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 아직 힘이 있을 때 만드는 멈춤
― 무성한 계절에 시작되는 방향 전환
1. 너무 잘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뇌는 어려운 과제와 목표에 맞게 항상 스스로를 조정한다. 환경과 요구에 맞춰 자원이 형상을 띠고, 필요한 자원이 없을 때는 직접 만든다. (중략) 어떤 의미에서 전문가는 경기와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아마추어의 뇌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인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기 때문이다.”(『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데이비드 이글먼, RHK)
데이비드 이글먼은 프로 축구 선수와 축구 초보자 중 누구의 뇌가 더 활발하게 움직일까를 질문한다. 우리는 보통 많은 골을 넣고 복잡한 경기의 흐름을 순식간에 읽어내는 프로 선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경기의 구조를 이해하고 수많은 가능성과 선택지, 복잡한 동작 사이에서 빠르게 판단해야 하니 당연히 전문가의 뇌가 더 바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다. 전문가의 뇌는 놀라울 정도로 잠잠하다. 오랜 훈련을 통해 축구에 특화된 신경회로가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에 몸은 일일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황에 반응한다. 반면 초보자의 뇌는 불이 난 것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공을 언제 차야 하는지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란 어떤 존재인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뇌와 몸을 하나의 길로 만든 사람이다. 처음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일도 반복하면 자연스러워지고, 일일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움직인다. 우리는 그것을 숙련이라고 부른다. 삶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에는 하나의 사건 앞에서 수없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겪는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비슷한 상황을 금세 알아보고 능숙하게 처리하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건 누구나 삶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익숙함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니 고민하지 않고, 잘할 수 있으니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다. 특히 성공을 거둔 사람일수록 자신의 방식을 의심하기 어렵다. 그나마 실패했던 사람은 다시 생각해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오랜 노력으로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방식을 의심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그렇기에 새로운 사건이 나타나도 기존 방식으로 열심히 대응한다. 그러나 규칙이 바뀌었는데도 이전의 규칙에 맞춰 더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 오랫동안 만들어놓은 회로가 먼저 작동하기 때문에 멈추기도 쉽지 않다. 쇠는 바로 이 지점, 완숙함과 성공의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쇠라 하면 먼저 힘이 빠지고, 늙고, 쇠락하고, 무너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12운성의 쇠는 그런 쇠퇴의 시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방식이 너무 잘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방식과 헤어질 결심이 필요한 때라 할 수 있다. 쇠는 제왕 다음에 오는 시간이다. 제왕은 지지 중 오화,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떠 있고 만물의 생명력이 절정에 이른 시간이었다. 더 올라갈 곳이 없는 충만한 상태다. 그러나 자연은 그 절정에서 머물지 않는다. 절정에 이르면 낮이 밤으로 이동하듯 운동의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쇠는 미토(未土)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다. 아직 여름의 열기는 남아 있고 초목은 여전히 무성하다. 겉으로 보면 오화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연의 흐름은 이미 가을을 향하기 시작한다.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는 데 사용되던 힘이 이제 열매를 익히고 씨앗을 준비하는 쪽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겉은 제왕처럼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이미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미(未)는 ‘아직 ~하지 않았다’, ‘아직 아니다’라는 뜻이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도 같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쇠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아직’이라는 시간이다. 쇠는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아직 할 수 있지만 이전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신호에 가깝다. 쇠는 힘을 완전히 잃은 뒤에 찾아오는 시간이 아니다. 아직 힘이 있지만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한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려야 발산에서 수렴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 미세한 차이를 아는 게 쉽지가 않다. 아직 발산의 기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힘도 있고, 경험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계속할 능력도 있다. 변화를 알아차리고 멈추려고 하면 주변에서는 오히려 “아직 잘하고 있는데 왜 물러나려고 해?”라고 말릴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처럼 쉽게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을 지금까지 오게 한 방식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솔직히 제왕까지는 이런 방식이 통했다. 장생에서 목욕, 관대, 건록, 제왕을 거치면서 자기 삶을 만들기 위해 힘을 충분히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쇠에 오면 지금까지 익숙했던 방식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몸에 미세한 피로가 느껴지거나, 예전에는 잘 작동하던 방식이 어딘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편하게 주도했던 일에 누군가 나서는 게 거슬리기 시작하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작은 변화를 알아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동양에서는 ‘기미’라고 한다. 기미는 너무 미미해서 기존의 능숙함으로 덮어버리고 무시하기 쉽다. 쇠의 위험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익숙한 방식으로 너무 잘 해결해버리는 데 있다. 프로 선수의 뇌가 경기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듯 삶의 전문가가 된 우리 역시 익숙한 삶의 규칙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기의 규칙도, 삶의 규칙도 계속 같지 않다는 것이다. 쇠는 이제 여름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연한 가을도 아니다.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사이의 시간! 