아주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애벌레 같이 다리도 없고 꿈틀거리는 운동으로 움직일 수 있어 보이는 애들과 파리같이 날개가 달린 애들 말이다. 이런 두 종류의 화석을 발견하면 당연히 둘의 계보는 달라진다.


그런데 이게 당연하지 않다는 거다. 파리 얘기를 좀 더 해보면 왜 이게 당연하지 않은지 알 수 있다. 파리는 유충 단계를 지나 변태를 해야 파리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오로지 유충 단계만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벌레라는 계보로 집어넣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것이 파리의 모습일 때를 본다면, 동일한 놈의 계보가 곤충으로 들어가게 된다.


화석이란 지질학적 단위에서 일종의 스냅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그건 단 한 순간을 보여준다. 한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많은 생명의 단계에서 어떤 특정 순간을 말이다. 그 순간은 그 전과도, 그 후와도 완전히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화석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문제가 한 번 더 꼬여버린다. 시대가 앞선 지층에서 (가)라는 화석이 발견되고, 그 뒷 시대 지층에서 (나)라는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가)와 (나)는 생김새가 딴판이다. 이럴 경우 둘은 같은 족보를 쓸 수 없게 된다. 요컨대, (나)는 (가)와는 다른 새로운 종이 된다.



이런 식으로 족보를 쓰다보면, 결국 (가)라는 놈의 족보에는 (가)와 비슷한 애들만 들어가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눈으로 유의미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결과들을 가지고 족보를 만들다보면, 결국 새로운 차이가 발견될 때마다 우리는 앞의 것과는 다른 종이라고 부르게 된다. 바꿔 말해, 하나의 족보에는 그것과 차이나는 애들이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의 종 안에는 어떤 큰 변화도 없는 것이 된다. “만일 차이가 발견될 때마다 우리가 그것을 새로운 종이라고 일컫는다면, 하나의 종 안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돌아가게 된다. 출발은 우리의 ‘가정’이었다. 그 가정이란 눈에 보이는 차이들이 있으면, 그것들은 다른 종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정 속에서 화석을 분류한다. 그러면 차이나는 애들은 한 족보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분류가 나오면 말한다. 거봐, 한 종 안에는 그런 커다란 변화란 있을 수 없어, 라고.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세우고, 그것에 맞게 세상을 분류하고는, 세상은 틀림없이 이렇게 생겼다고 주장하는 오만. 우리의 가정은 이미 결론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론은 말하는 것 그 자체에 의해서 실현된다.”


사실 화석 문제만이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세상을, 사람을 만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이런 사람이라고 속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계속 그 사람의 그런 면모만 보게 된다. 설령 다른 면모가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면으로 그런 것들을 해석한다. 일명 ‘깔때기 원리’라고나 할까.


에런 G. 필러가 여기서 싸우는 대상은 이런 깔대기 원리다. 깔대기 원리는 절대 틀릴 수 없다. 왜? 나는 이미 나에게 맞는 것만을 보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전제, 그 가정에 잘 들어맞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배움은 아니다. 앎의 가치는 이런 깔대기를 깨버리는 데 있다. 나의 가정들이 어긋나게 하는 앎. 그래서 이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경험하게 만드는 앎. 그래서 나는 에런 G. 필러의 싸움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이 가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가진 그 깔대기들을 향한 싸움을.




글. 신근영(남산강학원)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진화의 뒤에서 이를 이끌고 가는 추진력은 바로 이 [HIV 바이러스]들의 형편없는 RNA 복제 충실도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기 위해 게놈을 복제하면서, 이 바이러스는 엄청나게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이체를 무진장 쏟아낸다. 이것이 재료가 되어 이로부터 성공적인 적응이 얻어지는 것이다. …… RNA는 ‘역전사효소’라고 불리는 효소에 의해 복제된다. 이 효소는 대부분의 RNA에 있는 서열 정보를 다소간 복제함으로써 DNA 한 가닥을 생성한다. …… 역전사효소는 핵산이라는 ‘기찻길’을 따라 달리는 열차의 엔진과 유사하다. 역전사효소는 자료가 되는 물질을 잡아끌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킨 뒤, 그 기찻길에 있는 개별적 유형의 RNA ‘글자’의 사본을 만든다. 하지만 그 열차는 계속해서 탈선하고 기찻길에서 미끄러진다. 역선자효소의 ‘엔진’이 그 기찻길에서 미끄러져 나갈 때 마다, 역전사효소는 불완전한 DNA의 짧은 단편들을 방출한다. (233쪽)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꽤 진지하고 가혹한(?) 생물학을 배웠던 것 같다. 특히 DNA가 주는 느낌이 그랬다. DNA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의 확장이다. DNA 복제를 통해 자기와 동일한 DNA를 만들고 그것을 가능한 한 오래 남기고 멀리 퍼트리려 한다. 이런 생존법이 DNA의 유일한 행동지침이다. 이를 위해 DNA는 다양한 전략들을 개발하는데, 많은 생물들의 본능들을 DNA의 자기확장 전략으로 해석한다. 가령 이타적인 행동은 결국 그것이 DNA의 확장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DNA 자체가 너무 보수적 개념이라 여겨졌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DNA이며, 그것만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니까.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져 힘겹게 살아남기 위한 DNA의 싸움이라고 할까. 