참 애매하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당장 버리기는 어렵다. 몸과 상황은 변화의 신호를 보내지만, 그 변화를 알아채기보다는 기존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당장은 문제가 해결된 듯 보여도 시간이 갈수록 어긋남은 점점 커져만 간다. 쇠의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는 않다. 변화의 기미가 나타날수록 오히려 지금 가진 것을 더 강하게 붙잡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는 ‘이 힘이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일하고, 더 인정받고, 더 증명하고 싶어진다. 예전보다 무언가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긴다. 아직 힘이 있기 때문에 더 세게 밀어붙이고 싶은 것이다. 바로 그 조급함이 오히려 기미가 될 수 있다. 쇠의 기미는 힘이 없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힘을 더 많이 사용하고 싶은 충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쇠의 지혜는 힘이 바닥난 다음에 오는 게 아니다. 아직 할 수 있을 때 변화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아직 힘이 있고, 경험이 있고, 내가 나서면 해결할 수도 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사용해온 방식, 나를 성공으로 이끈 방식을 의심해야 한다. 아직 할 수 있음이 계속해야 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왕까지가 확장하고 성취하고 주도하고 움직이는 힘이었다면, 쇠에서는 힘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덜 움직이고, 덜 개입하고, 기다리고, 듣는 힘. 많이 하는 것보다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묻고,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는 대신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선택하기 시작하는 힘. 힘이 사라져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능력. 쇠는 제왕보다 힘이 약해지는 시간이 아니다. 힘의 형식이 바뀌는 시간인 것이다.
2. 몸은 먼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큰 강을 만났다. 그는 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뗏목을 만들었고, 그 뗏목에 의지해 무사히 강을 건넜다.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뗏목을 강을 건넌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붓다는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라고 말한다. 뗏목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놓으라는 것이다. 삶에도 이런 뗏목이 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생각과 습관, 사람을 대하는 방식,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오랫동안 갈고닦은 전문성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를 구했고,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쉽게 놓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제, 강을 건너 땅을 걸어야 하는데 뗏목을 등에 지고 걷는다면, 한때 나를 살려준 것이 오히려 나를 무겁게 하는 짐이 된다.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삶의 회로 또한 우리를 능숙하게 만든다. 문제는 너무 능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한때 잘 통했던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옳은 정답’으로 여기게 될 때다. 그러면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잘 작동했던 방식이 변해야 할 때라는 걸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몸이라는 기막힌 센서가 있고, 그것을 잘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만물이 계절의 변화에 맞게 모습을 바꾸듯 인간의 몸 역시 생의 주기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동의보감』에서는 나이에 따른 몸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열 살에는 오장이 비로소 안정되고 혈기가 통하기 시작하며, 스무 살에는 혈기가 왕성해지고 근육이 자란다. 서른 살이 되면 오장이 크게 안정되고 근육이 단단해지며 혈맥이 왕성하고 충실해진다. 그리고 마흔이 되면 오장육부와 십이경맥이 “모두 크게 성하여 평정된다.” 아직 쇠약한 몸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성숙하여 안정된 몸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주리가 성기기 시작하고, 얼굴의 화색이 줄어들며, 머리카락이 희어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흥미롭다. 충만함과 쇠의 기미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공자의 생애 주기로 보면 마흔은 불혹(不惑)의 시기다. 살다 보면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의 평가, 성공과 실패,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당장의 이익과 손해에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시간을 통과하며 마흔에 이르면 외부의 상황이나 타인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몸 역시 그것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다. 동시에 몸에는 이전과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얼굴빛이 달라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피부의 결이 변한다. 그리고 오십 세가 되면 변화는 더 분명해진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십 세에는 간기가 쇠하기 시작하고 간엽이 엷어지며 담즙이 줄어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눈이 밝지 못하다”고 말한다. 이후 예순에는 심기, 일흔에는 비기, 여든에는 폐기, 아흔에는 신기의 변화가 이어진다. 오십을 기점으로 몸은 이전과 다른 질서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쇠한다’는 것은 외적으로는 기능의 쇠락이지만 이전과 다른, 힘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쇠락한 몸은 더 많은 힘을 쓰는 게 아니라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선택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지, 어디에 힘을 쓰고 어디에서 힘을 뺄 것인지의 선택. 더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오십의 변화가 간담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의학에서 담(膽)은 결단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간담의 기능 변화는 젊은 시절처럼 모든 것을 움켜쥐기보다 이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결단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몸의 변화가 삶의 선택,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공자의 오십 지천명(知天命)을 몸의 맥락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 힘을 쓸 때와 거둘 때를 아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더 큰 질서를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지천명은 하늘의 때(天時)에 따른 몸의 변화에 맞게 삶을 변화시킬 줄 아는 능력인 것이다.
큰 나무는 바람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그러나 나무는 그 흔들림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다. 흔들리면서도 뿌리를 놓치지 않고, 바람이 지나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쇠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함께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새로운 계절인 것이다. 그렇다. 젊을 때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키워야 했다면, 이제는 나의 의지만으로 움직일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하다. 몸이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고, 시대가 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큰 스케일로 조망할 수 있는 관점. 그때 그 변화 앞에서 이전의 나를 고집하기보다 변화와 함께 움직이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것이 무조건 세상에 순응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큰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도 뿌리까지 뽑히는 것은 아니듯, 쇠의 유연함은 오히려 단단한 뿌리에서 나온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을 것인지, 어디에서는 흔들리고 어디에서는 버틸 것인지를 분별하는 힘. 이것이 쇠에서 새롭게 배워야 할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장생, 목욕, 관대, 건록, 제왕을 거쳐 쇠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배웠다. 더 잘하는 법을 배웠고, 더 빨리 판단하는 법을 배웠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을 배웠고,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것들은 모두 소중한 뗏목이었다. 그러나 천명을 안다는 것은 그 능력을 계속 강화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뗏목에서 내려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아는 데에도 있다. 그래서 쇠는 단순히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건강의 배신』에 인용된 베티 프리던은 노화의 긍정적인 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화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야망, 경쟁심, 욕망의 감소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듦에 따라 점점 더 진정한 의미의 자기 자신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되죠.”(『건강의 배신』, p.218에서 재인용)
가을이 되면 나무가 잎을 내려놓듯 삶에도 야망과 경쟁심,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것은 욕망이 사라져 삶이 작아지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든 것을 얻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힘이 줄어들면서 무엇이 정말 자기 삶에 중요한지가 조금씩 선명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쇠의 덜어냄은 상실만을 뜻하지 않는다. 바깥을 향해 흩어졌던 힘이 조금씩 거두어지면서, 이전보다 더 자기 자신의 삶에 가까워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

3. 두 번째 산이 있다는 것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은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산은 정복한다. ‘나’가 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정상이 어디인지 멀리서 확인하고는 그곳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간다. 그런데 두 번째 산은 다르다. 두 번째 산이 ‘나’를 정복한다. 나는 어떤 소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어떤 부당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야심을 품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며 독립심을 발휘하지만, 두 번째 산에서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친밀하며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p.22)
몸이 먼저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기미를 보내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할까. 데이비드 브룩스는 우리의 삶에 두 개의 산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자신을 만든다. 공부하고, 직업을 얻고, 능력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찾아간다. 12운성의 흐름으로 보자면 장생에서 시작해 제왕까지가 첫 번째 산이라 할 수 있다. 태어나고, 경험하고, 자기 기준을 세우고, 자기 힘으로 설 수 있게 되면서 마침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펼친다.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데에는 힘이 필요하다. 나를 세워야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첫 번째 ‘나’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전과 다른 질문이 찾아온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원하던 것을 이루었는데 이상하게 허전하다. 어떤 사람은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산에서 굴러 떨어진다. 직업을 잃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병을 만나거나, 자신이 세운 계획이 무너진다. 브룩스는 이런 시간을 ‘계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계곡에 떨어진다고 저절로 두 번째 산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첫 번째 산으로 돌아가 이전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발버둥 칠 수도 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하고, 더 큰 성공으로 실패를 만회하려 하고, 생긴 빈자리를 또 다른 성취로 재빨리 채울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산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첫 번째 산을 다시 오르는 셈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계곡에서 이전과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된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쇠의 시간과 만난다고 생각한다. 쇠는 제왕에서 얻은 힘이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 힘을 충분히 사용했기에 이제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시간이다. 더 이상 ‘이루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지 않는 시간 말이다.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지금까지 이룬 것이 온전히 내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때가 맞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우연과 조건들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을.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삶의 질문도 달라진다. “나는 무엇을 더 이룰 것인가?”에서 “나는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로. 브룩스는 두 번째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들은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같은 책, p.16)