DNA의 목적은 복제를 통해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복사방식'이다. 즉 얼마나 자기와 일치하게끔 복사하는지에 따라 자기확장의 달성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사과정는 대부분 실패한다. 베끼는 과정에서 오류가 일어나기도 하고, 방해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00% 일치하는 복사가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생물학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원래라면 완벽히 본뜰 수 있지만, 오류나 실수 때문에 그렇게 못했다고. 그런데 이상했다. 언제나 완벽하지 못한 복사방식이 일어난다고? 그걸 정말 "복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HIV 바이러스는 그렇지 않았다. HIV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이다. 심각한 병의 원인이기 때문에 의사들은 사력을 다해 이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여전히 HIV 바이러스를 절멸시키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다. 이유인즉, HIV가 스스로를 복제할 때 너무 많은 오류로 인해 매번 원본과 다른 바이러스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퇴치하려면 바이러스 자체의 특성을 파악하고 다른 것과의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바이러스 자체가 이미 복제될 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특성을 파악하고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 예가 바로 "역전사효소"다. DNA에서 RNA로 일어나는 복사과정을 "전사"라고 한다.(생물학 용어에서 "복제"는 엄밀하게 DNA-DNA의 복제를 뜻한다.) HIV에서는 이 과정이 뒤집혀 있다. RNA가 DNA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HIV는 원래의 RNA를 제대로 복제하지 못한다. 엉뚱한 요소를 가져오기도 하고 순서를 틀리기도 한다. 그래서 원본의 RNA와는 다른 DNA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DNA가 사람의 DNA와 합쳐져 몸 속으로 HIV 바이러스의 사본들을 퍼뜨려 나간다. 이렇게 되니 어디까지가 원래의 HIV 바이러스인지, 어느 것이 새로 만들어진 바이러스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치료도 힘들다.
 

이 형편없는 복제율이야말로 HIV의 장점이 된다.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변종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지금처럼 "형편없는" 복제율이라 불러야 할까? 오히려 내가 보기엔 자신과 다르도록 생산하는 "능력"인 것 같다. 그 능력이 있기에 HIV는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HIV 입장에서는 단연 살아가는 능력이 될 터이다.
 

그렇다면 다른 DNA 복제방식도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도 완벽한 복제는 불가능하고 언제나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이 또한 "복제"라는 자기 동일성을 잔뜩 머금은 말로 지칭하기 힘들다. 차라리 일종의 "패러디"처럼, 기존의 것을 본으로 하되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과 맥락 속에서 달라지는 의미를 나타낸다. DNA는 언제나 자신과 다른 DNA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확장만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처음의 진지함이나 지나치게 결연한 생명 대신에, DNA 자체가 아주 재밌어졌다. 어떻게 달라질지 DNA자신도 모르는, 그 우발적인 생산들!
 

우리 DNA도 계속 달라지는 패러디를 통해 살아간다. DNA는 감수분열을 할 때 교차현상을 통해 서로 다른 DNA들을 섞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것도 자식세대가 자신과 동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부모와는 다른 돌연변이인 셈이다. 게다가 자식세대의 차이가 이후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히려 생명의 중심은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자기와 달라지는 것에 있다. 모든 생명은 어느 누구와도 다른 독특한 존재이고, 그 자체로 완벽하다. 


우리는 언제나 부모와는 다른 돌연변이이다!



결국 DNA는 얼마간 자기와 동일한 부분을 만들고 얼마간 자기와 다른 부분을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자기와 동일하게 만드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복제"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달라진 부분은 오류나 실수, 한계 같은 말로 이해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생명을 보는 방식이 들어있다. 자기 동일성이 중요하고 서로간의 차이는 해소되어야할 문제라는 태도 말이다. 그럴 때 생명은 언제나 부족하고 결여를 안고 있는 불완전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HIV를 통해 본 생명은 좀 더 역동적이다.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것들,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오류나 실수들은 복제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이며, 생명은 결여를 갖고 있기 보다는 변해가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보는 것이 훨씬 유쾌하고 발랄하다. 이런 생물학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글. 박영대(남산강학원)



*<과학 톡톡>이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그동안 과학에 대한 새로운 시선, 새로운 사유를 소개하고 이야기했던 세 분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짝짝짝짝~~~ 댓글은 미처 달지 못했지만 애정어린 마음으로 연재글을 함께 읽었던 블로그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세 분에 대한 응원, 해주실거죠? *^_^*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 _ _ )


허리 세운 유인원 - 10점
에런 G. 필러 지음, 김요한 옮김/프로네시스(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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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전포 2014.02.15 16:10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유익하게 잘보고 갑니다~^^

    • 북드라망 2014.02.17 09:21 신고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과학 톡톡> 마지막 편을 만나셨군요.
      정주행(!)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홍홍홍~ ^^*

  • 정효영 2014.02.22 14:49 답글 | 수정/삭제 | ADDR

    과학톡톡! 재미지게 흥미롭게 보고있었는데..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
    세분의 앞으로의 글들 기대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