첫 번째 산에서는 ‘나’를 세우는 일이 중요했다면, 두 번째 산에서는 그렇게 얻은 힘을 무엇에 내어줄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모든 가능성을 붙잡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갈 때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 첫 번째 산이 성취의 산이라면 두 번째 산은 소명의 산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은퇴도 쇠와 잘 어울린다. 은퇴를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서 밀려나는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직 능력이 있고, 경험이 있고, 내가 하면 더 잘할 수도 있을 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것. 내가 앞에 설 수 있지만 다음 사람이 앞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가진 힘을 다른 사람의 힘이 자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다. 제왕까지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면 쇠에서는 자신이 만든 자리에 여백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일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고, 내가 알고 있는 답을 곧바로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자기 답을 발견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쇠의 물러남은 실패가 아니다. 첫 산에서 내려와 힘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첫 번째 산은 회사 생활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 올라갈 힘이 없다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멈추었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그렇다고 회사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전과 비슷한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직장을 찾거나, 내가 잘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재빨리 채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백을 첫 번째 산과 비슷한 것으로 급히 채우지 않을 수 있었다.
쇠의 시간이란 어쩌면 이런 시간이 아닐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직 무엇인가 할 수 있지만 곧바로 다음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 익숙한 답으로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잠시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 몸이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을 요구할 때 그것이 어디로 데려갈지 계산하지 않고 기다려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 여백에서 공부가 찾아왔다. 처음부터 공부가 내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통해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몸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고 했고, 나는 멈추었다. 그리고 그때 내 앞에 온 공부 인연을 따라갔다. 그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계산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산과 만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산은 우리가 계획해서 찾아가는 산이 아닐지도 모른다. 첫 번째 산에서 내려온 뒤 곧바로 또 다른 산을 정해놓고 달려간다면 이름만 다른 첫 번째 산을 다시 오르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산과 만나기 위해서는 산과 산 사이의 계곡을 통과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시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시간, 아직 다음 산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연도 그렇다. 여름이 끝났다고 곧바로 다음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가을에는 잎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거두며, 겨울에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생명력을 거두어들인다.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동안 다음 생명이 준비된다. 쇠도 마찬가지다. 쇠는 힘이 없어지는 시간이 아니다. 아직 힘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익숙한 삶을 반복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멈춤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다음 답을 서둘러 만들지 않고, 몸이 보내는 기미를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뀔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 여백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내가 한 걸음 물러남으로써 다른 사람이 앞으로 나올 수도 있고, 내가 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누군가 자기 답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움켜쥐지 않음으로써 이전에는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과 사건과 가능성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내가 산을 올랐다. 그러나 두 번째 산에서는 어쩌면 산이 나를 부른다. 내가 어디로 갈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비워진 자리에서 무엇이 나를 부르는지를 듣는 것이다. 그 부름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쇠에는, 아직 다음 산을 몰라도 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4. 운명에 새겨진 쇠의 기질
앞에서 쇠를 하나의 생명 과정으로 살펴보았다. 너무 잘하게 된 자신의 방식을 의심하고, 몸이 먼저 감지하는 변화의 기미를 알아차리며, 첫 번째 산에서 얻은 힘의 사용법을 바꾸는 시간. 아직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하지 않고, 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조금씩 여백을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런 쇠가 한 사람의 기질로 나타날 때는 어떤 모습일까.
12운성의 쇠는 기운의 쇠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왕을 지나온 쇠에는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자기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본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쇠의 기질에는 신중함과 분별력,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있다.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날 것인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지 살피는 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쇠의 함정이기도 하다. 기미를 느낀다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수 있다는 뜻이고, 경험이 많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판단하기 쉽다는 뜻이다. 신중함은 우유부단함이 될 수 있고, 거리를 둘 줄 아는 힘은 냉담함이 될 수 있다. 덜어낼 줄 아는 지혜는 삶 자체를 축소시킬 수 있고, 물러날 줄 아는 힘은 자기 자신까지 지워버릴 수 있다. 쇠의 힘을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지혜가 되기도 하고 삶을 가로막는 습관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쇠의 기질을 타고났거나 쇠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면 자신의 힘을 없애려 하기 보다 그 힘이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1) 기미를 읽는다 - 통찰과 걱정 사이
쇠에 해당하는 미토(未土)는 아직 여름의 열기를 품고 있지만 자연의 방향은 이미 가을을 향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보다 보이지 않는 변화가 먼저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쇠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작은 변화를 비교적 빨리 알아차린다. 사람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거나, 관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거나, 잘 돌아가던 일에서 작은 어긋남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재빨리 감지한다. 다른 사람은 “별일 아니야”라고 지나가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 감각이 잘 사용되면 통찰이 된다. 문제는 기미를 결과와 너무 빨리 연결할 때다. “뭔가 달라졌어.” 여기까지는 감각이다. 그런데 곧바로 “분명 잘못될 거야”라고 결론을 내리면 기미는 걱정이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상처받기 전에 관계에서 물러나고, 실패하기 전에 일을 포기할 수도 있다.
쇠의 조급함도 여기서 생긴다. 변화의 기미를 남들보다 먼저 감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가진 것을 더 세게 붙잡고 싶어질 수 있다. 기존 방식이 계속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더 일하고, 더 인정받고, 더 증명하려 한다. 변화의 신호를 읽었는데 역설적으로 이전의 삶을 더 강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쇠에게 필요한 것은 기미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기미와 결론 사이에 시간을 두는 것이다. “뭔가 달라지고 있다.” 거기까지만 알아차리면 된다. 아직 무엇이 올지는 모른다. 가을의 기미를 알아차렸다고 해서 당장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니다. 쇠의 통찰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아직 모르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2) 경험이 많다 - 지혜와 고정관념 사이
쇠는 관대와 건록, 제왕을 이미 지나왔다. 살아보았고, 부딪혀보았고,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쇠의 기질에는 ‘이미 살아본 사람’의 감각이 있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을 알아차리며, 일이 대략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짐작한다. 어느 정도 맞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험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너무 빨리 해석할 위험도 있다. “해봐서 알아.” “그런 사람은 내가 잘 알아.” “결국 이렇게 될 거야.” 이 말들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맞는 경우가 많아서 더 위험하다. 앞에서 프로 선수의 뇌를 살펴보았듯 숙련된 사람에게는 이미 잘 만들어진 회로가 있다. 문제는 그 회로가 너무 잘 작동해서 새로운 상황에서도 익숙한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데 있다. 쇠의 위험은 답을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빨리 나오는 데 있다. 그래서 쇠의 경험에는 작은 틈이 필요하다. “나는 많이 살아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라는 태도가 경험을 고정관념이 아니라 지혜로 바꾼다. 내가 아는 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모르는 것이 들어올 작은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3) 물러날 줄 안다 - 분별과 단절 사이
쇠의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 젊을 때는 나서는 힘이 필요하다. 자기 의견을 말하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쇠에 이르면 질문이 달라진다. 내가 말해야 하는가, 조금 더 들어야 하는가. 내가 해결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해보도록 기다려야 하는가. 내가 앞에 서야 하는가, 이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하는가. 쇠의 물러남은 힘이 없어서 뒤로 밀려나는 것과 다르다. 아직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한다. 내가 답을 알고 있어도 곧바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하면 더 빨리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해보도록 기다릴 수 있다. 내가 계속 앞에 설 수 있지만 다음 사람이 앞으로 나올 자리를 만들 수도 있다. 이때 물러남은 포기가 아니라 ‘힘의 전환’이 된다. 내가 가진 힘을 다른 사람의 힘이 자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물러남이 “조금 더 보자”, “아직 때가 아니야”라고 하다가 정작 필요한 순간을 놓칠 수도 있다. 때를 안다는 것은 언제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여야 한다. 거리를 두는 힘이 지나치면 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관심이 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다가 연결 자체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거리 두기와 단절은 다르다. 쇠에게 필요한 것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거리다. 다른 사람을 끌고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의 삶에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 앞서서 끌고 가지 않지만 옆에서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다. 쇠는 여전히 기운이 남아 있으므로 그 힘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쇠에서는 “나는 이제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와 동시에 “여전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의 질문이 동시에 필요하다.
4) 덜어낼 줄 안다 - 집중과 삶의 축소 사이
쇠에 들어서면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감각이 생긴다. 시간과 에너지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낼 필요도 없고,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가능성을 붙잡고 살 수도 없다. 그래서 관계도, 일도, 물건도, 관심사도 조금씩 단순해진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을의 나무가 모든 잎을 끝까지 붙잡고 있지 않듯 쇠는 덜어내면서 힘을 모은다. 지혜로운 쇠는 삶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집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덜어내는 것이 지나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새로운 책을 읽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 가지 않게 된다. “이제 이런 것까지 할 필요가 없어.” 그렇게 하나씩 덜어내다 보면 삶이 단순해진 것이 아니라 세계가 좁아질 수도 있다.
쇠는 끝의 기미를 일찍 감지하는 기운이다. 그러나 쇠는 아직 사(死)도 아니고 절(絶)도 아니다. 미토의 들판에는 여전히 여름의 열기와 생명력이 남아 있다. 다만 그 힘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끝의 기미를 너무 빨리 결론으로 만들면 아직 살아 있는 현재의 힘까지 사용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끝날 텐데.” “이 나이에 뭘 새로 시작해.” “이제는 내려놓을 때야.” 이런 말은 때로 성숙해 보이지만 쇠에게는 위험한 자기기만이 될 수도 있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과 아직 살아 있는 시간을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쇠 뒤에는 병·사·묘·절이 있고, 다시 태·양·장생이 이어진다. 끝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것은 삶을 미리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음 변화가 들어올 자리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쇠의 삶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들어올 자리.’ 그 자리가 없다면 쇠는 두 방향으로 치우칠 수 있다. 하나는 이미 잘하는 방식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일찍 삶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전자는 과거를 놓지 못하고, 후자는 미래가 오기도 전에 문을 닫는다. 둘 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맞이할 여백이 없다는 점에서는 같다. 쇠의 균형은 그 사이에 있다. 기미를 보되 미래를 단정하지 않는 것. 경험을 믿되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것. 신중하되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는 것. 거리를 두되 연결을 끊지 않는 것. 덜어내되 세계를 좁히지 않는 것. 물러나되 자기 자신을 지우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끝을 감지하되 지금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이것이 쇠가 배워야 할 가장 어려운 균형 잡기일 것이다.

5. 나의 사주에서 쇠 찾기
그렇다면 나의 사주에서 쇠는 어디에 있을까. 각 천간이 쇠를 만나는 지지는 서로 다르지만, 흥미롭게도 모두 진·미·술·축에 해당한다. 네 지지는 모두 토이며, 한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경계에 놓여 있다. 진토는 봄에서 여름으로, 미토는 여름에서 가을로, 술토는 가을에서 겨울로, 축토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자리다. 이때의 자연은 아직 이전 계절의 모습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미토에 이르렀다고 여름의 나무가 갑자기 잎을 떨구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무성하고 햇빛은 뜨겁지만, 그 안에서는 보이지 않게 다음 계절이 시작되고 있다. 쇠가 모두 이 네 개의 토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쇠는 하나의 계절이 끝난 뒤가 아니라,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는 동안 다음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관대에서 삶의 기준과 형식을 세우고, 건록에서 그 기준을 자기 삶으로 살아냈다면, 제왕에서는 그렇게 살아낸 힘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다음이 쇠다. 이제 중요한 것은 힘을 얼마나 더 크게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달라지는 때에 맞추어 그 힘을 어떻게 다르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같은 쇠라도 사주의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변화의 기미가 먼저 나타나는 영역은 달라진다. 년지에서는 세상과 환경을 읽는 방식으로, 월지에서는 사회적 역할과 일의 방식으로, 일지에서는 가까운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시지에서는 다음 세대와 미래를 대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제 각각의 자리에서 쇠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살펴보자.
1) 년지의 쇠 - 세상의 기미를 읽는 힘
년지는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나는 환경과 집안, 사회적 배경과 연결해서 살펴볼 수 있다. 년지에 쇠가 있다면 세상의 분위기와 주변의 변화를 민감하게 읽는 기질로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위기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비교적 빨리 알아차린다. 이것은 변화의 시기에 중요한 힘이다. 하지만 기미를 잘 읽는 사람일수록 모든 변화에 반응하려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도 빨리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세상의 기미를 읽는 힘이 어느 순간 세상의 눈치를 보는 힘으로 바뀐다. 그래서 년지의 쇠에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세상의 기미를 읽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 기미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변화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다. 달라지는 세계를 충분히 관찰하면서 그 세계와 내가 어떻게 새롭게 관계 맺을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2) 월지의 쇠 - 잘할 수 있는 힘을 조금 내려놓는 것
월지는 사회생활과 일, 자신이 가장 활발하게 힘을 사용하는 영역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월지에 쇠가 있다면 경험이 쌓일수록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일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 발달할 수 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문제가 생길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맡겨야 하는지를 오랜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문제는 능력이 없어졌을 때가 아니라 너무 잘할 수 있을 때 일어난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른데.” “이 일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할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하고, 잘하기 때문에 놓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까지 나를 유능하게 만들어 준 경험이 오히려 새로운 변화가 들어올 자리를 막을 수도 있다.
그래서 월지의 쇠에서는 ‘할 수 있는가’와 ‘해야 하는가’를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덜 개입할 수 있고, 답을 알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릴 수도 있다. 내가 한 걸음 물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 방식으로 해볼 공간을 열어줄 수도 있다. 경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자기 자신 사이에 작은 거리를 만드는 것. 아직 힘이 있을 때 다른 힘이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월지 쇠가 배워야 할 힘의 사용법이다.
3) 일지의 쇠 - 가까운 사람을 다시 낯설게 보는 것
일지는 배우자나 가까운 관계, 그리고 일상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타인과 연결해서 살펴볼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말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도 예상할 수 있다. 그 경험은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상대를 더 이상 새롭게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원래 저 사람은 그래.” “말해봐야 똑같아.”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오래 봤는데.” 이 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지금 눈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만들어 온 그 사람에 대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몸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관심이 변하며,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 어제까지 내가 알던 사람이 오늘은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쇠에서는 바로 그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지의 쇠에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 상대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보고 있는가?” 보인다고 곧바로 말하지 않고, 이상하다고 바로 결론 내리지 않는 것.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도 다시 낯설게 바라볼 수 있을 때 관계에도 새로운 계절이 들어올 여백이 생긴다.
4) 시지의 쇠 - 다음 사람에게 여백을 건네는 것
시지는 생의 후반부와 다음 세대, 그리고 내가 만들어놓은 것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와 연결해서 살펴볼 수 있다. 오래 살아갈수록 경험은 쌓인다. 무엇이 효과적인지, 어떤 선택이 위험한지, 어디에서 실패하기 쉬운지, 어떤 길이 조금 더 빠른지도 알게 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을 다음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진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 길로 가지 마.” “이렇게 하면 훨씬 쉬워.” 그 말에는 실제로 많은 경험과 애정이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살아보았다고 해서 다음 사람의 시행착오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답을 너무 빨리 알려주면 상대는 실패를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 힘으로 길을 찾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제왕에서는 살아낸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길을 비추었다. 쇠에 이르면 그 빛을 어디까지 비출 것인가도 배워야 한다. 내가 먼저 보고 알려주는 것이 능력이었다면 이제는 보고도 기다리는 것이 능력이 될 수 있다. 내가 해결해 주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지만, 상대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것 역시 사랑일 수 있다. 그래서 질문도 달라진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보게 해줄 것인가?”에서 “이 사람이 스스로 볼 수 있도록 나는 어디까지 함께 갈 것인가?”로. 그러므로 시지의 쇠에서 물러남은 관계를 끊거나 책임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내 힘이 들어가야 할 자리와 상대의 힘이 자라야 할 자리를 구별하는 것이다. 보인다고 모두 말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모두 해주지 않으며, 알고 있다고 모든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 어쩌면 이것이 먼저 살아본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선물인지도 모른다.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을 건네는 것.
쇠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잘 물러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직 힘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전의 방식과 경험을 더 오래 붙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내려놓았는가보다, 지금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일이다. 세상의 변화, 일하는 방식의 변화, 가까운 사람의 변화, 그리고 다음 세대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자기 힘의 사용법도 조금씩 바꾸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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